엘소드(Elsword)

[엘수색대 전원] 나약함과 이별할 시간입니다. - 2016.6.26 전력 이별

월하(月河) 2016. 6. 26. 23:20

제비꽃이 휘날린다. 연두빛 언덕 위에 누워 자연과 하나된 듯한 존재의 뾰족한 귀가 보인다. 언덕과 같은 빛깔의 머리카락이 햇살을 받아 금빛으로, 은빛으로, 하늘빛으로 반짝이길 잠시, 느리게 뜨인 눈이 이것도 곧 끝날 환상이라 고했다. 보다 더 강해지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노력해왔었다. 인간들과 마족들이 함부로 파괴하는 숲을 지키기 위해 처음으로 활을 잡았던 그 날을 기억한다. 타고난 시력과 순발력으로 궁수 한 명의 몫을 해내는 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었다. 정든 보금자리. 자신의 고향이자 정신적 지주인 숲 구석구석을 담으며 친하게 지내던 나무들과 동물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곤 지금 이 언덕 위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가장 좋은 경치는 마음에 있는 것이라 했던가. 벌써부터 그리움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한동안 이 하늘을 볼 수 없을 것이다. 

 

 

피 맺힌 절절함이 고막을 타격한다. 한이 서린 울음소리가 골목을 매우고 한없이 깊어진 절망이 어린아이의 의식을 불태웠다. 마족들이 휩쓸고 간 자리는 남은 것이 거의 없었다. 그들의 술수에 놀아나 애꿎은 곳에 병력을 배치하여 구할 수 있는 생명을 살해한 꼴이 되자 군사의 리더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상황보고를 한 병사에게 생존자를 찾으라 이른 뒤 리더는 조금 전부터 자신을 공포에 질린 시선으로 바라보던 아이에게 다가갔다. 살짝 들려있던 궤짝이 소리없이 닫히는 것에 조용히 타이르는 소리가 이어진다. 잠시 후 열린 궤짝에서 그슬린 흔적이 가득한 적발의 사내아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의 것과 비슷한 색상에 문득 고향에 두고 온 어린 남동생이 생각난 기사는 아이를 안아올려 병사들이 주둔한 곳으로 갔다. 더 이상의 생존자가 없는 마을에 계속 머무를 필요는 없다. 지금은, 떠날 때이다.

 

 

타인의 눈을 피하여 발걸음 닿는 대로 걷다보니 이상한 동굴에 도착했다. 깊은 숲 속, 산짐승마저도 자취를 감춘 이곳은 수련을 하기 딱 좋은 곳이었다. 오래전에 죽었어야 할 육신은 문명이란 것과 결합되면서 그 생이 연장되었고 그것은 자신에겐 더없는 고통으로 다가왔었다. 그러나 그것에 계속 얽매여 있을 순 없었다. 잃어버린 것이 있단 것은 되찾아야 할 것이 있단 것과 같았다. 비록 온전한 모습으로 되찾을 순 없어도 적어도 남아있는 불미스런 기록만큼은 제거할 수 있을 것이었다. 아직 사람의 것인 손이 주먹을 쥔다. 복수할 것이다. 반드시.

 

 

쇠와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울린다. 세월에 젊음을 반납한 대가로 노련함을 얻은 중년의 기사와 아직 젊은 육체를 소유하고 노련함을 갈망하는 젊은 기사간의 대련이 절정에 치닫는다. 어릴 적 헤어진 사람은 자신의 형제이자 왕국 최고의 기사였다고 했다. 중년의 기사는 젊은 기사의 패기를 기특해하며 특별히 자신의 제자가 되는 것을 허락했고 나날이 일취월장하는 실력에 언제 둥지를 떠나보낼 지 고민하고 있었다. 새는 주어진 하늘이 클수록 성장하는 법. 조만간 이별이 만남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부딪히는 검날의 주인은 생각했다.

 

 

집을 떠나 정신적 고향이 된 탑에서 망토를 두른 소녀가 걸어나왔다. 앞으로 자신의 앞에 펼쳐질 수많은 이야기들과 그들로 인해 찾을 자신의 가능성에 소녀는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먼 길에 오르기 전 필요한 것들을 구매한 뒤 숲으로 향했다. 이 길을 따라가면 수도에 닿을 것이다.

 

 

긴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뜬 곳은 스스로를 봉인했던 캡슐 안이었다. 이전보다 강해진 나소드들을 보며 알 수 없는 희열을 느낀 것 같았다. 감정회로란 것이 존재한다고 한들 나소드인 자신이 인간의 감정을 느낄 수 있을 리 없을 터인데 어째서라고 묻는다면 이 회로를 집어넣은 자신을 만든 자의 변덕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 같았다. 채비라고 할 것도 없이 자신의 사랑하는 기어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펼쳐진 것은 망망대해. 이 바다를 건너 대륙으로 가면 자신의 존재의의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깊은 한숨은 그간의 수련이 고됨을 알려주는 동시에 더 이상 남아있는 것이 없음을 뜻했다. 드디어, 기존에 익혔던 기술과 새로이 연마한 기술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게 되었다. 태어날 때부터 자신을 수호한 캐논과 순백의 갑주는 자신이 엘에게 선택받았음을 알려주는 상징이자,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가문의 유산이었다. 처음으로 선 전장에서 무고한 사람들이 한없이 많이 죽는 것을 봐온 자신은 더 이상 그런 사람이 없게 만들 거라 새긴 비석을 스스로에게 세웠다. 이제 안락한 수련장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 신념을 위해서.

 

 

오라버니를 잃은 슬픔은 더 없이 깊었다. 가문과 명예를 모두 버리고 마족의 앞잡이가 된 오라버니에게 물을 것이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창은 약해빠졌다. 옆에는 자신에게 거래를 제안한 강력한 존재가 여전히 손을 뻗을 채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 존재라면 자신에게 필요한 강력한 힘을 줄 수 있을지도 몰랐으나 그녀의 미소는 통 속을 알 수 없었다. 자신이 바라는 것은 가족의 안전과 오라버니를 원래대로 되돌려 놓는 것. 목적을 위해서라면 이런 망설임마저 사치일 수도 있으나 스스로의 안전이 걸린 문제에 망설임이 따랐다. 일말의 침묵 끝에 황금빛 눈이 결의를 내비쳤다. 가문의 여식은 목적을 위해 자신의 안전을 대가로 지불했다.

 

 

모든 것이 불탔다. 이미 그 시점에서 모든 것과 이별했다고, 오로지 분노와 증오, 힘에 대한 열망만이 남았다고 자부하고 있던 공학자는 오랜 세월 자신이 강해질 때까지 머무르던 푸른 차원에서 나와 또 다른 푸름을 맞닥뜨렸다. 몇 년만에 보는 나무와 생명체들에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자료를 검색하다 우연히 열람하게 된 것은 엘리오스에 사는 인공지능의 고대 나소드. 기능도, 위치도, 만든 이도 불명이지만 나소드를 연구하는 자신에게 그것의 코드는 충분히 가치를 지니고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어떻게 찾아낸 그녀의 시그널로 위치를 추적해본다. 스크린에 표시된 움직이는 점. 그는 목표물이 향하는 곳으로 좌표를 설정했다.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었다. 자신에게 대가 없는 친절을 베푼 사내에게 보상을 해주는 마음으로 힘을 빼앗긴 마족은 거래를 제안했다. 시간이 없단 말에 사내는 별다른 의심없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자신을 노리던 배신자를 처단함으로서 일단의 위기는 모면했다. 앞으로 어떤 종류의 암살자들이 몰려올 지는 알 수 없었으나 지금은 그를 살린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자신은 이미 권력과 지위와 이별한 몸이었다. 더 이상의 이별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

 

 

마족들의 비명이 낭자한 곳에서 고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개인별로 최강의 기력을 가진 전사들은 각자의 무기로 적을 소탕하고 있었다. 검, 마법, 나소드, 창, 대포, 마족의 힘... 그들에 의해 떨어진 머리는 셀 수 없을 정도였으나 쉴 새 없이 몰려드는 마족 병사들에 전사들은 서서히 지쳐갔다. 거칠어지는 숨을 가다듬으며 허공을 가르길 두어 번, 온몸의 근육은 휴식을 요구하였으며 비릿함에 지끈거리던 후각은 감흥이 없어진 지 오래였다. 총성이 울린 것은 그때였다. 하늘에서 이 세계의 것이 아닌 듯한 빛이 내려왔고 이제껏 본 적 없는 화력무기들이 순식간에 근방에 있던 모든 마족을 사살했다. 청안의 여자는 빨간 대지 위에서 상큼하게 웃으며 엘 수색대 대원들에게 다가왔다. 저벅저벅 걸어오는 소리는 새로운 동료의 출현을 알리고 있었다.

 

"나약함과 이별할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