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에타트] Crevasse
01 The unknown
오늘도 분주하게 움직이는 손을 보며 과거를 회상한다. 자신의 집착이 거대해져 스스로를 집어삼킬 즈음 만난 어린 녀석은 막연하게 눈을 반짝이며 형처럼 되고 싶다 말했다. 그 때의 나는 '내가 먼저 성공해서 도와줄게.'라고 했던가.
신경질적으로 연필 긁는 소리가 나더니 '뽀각' 이내 부러지고 만다. 머리를 헝클이는 손이 짜증스럽다는 듯 책상을 내려치기 직전 잠잠히 누워 있던 디아볼릭 에스퍼가 눈을 떴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책상 앞에 앉아 신음하는 어린 녀석이 보인다. 그 때의 꼬맹이가 컸다. 언제 저렇게 커버렸을까, 흘러가버린 세월의 무상함을 느낀 눈이 검게 변한다. 자신이 일어난 것도 모른 채 열중하고 있는 뒷모습에 에스퍼는 몸을 일으켜 비척비척 다가갔다. 부비적인 목 언저리가 따뜻하다. 그 따뜻함이 베개보다 부드럽다 느낀 것이 착각인지, 환상인지, 곰곰히 생각할 때 즈음 목소리가 들렸다.
"깼어?"
"하지 말랬잖아..."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이미 몇 달 전, 아니 몇 년 전부터 무의미해진 말이었다. 녹음된 말 밖에 반복 못하는 고장난 인형처럼 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각자의 의견밖에 주장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에스퍼와 타임 트레이서가 맺은 암묵적인 협상이었다.
"나 연구중이야."
"......"
매번 이런 식이다. 이골이 날 때도, 서로에게 화를 낼 때도 됐는데 그런 적은 초기의 몇 번을 제외하곤 전무하다. 이미 말이 안 통할 것을 알기에 서로 직감적으로 맺은 암묵적인 룰은 서로의 말을 막지 않되 한 귀로 흘려내는 것이었다. 이어지는 침묵에 타임 트레이서가 이마를 찌푸린다. 가뜩이나 철야로 몸이 무거운데 뒤에 자기보다 큰 녀석이 매달려있으니 어지간히 불편했다. 웬만하면 놔주길 바랐지만 며칠 간 자신의 철야를 묵묵히 넘어간 에스퍼가 쉽사리 풀어줄 것 같지 않았다.
"...알았어."
"오늘밤은 자는 거야?"
"......응."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니 돌아오는 미소가 환하다. 아름답다, 그렇게 표현해야 할까; 타임은 잠시 머뭇거리며 바라보다 계속 올라가있는 입꼬리를 따라 미소짓고 말았다. 연필을 내려놓자 기다렸다는듯이 자신을 들어올려 욕실로 간다. 언제 준비했는지 따뜻한 김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욕실 앞에 내려주며 이마에 입을 맞춘 사내는 기다린다는 말과 함께 방으로 돌아갔다. 가끔 자신이 완전히 녹초가 되어 버리면 같이 씻기도 하는데 오늘은 그럴 마음이 없는 것 같았고 타임은 그런 그를 구태여 붙잡지 않았다.
옷을 벗고 입욕제를 푼 뒤 물에 들어가 첨벙거리자 거품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수면 위를 가득 채운 거품들을 보니 어릴 적 어머니와 함께 했던 목욕이 생각났다. 나소드 미니어처들을 갖고 놀고 싶었지만 물기에 녹이 슬까봐 고무로 만든 노란색 아기오리와 플라스틱으로 만든 작은 배를 갖고 놀았던 것 같다. 그 다음에 무엇을 했더라... 녹진하게 풀어지는 몸에 저절로 눈이 감겼다.
눈을 뜬 곳은 자신의 침대 위였다. 어째서 공간이 바뀌어 있는지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을 안은 채 고른 숨소리를 내는 존재는 그에게 있어 우상과도 같은 존재였다. 자신과 닮은 사람 중 유일하게 자신과 같은 목표를 가진 사람. 그 사람이 어째서 포기를 하고 어째서 무기력해졌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여전히 그는 자신에게 성공의 아이콘으로서 인식됐다. 동경, 우상, 존경. 그런 단어들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찌부둥한 몸을 뒤척이자 선잠을 자고 있던건지 굳게 감긴 눈이 뜨인다. 깨끗한 시야를 확보하기 위한 몇 차례의 깜박임이 있은 후 에스퍼는 타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배고파."
아이같은 칭얼거림에 핀잔대신 잔잔한 웃음소리가 화답한다. 나른한 하품과 기지개가 이어지고 부엌으로 향하는 두 개의 발울림이 울린다. 깔끔하게 정리된 부엌은 두 사람의 옷과 상반된 흰색이었다. 앞치마를 두른 채 재료를 꺼내 물에 씻어 도마에 얹는 소리가 체계적이다. 차가운 물이 야채에 닿아 튀는 소리가 청량감을 주고 달군 프라이팬의 기름 냄새와 냄비 속에서 보글보글 끓는 역동감이 식욕을 자극한다. 이내 식탁 위에 차려진 것은 담백한 카레볶음밥과 뜨끈한 달걀국이었다.
식사 시간만큼 이 집이 시끄러운 시간이 또 있을까. 잔잔하게 식기가 식기에 부딪히는 소리가 화음처럼 이어지다 마침표를 찍는다. 다시 한 번 청량감을 과시하는 싱크대가 새로운 화음을 만들고 아직 물기가 덜 마른 접시들이 클라이맥스를 알린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은 뒤 연주되던 음악은 잘 정돈된 부엌으로 결론을 맺었다.
"어땠어?"
"맛있었어."
자신의 요리를 묻는 에스퍼에게 타임은 기쁜 마음으로 화답했다. 비벼먹는 수고를 덜어준 것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두 사람은 사이좋게 이를 닦고 침대 위에서 잠을 청했다. 연구가 고됐는지 유난히 칭얼거리는 작은 꼬맹이를 다 큰 사내가 안고 도담인다. 달빛이 구름에 가려 시야를 어둡게 만들 즈음엔 두 사람 모두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
청천벽력같은 일은 반복되던 일상에 쪽지 하나가 배달되었을 때 발생했다. 여느 때처럼 철야로 책상 앞에 앉아 있어야 할 녀석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곱게 접은 작은 쪽지 하나가 깨끗해진 책상 위에서 버젓이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피어오르는 의문보단 몰아치는 불안감에 쪽지를 펴는 행동이 다소 거칠었다.
'갖다올게.'
종이 구겨지는 소리를 시작으로 플라스틱이 마찰하는 소리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던 자료들이 하나 둘 순서를 잃고 어지러이 책상 위에 내팽개쳐졌다. 손이 주인의 신경질을 이기지 못 하고 힘줄이 돋을 즈음 드디어 찾던 내용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차율 5% 이하'
멍해진다. 보라색 동공이 넓어지며 흰 자위가 타락한다. 어째서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인지 원망스러운 마음이 검은 자위를 스멀스멀 물들였다. 분노는 아니었다. 슬픔도 아니었다. 이미 검게 변해버린 두 눈동자에 뜬 그것은 서글픔에 더 가까운, 뼈저린 회의감이었다.
'내가 말했다면 달라졌을까.'
아주 오래 전 자신이 썼던 쪽지의 내용을 떠올리며 바닥에 주저앉는다. 힘이 풀린 다리는 더 이상 그를 지탱하지 못 했다.
남자가 움직인 것은 한참이 지난 뒤였다. 급한 발걸음은 아직 되돌릴 수 있단 희망에서 비롯된 것일까. 바닥에 떨어진 쪽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02 My name is Add
문을 열어 당도한 곳은 푸른 잔디밭이 있는 벌판이었다. 둥근 언덕과 나무 한 그루, 실루엣만 어렴풋이 보이는 저택은 자신이 알던 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이전에도 본 적이 있었으나 그것은 자신이 알던 것과는 다른 것. 이번에는 저번과 다르게 오차율을 40%정도 줄였다. 무언가는 다르겠지라는 작은 희망을 가지고 타임 트레이서는 저택으로 향했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왼편에서 빨래바구니를 든 하녀 한 명이 인사를 했다.
"도련님, 다녀오셨어요?"
"...."
하녀는 타임의 기분을 살피더니 이내 작은 미소를 띄우고는 문을 조금 열어둔 채 저택으로 들어갔다. 일단은 이질감 없이 들어왔다. 어디선가 자신과 똑 닮은 또 다른 자아가 나타날까봐 조마조마했으나 그렇게 되면 어떻게든 피한 뒤 돌아가면 될 터였다. 타임은 용기를 내어 손을 뻗었다. 기름칠이 잘 되어 있었는지 부드럽게 문이 열리고 익숙한 느낌의 저택 내부가 시야를 채웠다. 자신의 등장에 지나가던 남자 한 명이 허리를 숙여 인사하곤 어머니는 방에 계신다고 말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어떻게 잘 아는지 의심스러웠지만 저를 찾고 있었을 수도 있단 생각이 들어 의심을 거두었다. 그럼에도 긴장은 더욱 날을 세웠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심장박동이 점점 빨라졌다. 긴장된 얼굴이 방문 앞에 섰다. 하나. 둘. 셋.
이어진 것은 침묵이었다. 꿈에서도 희미했던 미소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머뭇거림과 걱정, 아슬아슬함이 근육을 수축시켰다. 자신을 향하는 미소가, 자신에게 뻗은 손이, 지는 석양의 빛을 타고 자신을 불렀다. 가까이 다가가 방바닥에 앉아 머리를 기댔다. 살짝 놀라는 듯한 움직임이었으나 이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손길이 자신이 기억하던 것과 정확히 일치했다.
"오늘은 어딜 갔다 왔니?"
"...숲...에..."
"숲에?"
"숲에 산책 다녀..왔어요."
빙그레. 타임은 일순 성공했단 희열에 휩싸였다. 얼마나 바라왔던가. 이 재회를, 이 분위기를, 자신의 집을, 그리고 어머니를. 소년은 여인의 무릎에 이마를 비비며 어리광을 부렸다. 간절하게 바라던 것이 이뤄진 것 같아 이곳에는 자신과 똑같은 녀석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심지어 만약 그런 녀석이 있다면 자신의 손으로 없애버리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소년은 그 정도로 기뻤다. 그리고 그 기쁨에 도취되어 여인이 짓고 있는 환한 미소를 보지 못 했다.
좋은 옷, 좋은 음식, 이어지는 평온한 햇살들. 이렇게까지 행복했던 적이 있었는지 소설 속 주인공은 더 이상 기억하지 못 했다. 어쩌면 그는 기억할 필요성을 못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기존에 입고 왔던 옷을 깨끗이 빨아 옷장 한 켠에 걸어두었다. 자신의 수족처럼 아끼던 기계는 자신에게 붙은 여러 하인들로 대체되어 방 안의 궤짝 안에 잠들게 되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고 바라던대로 이뤄졌다. 그럼에도 가슴 한 켠이 아픈 이유를 그는 알 수 없었다. 자신이 바라던 것은 모두 여기에 있는데 어째서.
"애드 도련님, 부인께서 찾으십니다."
오늘은 어디로 가자고 하실까? 벌써부터 신이 났다. 어머니는 매일 자신과 소풍을 가주셨고 잔디밭에서, 들에서, 숲 경계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독서를 하거나, 낮잠을 자거나, 게임을 하거나. 가끔은 어릴 때처럼 나소드 미니어처들을 갖고 놀기도 했고, 평평한 나무밑동이 있으면 그 위에 나무블록들로 탑을 쌓아 하나씩 빼는 놀이도 했다. 어떨 때는 예전에 만든 게임을 하기도 했다. 나무로 만든 보드 위에는 테두리로 경계 지은 여러 지역들을 만들어 이름을 붙였다. 그 땅을 사면 그 위에 공장이나 가게 등을 만들어 나소드 관련 물품들을 판매할 수 있고 자신의 말이 다른 플레이어의 땅에 서면 그곳에 건설된 건물들을 고려하여 측정된 값만큼 돈을 지불해야 했다. 물론 말은 나소드 미니어처들이었고, 자신은 오늘날의 나소드 정찰병과 비슷한 것을 가장 좋아했다.
하루 하루가 꿈같은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너무 즐거웠고, 소년은 자신이 원래 이곳에 살던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더 이상 자신이 다른 차원에서 넘어왔단 생각은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이 원래 입고 왔던 옷은 새로 채워진 고급스런 옷들에 묻혀 잊혀졌고, 자신이 만들어낸 수족은 전원이 꺼진 채 궤짝 안에서 먼지만 쌓여갔다. 왼쪽 눈에 새겨져 있던 보라색의 흉터는 천천히 그 색이 옅어졌다. 어머니는 그것을 보며 흉터가 지지 않아 다행이라며 안도의 미소를 지으셨다. 여전히 가슴 한 켠이 쓰라렸지만 소년은 그것이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던 지병이며 얼굴에 난 흉터가 사라지면 다 나을 것이라고 믿었다. 타 차원의 소년이 이 저택의 애드가 되는 순간이었다.
03 Into the cage
하루, 이틀, 사흘, 나흘...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마음은 타들어갔다. 어째서 오지 않는 걸까; 의문은 들었지만 이미 답은 알고 있었다. 과연, 돌아올 수 있을까?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거란 생각이 엄습하자 두려움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간절했다. 그리웠다. 그렇기에 더더욱 말렸어야 했다고, 역안의 사내는 속으로 쓰게 울었다.
집에 홀로 남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두껍게 먼지가 쌓인 자신의 방을 청소하는 것이었다. 물건이 많은 것은 아니었기에 자신은 자료들만 정리하고 대부분의 잡일은 다이너모로 해결했다. 그 때를 생각하면 1년이 지난 오늘의 방은 자신이 한창 연구를 하던 시절보다 더 복잡해져 있었다. 자료가 붙어있지 않은 벽이 없었으며 심지어 천장에 스크린을 연결하여 누워서도 연구를 계속했다. 그리하여 알게 된 지식들은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을 뒷받침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늘어났다. 옆 방에서 만들어지는 진한 색의 액체를 보며 얼굴이 밝아진다. 이것이라면 되돌릴 수 있지 않을까. 사내는 진득한 액체들이 담긴 유리관으로 둘러싸인 채 자신이 들어오길 기다리며 입을 벌리고 있는 캡슐을 보았다. 이 이상 늦으면 그 때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리라. 남자는 다이너모에 명령을 입력하고 캡슐 안에 누웠다. 자신의 무게를 감지한 기계가 뚜껑을 닫고 진한 색의 액체를 가득 채운다. 차오르는 수면을 느끼며 에스퍼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무표정한 얼굴과는 다르게 불끈 쥔 두 손에는 미약하게나마 희망이 담겨 있었다.
04 Beyond the waste land
어느 순간부터 가슴의 답답함이 가시질 않았다. 어머니도 하인들도 백방으로 약을 찾아봤지만 어떤 형태든 어떻게 만들어졌든 소용이 없었다. 자신의 한쪽 얼굴에 새겨진 흉터는 이미 그 색과 모양을 잃은 지 오래되었다. 그럼에도 자신을 괴롭히는 고통은 사라지기는 커녕 점점 거세졌다. 타오르는 듯한 느낌에 오늘밤도 심장을 부여잡았다. 아팠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심장이 약했던 자신은 항상 그곳의 고통을 호소했다고 했다. 약을 먹어도 효과가 없음에 이리저리 구해오던 약들도 더 이상 먹지 않았다.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것. 그것 외에는 딱히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아가, 내 아가...'
옆에서 같이 밤을 새주시던 어머니는 어느 날 부턴가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다. 여전히 재워주러 오셨지만 자신이 자는 척을 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셨다.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셔도 그저 조용히 웃으실 뿐 점점 무감각해지시는 것 같았다. 통증이 일상적으로 반복되서일까, 처음에는 관심을 가지고 걱정해주던 사람들이 하나, 둘 무덤덤해져 갔다. 애드는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저들도 지친 것이라고, 더 이상 해줄 것이 없어서 그러는 것이라고 자신을 위로했다. 언젠간 사라지겠지라며 마음을 추슬렀지만 섭섭함과 통증은 점점 더 커져갈 뿐이었다.
하룻밤은 가슴의 통증과는 다른 고통에 눈을 번쩍 떴다. 폐를 쥐어짜는 감각에 눈을 뜨니 자신과 비슷한 색의 자안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둘러진 손은 어째서인지 자신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부위에 감긴 채 그것을 옥죄고 있었다. 질식할 것 같은 느낌에 강하게 밀치니 올라타있던 상대가 풀썩 옆으로 쓰러진다.
"어......"
어째서. 어째서 사랑하는 엄마가 내 목을 조르고 있었을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매시간 느껴지던 가슴의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했다. 엄마는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고 있었는지 모른다는 표정으로 고른 숨소리를 내고 계셨다. 겁게 질려 품에 파고 들지도 못 하고 베개를 끌어안은 채 움츠러드니 자애롭게 자신을 감싸는 두 팔이 느껴졌다. 이것이 벌써 몇 번째인지, 세는 것을 포기한 지 오래였다. 안개처럼 다가오는 두려움에 애드는 내일 밤은 절대 자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새근새근. 깊게 잠든 것을 가장하여 이불을 목까지 덮고 베개로 얼굴의 반 이상을 가리고 있으니 조심스레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께서는 지속적으로 하인들을 해고하셨고 덕분에 저택에는 오래 전부터 이곳을 관리하던 집사와 집안일을 하는 메이드 두 명을 제외하곤 아무도 남지 않게 되었다. 하인들은 저택 옆에 붙어있는 별관에서 생활했기에 한밤중의 저택에는 주인 모자만이 존재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소리를 죽인 발소리가 카펫을 가로질러 그림자를 새겼다. 오늘은 올라타는 움직임이 없었다. 대신 침대 옆에 서서 한참동안 자신을 내려다보는 인기척만이 어둠을 증폭시켰다. 오늘은 가슴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특히 잠이 드는 것을 지켜보던 어머니가 나간 뒤로는 지병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는 듯이 아프지 않았다. 통각이 마비되었단 의심도 들었지만 깨물었을 때 손가락이 아픈 것을 보면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긴장감이 최대치를 찍는다. 드리워진 그림자의 모습이 변형되자 소년은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강한 힘을 발산했다. 바닥에 넘어진 존재는 품 안에서 꺼낸 것을 놓친 채 기절해버렸다. 달빛을 받아 반짝인 것은 만물을 꿰뚫을 수 있는 방주. 누군가에겐 구원의 손길이 될 수 있는 칼이었다.
*
숲의 밤은 차가웠다. 어둠은 공포를 불러일으키는데, 고요는 공포를 증폭시키는데 탁월한 효과가 있다. 차가운 바람이 척추를 훑고 지나간다. 있는 줄도 몰랐던 옷에는 주머니가 많았고 일부에는 비상식량도 들어있었는데 허기를 때울 정도는 되었다. 받은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정처없이 떠돌다 작은 연못에 닿았다. 목을 축이고 본 얼굴에는 예전의 흉터가 어렴풋이 나타나 있었으나 가슴의 통증은 없었다. 분명 기억에 없는 옷인데도 이질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애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쨍그랑'
옷에서 떨어진 물건이 돌과 부딪혀 맑은 소리를 냈다. 달빛을 받아 흑자색으로 반짝이는 그것이 익숙하여 자세히 들여다보니 스치는 것이 하나, 둘, 셋, 넷...
"타임... 트레이서."
그 외에도 부수적으로 떠오르는 것들이 늘어났다. 이 목걸이가 무엇인지, 어디에 있다가 여기로 왔는지, 무엇을 찾아 왔는지... 그러나 여전히 가장 중요한 것들은 안개 속에 있었다. 하나를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엮인 것 같은데 도무지 무엇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수면에 얼굴을 비춰본다. 조금 전보다 선명해진 흉터가 자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마치 숨겨져있던 것이 베일을 벗고 떠오르는 것처럼 그렇게 강해지고 있었다. 애드는 목걸이를 목에 걸었다. 그 순간 주머니에 들어있던 안대의 의미를 깨달음과 동시에 자신과 똑같은 눈을 가진 한 사람이 생각났다.
**
실마리가 풀리자마자 향한 곳은 저택이었다. 이미 동이 텄어야 할 시간인데 해는 뜰 생각이 없는 듯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자신의 역안처럼 까맣기만 했다. 기다리던 끝에 저택에 잠입하기로 결정한 타임은 잔뜩 긴장한 채 담장을 따라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작은 주인이 없어졌으니 야단법석이 났을 법도 한데 집안은 도망쳐나올 때보다 더 고요했다. 계단을 올라 종종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러 자신, 아니 애드의 방으로 잠입했다. 목적은 하나. 여느 때처럼 구석에 놓인 궤짝을 열어보았다. 먼지가 소복히 쌓인 그곳에는 있어야 할 것들이 없었다.
"다녀왔니?"
오싹. 급히 곁눈질로 벽에 새겨진 그림자를 살폈다. 꼿꼿하게 편 등과 앞으로 가지런히 모인 손의 위치는 평소와 같았으나 벽에 아로새겨진 손은 의문스런 무언가로 인해 그 형태가 왜곡되어 있었다. 퇴로를 물색하던 시선이 벽난로에 닿자 궁지에 몰린 두 발은 자연스레 그곳을 향했다.
"네."
평소처럼 웃으며 대답하는 목소리에는 그 어떤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으나 공기를 타고 흐르는 전류는 점점 증가하여 스파크가 터지기 직전이었다.
던져진 칼이 귀를 스친 것과 드러난 비밀통로 속으로 뛰어든 것은 동시였다. 젖 먹던 힘까지 모아 달렸다. 뒤에서는 그리워하던 웃음소리로는 믿어지지 않는 마녀의 즐거움이 메아리치며 숨통을 조였다. 우연히 발견한 다락으로 통하는 비밀통로를 질주해 마주한 것은 잠겨진 문. 달려오던 속도를 이용해 있는 힘껏 몸을 날리자 강한 통증과 함께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부식된 경첩이 뜯어졌다. 반동으로 튀어나간 몸은 또 다른 문에 부딪혔고 그 힘에 부서진 나무 옷장은 자신이 먹어치운 것들을 토해냈다. 그곳에 자신의 수족이 있었던 것이 우연일까, 타임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다이너모가 재회한 제 주인과 공명하며 남은 친구들의 위치를 알렸다. 방주를 든 여자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자신의 아들에게 다가갔다. 이미 제정신이 아닌 듯한 모습에 타임은 기가 질렸다. 앞뒤없이 칼을 휘두르기 바쁜 여자를 벽에 내리꽂다싶이 밀치고 지하실로 달려갔다. 오는 길에 마주친 하인들은 손에 잡히는 모든 물건을 타임에게 던졌다. 그들에게 주머니 속에 있던 드론을 던진 것은 재현을 위한 극적인 장치였으리라. 복도는 순식간에 불바다가 됐다. 지하실로 통하는 문을 부수자 긴 나선형 계단이 절망의 심연(abyss)을 재현한 듯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이 되어 아가리를 벌렸다.
'절망은 희망의 이면이다. 너의 희망이 강할수록 절망 또한 깊으며 희망이 겉에서 널 이끈다면 절망은 속에서부터 널 갉아먹는다.'
다음 말은 생각나지 않았다. 타임은 이 계단이 자신을 내면 속 절망으로 이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더욱 갈망했다. 이어지는 뒷말을 저 말을 한 사람으로부터 직접 듣고 싶었다. 갈망이 갈증으로 변하자 문이 나타났다. 방 안에 있는 작은 궤짝. 명령하지 않았음에도 자신의 수족이 뚜껑을 열었다. 먼지가 수북히 쌓인 채 진동하고 있는 다이너모가 보였다.
"내 아가, 어디 가니?"
어느새 쫓아온 어머니가 불길 속에서 미소짓고 있었다. 모든 것을 해결해주겠다는 듯 빛을 받아 일렁이는 칼날이 유혹적이었다. 타임은 환하게 웃었다.
"산책 가요."
"엄마랑 같이 갈까?"
자안이 곱게 휘었다. 곱게 휜 눈에서 흐른 맑은 액체가 불길을 머금어 타올랐다. 다음은 없었다. 대신, 이어진 폭발음이 대답을 대신할 뿐이었다.
눈을 뜬 곳은 칠흑같은 적막 속이었다. 모든 것이 꿈이었단 생각이 들었으나 드론을 던지기 직전 흘러내린 눈물자욱이 가설을 산산조각 냈다. 몽롱한 와중에도 자신이 돌아가야 할 곳을 생각하니 팔이 자연스레 움직인다. 다이너모는 제 주인의 의지를 읽은 듯 좌표를 설정했다.
***
누군가로 인해 깨끗할 거라 예상했던 방은 자신이 떠난 이후로 전혀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듯 먼지가 수북했다. 집 안 또한 조금 전까지 있었던 암흑 속 만큼이나 조용했다. 자신의 발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리는 이 상황이 마치 이 집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 같아 무서워졌다. 급히 거실로 나가 이곳저곳을 살폈다. 어느 곳이든 먼지가 쌓이지 않은 곳이 없었다. 딱 한 곳. 목표를 포기한 객체가 자의로 폐쇄한 공간 안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기계 소리가 들렸다. 익숙하다면 익숙할 소리에 안도하며 훔쳐보니 보이는 것은 6개의 기계뿐이었다. 굳게 닫힌 옆방에 시선이 멈춘다. 이 방은 원래 비어 있었다. 당연히 사람의 손을 타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여 넘겼는데 이제 보니 손잡이에 있어야 할 먼지가 안 보인다. 삐걱여야 할 문이 소리없이 열리며 숨겨온 광경을 상영한다. 옆방에서 난 큰 소리에 분주하던 6개의 주인 없는 다이너모들이 복도로 나온다. 주인이 어떤 소음을 내든 꽤 오랫동안 잠들어있던 6개의 다이너모들은 막 귀환한 주인의 방에서 나가지 않았다. 누군가가 있어야 할 방에는 구겨진 쪽지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05 No gain, no pain?
밤에 잠을 잔 마지막 날짜를 잊어버렸다. 달력을 보며 마지막 표시일을 찾으려 했지만 체크를 하지 않은 것인지 그 날이 너무 오래 전이라 달력 속에 파묻힌 것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어차피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기에 스크린 앞에 죽치고 앉아 있던 공학자는 부엌으로 향했다. 뭘 제대로 먹은 건 언제였더라. 그것마저 머리 속에서 다른 사소한 것들과 함께 잊혀진 듯 기억나지 않았다. 어거지로 음식이란 것을 밀어넣은 후 스크린 앞으로 돌아가라는 마음의 소리를 무시한 채 거실 소파에 누웠다. 감긴 눈에 초대한 적 없는 손님이 찾아온다. 다시 한 번 그날의 악몽을 반복하는지 미간에 주름이 잡힌다.
자신이 갇혔던 곳은 시공간의 크레바스였다. 알게 모르게 쌓인 부조리와 이상현상들로 생겨난 시공간의 균열들이 모여 태어난 생명체. 그것은 시공간을 이동하는 여행자를 자신 안에 가두고 그의 의식을 갉아먹어 생존한다고 적혀 있었다. 이런 것을 어떻게 알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에스퍼가 남겨놓은 자료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균열로부터 태어난 크레바스는 존제 자체가 불완전했기에 정상적인 것들은 할 수 없었으나 시공을 왜곡시키거나 무한히 반복하는 것 등에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더불어 자신의 의지와 지능이 있었기에 시공을 왜곡하여 여행자를 낚아채 먹이로 삼는 것은 그들의 주된 생존법이었다. 왜곡된 시공간에 갇히면 체감하는 시간에 변화가 생기는데 이것은 크레바스마다 다르다고 한다. 가령 타임 트레이서가 크레바스에서 보낸 시간은 2년 남짓. 돌아왔을 때는 4년이 흘러있었고 캡슐 안의 존재는 죽은듯이 창백하였다. 처음엔 죽은 줄 알았으나 숨은 붙어 있으되 의식불명 상태라는 것을 알았고 그것이 자신 때문이라는 걸 깨닫는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에스퍼의 다이너모는 그간 수집한 데이터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타임에게 보여주었다. 크레바스에 갇히고 처음 1년은 자신의 의식이 깍였다. 심장의 통증은 그 때문에 발생했다는 것이 타임의 결론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사라진 통증은 자신의 자각이 아닌 에스퍼의 의식이 대신 깍여나갔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에스퍼가 자신이 부재한 처음 2년을 투자해 만들어낸 약물 덕분이었고 돌아왔을 때 잠이 든 주인의 다이너모들이 분주했던 이유는 그 약물을 제조하고 깨끗하게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을 깨닫고 얼마나 울었는지 며칠 동안 시야를 확보하기 어려웠었다. 오래된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감에 점점 구겨지던 미간이 펴지고 말았다.
"...꿈인가..."
반복되는 꿈은 타임의 죄책감을 부추기는 촉매였다. 타임의 수면시간이 줄어든 이유에는 마음이 급한 것도 있었지만 반복되는 악몽이 끔찍해서도 있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킨 타임은 어느새 소년에서 청년으로 변해 있었다. 크레바스에 빠진 직후부터는 왜곡된 시간의 영향을 받아 돌아왔을 때의 나이는 2년이 흐른 19세. 2년이 더 지난 지금 그의 나이는 21세, 죽은듯이 잠에 빠져 있는 에스퍼와 동갑이 되었다. 어째서인지 캡슐 안의 그는 나이를 먹지 않는 것 같았다. 현실을 살지만 의식은 크레바스 안에 있어서일까, 시간의 영향을 받지 않는 듯 그의 육신에는 변화가 없었다.
타임은 연구실로 돌아와 스크린의 수치를 분석했다. 돌아온 뒤 2년동안 에스퍼의 의식을 되돌리는 것에만 몰두했고 어렵게 그가 쌓아놓은 지식과 새롭게 발견한 사실들을 통해 의식강화제를 제조할 수 있었다. 효과는 장담할 수 없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만큼 절박했기에 타임은 캡슐 안으로 자신의 연구성과를 주입하고 있었다. 관찰 7일째. 이 캡슐은 안에 있는 사람이 의식을 되찾으면 열리게 되어 있었다. 타임은 자신의 노력이 조금이라도 보상받기를 바랐고 그 보상은 향후 2년간의 노력을 더 지불받은 뒤에 지급되었다.
*
그릇을 쟁반 위에 놓는 움직임이 능숙하다. 몇 차례에 걸쳐 수정한 강화제로 캡슐이 열렸으나 기억은 오리무중이 되었다. 크레바스는 먹잇감의 기억도 갉아먹는지 몇 달 전 겨우 깨어난 에스퍼에겐 본능에 가까운 경계심을 제외한 그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왜 이렇게 됐는지, 자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나는 누구인지... 그 무엇도 기억하지 못 했으며 따라서 자신이 내민 손 또한 알아보지 못 했다.
의식을 찾은 처음 한 달은 전쟁을 방불케 하는 저항이 있었다. 음식조차 거부하여 강제로 영양제를 꽂길 수차례, 부질없는 저항임을 깨달은 건지 배고픔을 못 이긴 건지 잠긴 문 앞에 음식을 두면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뒤 몰래 가져다 먹기 시작한 것이 어언 2개월에 접어들었다. 연구를 끝내고 나오면 깨끗하게 비워진 식기들만이 문 앞에 있었고 그게 에스퍼와 맺은 새로운 암묵적인 룰이었다.
오늘도 여느 때와 같이 녀석의 식사를 담고 있는데 인기척이 느껴져 돌아보았다. 이 집에는 자신과 에스퍼 둘 밖에 없었기 때문에 누구의 것인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방 안에 있어야 할 존재가 흑자안을 깜빡이며 부엌 입구에 서 있었다. 쭈뼛거리는 모습이 꼭 긴장한 어린아이같아 웃음이 났으나 에스퍼가 놀랄까봐 타임은 빙그레 미소만 짓곤 쟁반 위에 있던 그릇을 식탁 위 자신의 그릇 맞은편에 놓았다. 의자에 앉았음에도 들어오지 않고 머뭇거리는 모습이 에스퍼다워 짧게 손짓하니 조심조심 다가온다. 타임의 먹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던 에스퍼는 이내 똑같은 자세로 밥을 먹기 시작했다. 예전처럼 두 사람의 식기 부딪히는 소리만이 종을 울렸고 타임은 오랜만에 듣는 이 음악이 반가웠다. 그릇을 비우자마자 황급히 방으로 도망가는 모습에 타임은 복도를 뛰어가 그의 손을 잡았다. 시선이 얽히자 진심어린 한 마디가 전해진다.
"나와줘서 고마워."
볼이 발그레 상기된다. 알아들은 것일까, 타임은 점점 붉어지는 에스퍼에게 미소지었다. 에스퍼의 당황한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풀이 죽어있거나 무표정한 얼굴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이런 표정도 있었구나. 타임은 새삼 드는 깨달음에 미소가 절로 나왔다. 급하게 닫히는 방문에 대고 청년이 외쳤다.
"내일도 같이 먹어줄 거지?"
**
별빛만이 세상을 비추는 캄캄한 밤, 열리는 문에 담긴 조심성이 들어오는 사람이 이방인이 아님을 알렸다. 자신의 침대 위에서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상체가 건강해보여 안심이 됐다. 처음으로 같이 밥을 먹은 이후 에스퍼의 경계심은 존재했었나 의심될 정도로 급격히 허물어졌다. 처음에는 밥만 먹고 획 들어가던 녀석이 자신이 준비하는 것을 지켜보고, 요리하는 것을 지켜보고, 설거지하는 것을 지켜보더니 이내 곧잘 도와주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거실에서 지내는 시간이 증가했으며 예전처럼 책상 뒤에 위치한 침대에 누워 자신을 지켜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것이 예전과 같아서 타임은 가끔 몰래 눈시울을 훔쳤다.
쓰다듬는 손길이 좋은지 고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지금의 에스퍼는 예전의 차분함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다시금 연구를 통해 시공간에는 여러 기억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덕분에 에스퍼의 기억 또한 찾아낼 수 있을거란 희망이 생겼다. 현재 에스퍼에게 의식강화제와 완성된 기억귀환제를 투여하고 있다. 미래의 어느 날에는 돌아오지 않을까. 막연하고 근거 없는 바람이었지만 자신의 소망이 이뤄질 거란 확신이 들어 미소가 피어올랐다. 무심코 쳐다본 창문은 달빛으로 환했다.
"만약 내가 네 말을 들었다면,"
청렴한 달빛이 타임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과거로 가지 않았다면 여전히 남아 있을 아쉬움과 포기해버렸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네가 예전과 같은 모습일까."
이제는 그보다 나이가 많아져버린 자신을 보며 타임은 씁쓸하게 웃었다. 달빛이 비친 에스퍼의 머리카락이 평화로웠다.
06 Just the way we are
이후의 시간은 잔잔한 시냇물처럼 평화로운 나날들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약의 효과는 좋았고 에스퍼는 예전의 건강한 모습을 되찾았다. 여전히 기억의 일부는 비어 있었지만 에스퍼가 누군지, 타임이 누군지, 차례대로 기억을 찾아가고 있었다. 특히 원래의 나이를 기억하고 나서부터는 곧잘 나오던 '타임 형'이라는 칭호가 쏘옥 사라졌다. 타임은 이제 자신이 나이가 더 많으니 형이라고 불러야 되는 거 아니냐고 항의했지만 한 번 동생은 영원한 동생이라며 무언항쟁을 펼치는 에스퍼를 이기진 못 했다. 이마저도 진담보단 농담에 가까운 것이었기에 세월이 흘러 이 논쟁이 진부해질 즈음엔 부러 서로 과장되게 행동하여 웃어넘기는 주제가 되어버렸다.
안경을 쓴 채 스크린을 뒤적이노라니 피로가 몰려왔다. 반짝이던 사각형들을 꺼버리고 다이너모를 물린 뒤 눈을 감고 있으려니 안경을 벗겨주는 다정함이 느껴졌다. 그 온기를 뺨에 대니 다른 손이 머리를 쓰담는 애정에 행복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저 이대로, 지금처럼."
작게 중얼거리고 눈을 뜬다. 자신과 닮은 사람 중 유일하게 같은 목표를 가졌던 자신의 우상이자 생명의 은인이 흑자안을 빛내며 미소짓고 있었다. 그 미소가 그리워하던 어머니의 것과 닮았다는 생각에 타임은 작게 웃어버렸다. 곱게 휜 흑자안이 궁금하다는 듯 반짝인다.
"무슨 생각했어?"
작게 '아무것도.'라 중얼거리니 의심하는 시선이 따라붙는다. 추궁하는 눈초리에 고개를 돌려 하늘을 본다. 오후의 햇살이, 에스퍼를 처음 만난 날처럼 포근하다. 째려보는 것에 지친 에스퍼가 짐짓 토라진 척 하며 거실로 들어갔다. 기분이 크게 상하진 않았겠지만 빨리 들어가서 달래주지 않으면 진짜 기분이 상할 것이다. 그럼에도 타임은 묵묵히 순간의 햇살을 만끽했다. 기분 좋은 생각에 잠겨 타임 트레이서는 에스퍼를 불렀다. 베란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내내 자신이 언제 들어올지 감시하던 흑자안이 황급히 감기는 것을 보며 타임은 쪼르르 다가가 팔짱을 꼈다.
"나 이름 바꿀까봐."
"...이유는?"
"트레이서가 더 이상 맞지 않는 것 같아서."
침묵에 타임으로 하겠다는 재잘거림이 이어지자 느릿한 끄덕임이 그 뒤를 채웠다. 더 캐물을 법도 한데 오후의 햇살이 졸음을 부른 것인지 위아래로 움직이던 얼굴은 이내 잠에 취해 평온한 정원처럼 정지했다. 타임은 잠든 이의 어깨에 기댄 채 함께 잠의 마력에 빠져들었다. 지금이라면 더 이상 떠돌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00. The known
오후의 정원에서는 티타임이 열리고 있었다. 차분하고 자애로운 백발의 여인은 소풍만큼이나 티타임을 좋아해서 집에 있는 날에는 소소한 다과와 홍차를 준비해 정원에서 즐기곤 하였다. 아기자기한 다기들에는 꽃무늬가 그려져 있었고 하얀색 찻잔에 부어진 붉은 홍차의 향이 후각을 자극했다. 고소한 아몬드쿠키와 달콤한 초코 머랭, 갓 구운 따끈한 스콘과 건포도 머핀이 먹음짐스러웠다. 그 중에서도 오늘의 주 메뉴는 홍차케익이었는데 달콤하면서도 쌉싸레한 맛이 일품이었다. 케익을 한 입 베어물며 그녀의 어린 아들이 물었다.
"내게 원하는 게 뭐지?"
"아가, 엄마한테 말투가 그게 뭐니?"
"네가 내 엄마가 아니란 건 알고 있어."
분명 겉모습은 모자가 맞는데 분위기는 철천지 원수를 대하는 것보다 싸늘했다. 차를 음미하던 여인의 눈이 가늘어지더니 이내 찻잔을 내려놓는다. 그러자 여인은 여자 아이로, 남자 아이는 소년으로 변했다.
"나를 알아챈 건 네가 처음이야."
"원하는 게 뭐야."
"단도직입적이네? 조금은 돌아가도 될 텐데."
매섭게 올라가는 눈꼬리에 소녀는 까르르 웃었다. 놀림받는 것보단 저를 장난감 취급하는 시선이 기분 나빴는지 소년의 얼굴이 무참히 구겨졌다.
"빨리 말해."
"나 지금 차 마시고 있는 거 안 보여?"
한껏 여유를 부리는 얼굴에 다이너모를 꽂아버리고 싶은 것을 소년은 간신히 참았다. 지금 아쉬운 것은 자신이지 눈 앞의 저 아이가 아니었다. 정보를 얻고 싶다면 인내심이 필요하다며 소년은 뼈에 참을 인을 새기기 시작했다. 한참이 지난 후에도 표정 변화가 전혀 없는 소년을 보며 여자 아이는 입을 뗐다.
"난 시공간의 균열로부터 태어났어. 부모도, 형제도 없지."
"널 뭐라고 부르지?"
"이름도 없어."
"시공간의 균열이면 왜곡같은 것도 할 수 있나?"
"내 존재의 이유가 바로 그거야. 시공간의 균열로부터 탄생한 시공간의 왜곡. 특이한 점이 있다면 자아가 있고 생각할 줄 안다는 것?"
"지능이 있단 거군."
"맞아. 이해력이 빠르네? 역시 내 안목은 알아줘야 해."
"그래서 용건은?"
"에이. 또 제자리걸음이네. 그것보단 좀 더 재밌는 걸 원한단 말야."
"재밌는 거라. 이 몸은 그게 뭔지 모르겠군. 그리고 단도직입적인 게 가장 확실하잖아? 아니면 숨기는 게 있는 건가?"
말로 회유하는 건 불가능하단 것을 깨달은 건지, 아니면 당돌한 존재에게 호기심이 생긴 건지 여자아이는 물끄러미 바라보다 박장대소했다. 아이는 한참을 웃어젖혔고 소년은 다시 한 번 참을 인을 새겨야 했다.
"음, 좋아. 난 이름이 갖고 싶어."
소년은 이 요구가 예상 밖이었는지 한참동안 차만 홀짝였다. 기대에 가득 찬 눈을 반짝이며 기다리니 이내 찻잔을 내린 손이 편한 자세를 취하며 물어왔다.
"이름을 지어주면 내가 얻는 것은 뭐지?"
"네가 원하는 것 하나를 들어줄게."
"두 개로 하지."
"그건 안 돼. 등가 교환에 어긋난다고? 하나를 더 들어준다면 모를까..."
이 제안을 생각해보겠다는 듯 찻잔이 다시 채워졌다. 쪼르르. 적당히 식어 마시기 좋은 홍차가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잔을 물들였다. 얼마 후 끄덕여진 고개는 암묵적인 합의를 표했다.
"크레바스."
"크레바스?"
"빙하가 갈라져서 생긴 좁고 깊은 틈이란 뜻이다. 보아하니 너로 인하여 이 부근의 시공간은 왜곡이 심한 것 같더군. 좁지만 깊게 여러 차원이 연결된 채 이곳의 시간은 느리게 가잖아. 마치,'
"덫 같지?"
시선이 부딪힌다. 얼핏 보기엔 어린 여동생과 오빠의 신경전으로 보였지만 금방이라도 불꽃이 튈 것 같은 눈빛은 더없는 살기를 품고 있었다. 천진난만한 목소리가 물었다.
"네가 원하는 것은 뭐야?"
"이곳을 나가게 해 줘. 그리고 설명해. 네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 어떻게 작동하는 건지. 너에 대해서 전부. 내가 이해할 수 있게."
"흠..., 독특한 요구네?"
크레바스란 이름을 얻은 아이는 고민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소년은 아이가 이미 자신의 제안이 마음에 들었음을 간파했다. 조바심이 났지만 남성의 사냥본능이 지금은 먹잇감이 스스로 미끼를 물 때까지 기다릴 때라고 귀띔했다.
"좋아. 다 설명해 줄게. 대신 너도 내 소원 하나 들어줘."
"뭐지?"
"어려운 건 아니고. 이거 마셔."
"...독약인가?'
"아니. 비밀을 지켜준다는 약."
"무슨 소리지?"
"지금부터 듣는 모든 이야기는 비밀에 붙여달란 소리야. 그리고 이를 어길 시 무시무시한 벌칙이 기다리고 있을 거고."
"그게 뭔데?"
"음, 그건 비밀. 궁금하면 발설하면 되잖아?"
아이는 어깨를 으쓱했다. 순수하게 활짝 웃는 표정이 의뭉스러웠으나 소년은 군말없이 병을 따 한 번에 비웠다. 어차피 자신의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물어본 것일 뿐 타인에게 알려줄 마음은 한 톨도 없었다. 한 방울도 남지 않은 유리병을 받으며 아이는 자신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생겼는지, 왜 생기는지, 어떻게 작동하는지, 뭘 먹고 사는지... 모든 이야기가 끝난 뒤 아이는 쿠키를 집어먹었다. 지금까지 들은 내용을 정리하는 표정이던 소년이 마시던 찻잔을 비우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는 그 모습을 보더니 왼편에 출구를 만들어주었다.
"명심해. 방금 들은 이야기 중 어떤 것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면 안 돼. 알았지?'
"유의하도록 하지."
"근데, 네 이름은 뭐야?"
"...디아볼릭 에스퍼."
"잘 가, 디아볼릭 에스퍼."
"...."
소년의 모습이 사라지자 입구는 스르륵 자취를 감췄다. 정원을 그려내던 공간이 진동하더니 이내 황무지로 변모했다. 티타임 테이블만이 그 자리에 남아 이곳이 조금 전까지 정원이었음을 알려주었지만 아이가 의자에서 일어남과 동시에 그것 또한 자취를 감추었다. 종종걸음으로 황무지 중앙으로 향한 아이는 수북하게 쌓인 마름모 모양의 보석들을 찬찬히 살폈다. 자색의 보석들은 누군가의 몸에 박혀 있던 것인지 피가 굳어있는 것들이 있었다.
"내가 명심하랬잖아. 들은 이야기 중 어떤 것이라도 발설하면 안 된다고."
아이는 보석 하나를 집어 피를 털어낸 뒤 입에 넣고 사탕처럼 빨아먹기 시작했다.
'절망은 희망의 이면이야. 둘은 같은 저울에 올려진 관념들이라서 희망이 강할수록 절망 또한 깊어. 그래서 희망을 보여주면 여지없이 걸려드는 게 필멸의 존재지. 희망이 겉에서 이끄는 지휘자라면 절망은 속에서부터 갉아먹는 좀벌레와도 같거든. 나는 그런 여행자들에게 그들이 간절히 바라는 희망을 보여줘. 시공간을 뛰어넘는다는 건 자멸하고 있다는 것과 똑같아. 그만큼 품은 소망이 절실하단 거겠지. 그러니까 내가 보여주는 환상에 여지없이 걸려들어. 그리고 자신이 성공했단 기쁨에 도취되어 빠져나가지 못해. 마치 거미줄에 걸린 나비 같달까?'
어느 정도 작아졌는지 입안에 넣고 우물거리는 소녀의 표정이 행복하다. 사탕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배부르단 듯이 소녀는 만족스런 표정으로 배를 쓰다듬었다.
'물론 이곳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빠져나갈 수 있어. 내가 만들어내는 것은 환상.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부술 수 있지만 도취된다면 빠져나갈 수 없는 늪과도 같아. 발버둥칠수록 더 깊게 빠질 뿐 절대 벗어날 수 없어. 자신이 가지고 있던 환상의 밑바닥까지 긁어내어 잘라낸다면, 글쎄. 그 전에, 그게 가능하려나?'
몰려오는 노곤함에 아이가 하품을 한다. 시공간의 왜곡된 틈은 하릴없단 표정을 지으며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자의 여유를 뽐냈다.
"절대 발설 안 할 것처럼 굴더니 결국 다른 녀석들과 똑같았어. 아, 옆에 있던 녀석도 시공간 여행자란 건 변수였지만. 누가 알았겠어? 그 녀석이 의식강화제니 기억귀환제니, 이상한 약들을 만들어서 디아볼릭 에스퍼를 계속 되살려낼 지를."
키들거리며 보석을 고르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이번에는 목걸이로 쓰이던 것인지 긴 줄이 달려 있었다.
"그래도 그건 좀 의외였어. 옆에 있던 녀석이 죽고 디아볼릭 에스퍼가 그를 처음 만난 시점으로 되돌아갈 줄은... 덕분에 굶주릴 걱정없이 평생 먹을 양식을 쌓을 수 있었으니 나에겐 잘 된 일이지만."
까르르 웃는 웃음소리에는 순수한 기쁨이 가득 담겨 있었다. 땅에 무언가를 써내려간 아이는 나뭇가지를 내려놓고 일어섰다. 그 글자를 읊으며 아이는 잠을 청했다.
"잘 먹겠습니다."
?? The Archive - someone's rec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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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vasse(크레바스) : 시공간의 균열이 모여 생성된 부조리의 집합체에 의식이 생기고 자아가 덧입혀진 뒤 이름이 붙으면서 생겨난 인격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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