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소드(Elsword)

[애드팸] 거울상2

월하(月河) 2016. 6. 25. 02:30
Day4 ~ 소문을 타고

"사트 뭐해?"
"훈련."

역시나 그 형에 그 동생이다. 형이 더 능글맞긴 하지만 훈련 중엔 둘 다 단호박이다.

"오늘 아침에 재밌는 걸 봐서...혹시 네 형이랑 마마형이랑 사겨?"

들던 역기를 놓칠 뻔 했다.

"ㅁ...뭐? 형이?"
"요즘 계속 붙어다니잖아. 마마형이 연구자료 같은 거 들고 루사형 방으로도 들어가던 걸? 나올 땐 콧노래까지 부르던데?"
"헤? 마마형이?"

역기를 들다가 마마형을 죽이면 죽였지 사귄다고?

"아트는 알아?"
"마마형을 그대로 빼다 박은 아트님이 아시면 그 자리에서 코코아를 뿜을 걸?"
 

"크핫!"
"내 말이 맞지?"

뜨거운 코코아를 어쩌지 못하고 캑캑거리는 아트를 두고 두 트레이서는 이 사건을 그대로 조망하기로 했다.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건진 모르겠으나 전말보단 결말이 더 궁금했다. 아트만이 시체라도 본마냥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Day5 ~ 여름에

볕 좋은 여름날이다. 아지트 옥상의 습한 바람과 작열하는 햇빛에 오후가 하품한다. 늘어지게 자고 싶다.

"형, 여기서 뭐해? 한참 찾았잖아."
"무슨 일이지?"

못 들을거라도 들은 표정이 됐다.

"형, 요즘 너무 마마형 같아."
"그래?"
"밥 먹고 바로 방에 가는 것도 그렇고, 방에만 처박혀있는 것도 그렇고, 옥상에 혼자 있는 것도 그렇고, 둘이 몸만 바뀐 거 같아."
"......그래서 용건은?"
"지금처럼 용건만 따지는 것도 그렇고."
"할 말 없음 내려가지?"
"혹시 바다 갈래? 애들이랑 형들이랑 다같이 가기로 했는데 형만 못 찾아서..."
"마마도 가나?"
"...응..."
"언제 출발하지?"
"2시간 후."
"바쁘군."

걸음걸이, 옷차림, 성격까지 전부 마마를 닮아가는 루사를 보며 사트는 속으로 한숨을 내셨다. 아트 성격이 왜 그런지 이해가 된다.

 

"아트 안에 있어?"

대답도 하기 전에 문부터 열고 들어오는 들뜬 모습에 아트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연구해야 한다고, 같이 가자고 할 땐 내내 거절하더니 사트가 물으니까 바로 수락한다. 속 좁아보이긴 싫어 내색은 안 했지만 섭섭한 마음만은 어쩔 수 없었다.

"아직이네?"

가방까지 들고 와선 완성도 120%의 피서지 코스프레를 선보인다.

"...내가 가잘 때는 콧방귀도 안 뀌더니..."

작게 중얼거렸는데 그걸 들었나보다.

"아트, 삐졌어?"

사랑에 빠진 형의 모습은 이런건가? 아직도 받아들이지 못한 열애설에 점점 루사를 닮아가는 마마가 버거웠다. 그러나 생전 없던 애교를 부린다거나 장난을 치는 게 싫지만은 않았다.

"다음 번엔 나랑만 가자."
"...그래."

대답이 늦다. 입을 비죽 내민 채 툴툴거리니 형이 더 꼬옥 안아준다.

"내가 어떻게든 가줄테니까 화내지 마. 응?"
"형! 남자끼리 이러지 마!"
"남자 이전에 내 사랑하는 동생이다만?"

이건 루사형이 사트가 삐졌을 때 하는 건데... 사트는 엄청 싫어하는 것 같지만 난......싫지만은 않다.

"거짓말 한 거면 다신 안 볼 거야."

그래, 그래. 라며 어떻게든 가겠다고 하니 마음이 좀 풀어진다. 거짓말이라고 해도, 기분은 좋다.

"근데...짐마저 싸게 좀 놔주면 안 될까?"




"바다다-!"

그 형에 그 동생이다. 저 새파란 끝도 안 보이는 망망대해가 뭐가 좋다고 저러는지 모르겠다. 물론, 이건 나와 루사만, 정확하겐 나만 아는 사실일 거다. 다른 이들 눈엔 정반대로 생긴 청소년과 어른 한 명이 바다를 보고 신났다 정도로 보이겠지.

"형이 저렇게 바다를 좋아했구나."

옆에서 멍해진 아트가 짧은 감상을 읊었다.

"바다가 싫어서 거절한 게 아니구나..."
"그건 아닐거다."
"응?"
"바다가 싫어서일 거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바다가 아니라 물을 싫어하거든. 물가, 바닷가, 냇가, 종류 상관없이 싫어할 거다."
"루사형은 마마형 어린시절을 알아요?"
"......안다기 보단 짐작가는 게 있을 뿐이야."

너무 단정적으로 말했나. 그렇게 의심하는 눈으로 보면 내가 미안하잖아. 뭐라고 해명이라도 해야 할 거 같아 말을 고르는데 저멀리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린다.

"아트-, 바다 보고 싶다며-, 왜 거기 서 있어-?"
"가-!"
"기회는 왔을 때 잡아야지-!"

튜브를 끼고 잘도 논다. 내 얼굴로 저런 표정도 지을 수 있던가. 참으로 해맑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 봐. 저 말은 맞는 말이니까."

우두커니 앉아 하늘과 이어진 망망대해를 본다. 그 날도 이런 날이었다. 더없이 해 맑고 밝은 날이었다.

"난 신경쓰지 말고. 가서 형이랑 놀아."

뭐가 찜찜한건지 한참을 내 얼굴만 들여다보던 아트는 말없이 튜브를 들고 바다로 돌진했다. 사트, 아트, 타트, 마마가 된 루사 그리고 반강제로 입수당한 디에까지. 다섯 사람이 노는 걸 보며 잠시 과거로 생각의 좌표를 설정했다.




"우와--, 바-다-다-!"
"우리 아들 좋아?"
"응응! 좋아. 바다 넓어! 완전 커!"

처음 본 바다는 눈이 부셨다. 탁하면서 짙푸른 푸름이 연한 하늘과 이어져 바다와 하늘이 같은 곳은 아닐까란 생각을 했었다. 빛은 다소 바랬지만 그 말을 듣고 웃으셨던 어머니가 여전히 선명하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다로 들어간 나는 파도를 타고 제법 멀리까지 나갔다. 집체만한 파도가 몰려온 건 그 때였다.

"꺄아악!"

누구의 목소린지 분간할 수 없는 비명이 모래를 요동치게 하고 난 그대로 파도 밑으로 가라앉았다. 몸에 끼고 있던 튜브는 어디로 갔는지 잡히지 않았다. 이대로 물 속에서 죽는구나 싶을 때 누군가가 내 팔을 잡아당겼고 난 의식을 잃었다.

"ㅁ...마마야, 정신이 드니?"

눈을 뜬 이후의 일은 기억하기 싫을 만큼 끔찍했다. 날 때부터 체온이 낮았던 어머니는 내가 올라오지 않자 만삭의 몸으로 바다에 뛰어들었고 간신히 날 데려오는데 성공했지만 그대로 임시보건소에서 쓰러지셨다. 직원들이 응급처치를 했으나 이미 새파랗다 못해 보랏빛으로 물든 입술은 다시 생기를 띠지 못했다. 아버지는 병윈에서 눈을 뜨자마자 엄마부터 찾던 아들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주시곤 어디론가 가셨다. 기력을 회복하고 처음 본 어머니의 웃는 얼굴은 사진 속에 담겨 그 날의 하늘처럼 선명하게 빛났다. 그리고 나와 닮은, 그러나 어머니를 생각나게 하는 외모의 아주 작은 갓난쟁이를 만났다.

"이 아이는 아크 트레이서, 네 동생이다."

그게 내 어머니와의 마지막 만남이자 동생과의 첫 만남이었다.




"앗 차거!"

홀딱 젖자 좌표가 원점으로 돌아온다. 짠내가 코를 찌르고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간간히 비웃음 같은 놀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다 한순간 조용해진다. 다른 형태의 짠내가 코를 찌른다.

"......루사, 울어?"

내가...울고 있는 건가...? 고개를 숙인채  헛웃음을 삼키는데 일부가 그만 새나가고 말았다.

"루사 옆엔 내가 있을게."

모래 쓸리는 소리가 처참할 정도로 날카롭게 심장에 박힌다. 어머니도 이랬을까? 내가 파도에 삼켜져 나오지 않을 때, 어머니도 파도 치는 소리가 심장에 박혔을까?

"마마."
"...시...끄러."

주는 호의마저 뿌리칠 정도로 아팠다. 말없이 어깨를 내어주는 온기에 악문 잇사이로 신음이 새어나가 귓 속 모래를 긁는다. 그래. 난 아팠었고, 아팠고, 아프다.

내 흐느낌이 계속 되는 동안 사람의 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우리 외엔 사람 하나 없던 해변은 이질적인 존재는 나 하나뿐인 양 파도치는 소리, 바람 부는 소리, 간헐적인 갈매기 울음소리만이 가득했다.

"괜찮나?
"...흐끅..."
"가끔은, 울어버리는 게 낫지."
"...잘난..흐끅...하지 마."
"핀잔 주는 걸 보니 돌아왔군."

어깨가 푹 젖었다. 그럼에도 불평 한 마디 없이 옆에 있어줬다.

"...왜 말 안 했어? 우는 거 싫어하잖아."
"이럴 땐 고맙다고 하는 거다."
"...미안해."
"미안하면 애들이랑 나랑 바다서 놀자."
"그건......."
"아, 이것도 못 해주냐?"

짐짓 못 말린단 얼굴로 으름장을 놓는다. 그게 루사 같아서 난 웃어버렸다. 그제야 고요하던 해변가에 안도의 숨소리가 들리고 루사의 얼굴에도 웃음이 피었다.

그 날, 난 16년만에 바다에서 재밌는 시간을 보냈다.





 난 우는 것을 싫어한다. 남이 우는 것도 싫지만 내가 우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마마가 그렇게 서럽게 울었을 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여전히 귓가에 쟁쟁한 내 울음소리에 난 자연스레 기억하고 말았다. 오래전에 삭제한, 정확하겐, 삭제하려고 부단히 노력한 기억이...

"엄마...엄마, 가지 마..."


아버지는, 그 사람은 전혀 좋은 사람이 못 됐다. 어릴 적 나는 힘 없는 나약한 어린아이일 뿐 아버지에게 학대 당하는 어머니를 구할 힘따위 없었다. 그러나 의지만은 있었기에 하루는,

"엄마 때리지 마요!"

그 후론 나도 같이 맞았다. 덕분에 엄마를 보호하는 데 거리낌이 없어졌지만 번번히 내 몫의 폭력 또한 어머니가 감당해야 했다. 어머니의 등은 피멍과 상처로 검붉게 아로새겨졌다. 마치 원래 피부색이 그러하듯이.

"...앞으론 끼어들지 말고 숨어 있어."

아버지가 던진 화병의 파편에 맞아 찢기고 부어오른 상처를 보며 어머니가 하신 말씀은 그러했다. 숨어있으라고. 눈에 띄지 말라고.

"어린 놈의 자식이 벌써부터 외박이야!"

오늘도 술을 먹고 들어온 아버지가 난동을 부리고 어머니의 송곳같은 비명이 귀를 찌르다, 돌연 잠잠해졌다. 아버지가 갔을 새벽 난 걸어잠근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어머니는 마룻바닥에 엎드려 계셨다.

"엄마, 일어나 봐. 약 발라야 돼."

어머니의 팔이 마룻바닥만큼 차갑다. 바닥에 흥건한 피가 푸르게 변색될 동안 난 어머니가 시킨 대로 숨어 있었다. 눈에 띄지 않게. 흐르는 눈물이 마룻바닥에서 차게 식는 걸 보며 다짐했다. 그 새벽이 내가 운 처음이자 마지막 날이 될 거라고.

"여보세요?"

동이 트자 경찰에 전화했다. 여기 사체가 있으니 장례 좀 치뤄달라고. 그것이 내가 막을 수도 있었던 비극의 주인공에게 발라준 마지막 약이었다.




탁.

손가락끼리 부딪히는 마찰음에 고개를 든다. 나, 아니 마마가 서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해?"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거짓말 하지 말랬지?"

마마는 그 날 바닷가에서 내 어깨에 다 쏟아버린 후 괜찮아졌나보다. 덕분에 난 슬럼프에 빠졌지만.

"가끔은 울어버리는 게 낫지."

저 녀석, 기억하고 있었나?

옆에 턱 앉아 자기 어깨를 탁탁 두드리는 폼이 선심쓰는 것 같다. 내 얼굴로 그런 표정 짓지 말라고.

"미안하지만 난 마스터마인드라고. 얼굴만 너란 걸 기억해주면 좋겠군."
"...내 얼굴로 울어놓고 잘도 말한다."
"내 얼굴로 튜브 끼고 잘도 놀더군. 여하튼,"
"여하튼?"

얼굴이 새빨개져선 우물거리는 표정으로 머뭇거린다. 고맙단 말이 그렇게 힘드냐... 아주 작게 '고마워.' 한 마디를 더듬거리더니 이내 귀까지 푹 익어버린 마마가 벌떡 일어났다.

"어깨 필요없으면 가..간다!!"

어딜 도망가!

"야, 이건 좀!?"
"난 어깨보다 등이 좋다-."
"어이 잠..잠깐만! 지금은 내 등이다만?"
"원래는 내 등이었다. 내 등이 이렇게 포근하구나. 그래서 네가 맨날 내 등에 기대 데이터를 본 거군?"
"......"
"몸 바뀌기 전에 나도 만끽해야겠다-."

난 농담으로 던진 말인데 어깨 너머로 당황한 얼굴이 보인다. 그게 마마 같아서, 안심이 됐다.

"...뭐라고 했어?"

다행이라고. 괜찮은 거 같아서.




Day6 ~ 전야제

이상하다. 보통 서너시간이면 더 이상 몬스터가 보이지 않는데 올해는 어디선가 끈임없이 나온다.

"다이너모 히트 디텍팅(heat detecting)"

1km 전방에 엄청난 열기가 감지됐다. 만에 하나 마계의 포털이 열린 것이라면 저곳이 근원지리라.

"1km 전방에 고에너지가 감지됐어."
"진원지는 그곳인가?"
"가보면 알겠지."

왼쪽에서 튀어나온 머쉬룸앤트를 썰어버리면서 루사가 씹어뱉었다. 자꾸 튀어나오는 몬스터들이 어지간히 거슬리나 보다. 앞에선 잡몬들이 잔뜩 몰려온다.

"나한테 맞겨. 다이너모 구성모드!"
 
사이드에서 써도 되지만 몬스터들의 중심에서라면 그 효과는 몇십배로 증폭된다.

"사이오닉 제너레이터!"

몬스터들의 유혈을 흩뿌리며 붉게 물든 길을 나아간다. 100m 안으로 들어온 근원지. 저곳만 격파하면 우승은 우리 것이다.




준비는 끝났다.
루사의 몸이 된지도 약 1년이 되간다. 우리의 역할 바꾸기는 얼마 지속되지 않았다. 바뀐 상태가 오래 지속되자 우린 어쩌면 이대로 평생 살아야 할 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고 서로의 몸을 서로의 스타일대로 어느정도까진 개조하기로 합의했다.

"루..아직도 운동 중이야?"
"원래 마지막에 적당히 해주는 게 좋아. 더구나 넌 근육이 전혀 없다고."
"설마 나도 너처럼 우락부락해지는 거냐?"
"그럴려고 해도 불가능 해. 근육이 만들어지지 않는 체질이야. 속근육만 키우고 있으니 걱정마."
"그게 좋은...거라고 해두지."
"나가자."

땀에 젖은 내 얼굴이 낯설다. 다이너모는 겉모습을 바꾸어 서로의 것을 쓰고 있다. 루사의 것은 투박하지만 확실히 강한 맛이 있었고, 내 다이너모는 유려해서 자유자재로 변환이 가능하다. 내가 루사 걸 쓰는 건 어렵진 않지만 재미가 없었고, 루사는 내 것이 지나치게 복잡하다고 했다. 그래서 두달 반 정도 이어진 서로의 연구를 대신해주는 것은 종료됐다. 대신 식사시간에 철야를 선언하고 방문을 걸어잠근 뒤 몰래 서로의 방에 잠입하여 연구를 계속했다.

"올해는 2인조인가?"
"응."
"그나마 다행이군."
"그렇지."

내일은 우리들이 좋아하는 날이다. 우리들은 1년에 두 번 모든 연구실을 비운다. 한 번은 여름으로 휴식을 위해서고, 다른 한 번은 가을과 겨울의 중간으로 서로의 연구성과를 겨루기 위한 시합이 이뤄진다.

'삐비비빅 삐비비빅'

다들 준비된 모양이다.

"푹 젖었군. 오늘같은 날은 사랑 좀 안 하면 안 되냐?"

디에의 비아냥같은 놀림에 폭소한 사트와 못 말린다는 얼굴의 타트와 불편한 기색의 아트가 보인다. 아트야, 그리 보지 마라...

"아트, 형을 그렇게 노려보면 쓰냐-!"
"크학!"

미안하다. 형이 지켜주고 싶다만 지금은 끼기가 애매하구나.

"이제 그만 시작하지."

우린 총 3팀으로 나뉘어 출발했다. 나와 루사, 사트와 타트, 디에와 아트였다. 디에가 왜 아트랑 붙은 건진 알 수 없으나 수확이 있으니 저럴거란 생각이 든다만...찜찜하다.

'까악 까악 까악'

나소드 까마귀가 시합의 시작을 알렸다.

"자, 어디 한 번 가볼까?"

사냥 개시다!




뭐 이런 미친 괴물이 있나!

살다살다 저런 건 처음 보겠다. 사냥이 시작된 직후 먼저 가라던 디에 형은 어딜 갔는지 안 보인다. 결론적으론,

나 혼자 미친 사람처럼 싸우고 있단 거다!

"드론 액티베이터. 러싱드론."

단거리 공격은 거의 불가능한 저것의 형태를 뭐라 해야 하나. 삼 층으로 이뤄진 탑 같은 형탠데 층별로 플랜트 오버로드처럼 촉수가 있고 촉수 밑엔 길고 짧은 가시들이 진동하고 있다. 층의 회전방향은 서로 반대이며 빙글빙글 돌면서 촉수가 미친듯이 주변 물건을 집어삼킨다.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무참히 부서지고 융해되고 흡수되었다.

마족 중에 저런 것도 있던가?

새로운 샘플이 나타난 건 좋다만 혼자서 상대하긴 벅차다. 팬저버스터까진 앞으로 15초 그동안 드론으로 어떻게든...

"젠장!"

1층 가시에 걸리고 말았다. 정확하겐 여러개로 나뉘어있던 가시들이 길고 두꺼운 하나의 가시로 변해 내 발목을 관통했다. 촉수들을 피하느라 눈치채지 못 했다. 통증도 통증이지만 움직임이 봉쇄돼 날아오는 촉수를 피하지 못 하는 게 더 큰 문제다.

"이렇게...끝낼 수는..."
"팬저버스터!"

디에형인가. 촉수가 몸을 휘감아 목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뜨겁다. 피부가 녹아내리는, 산을 뒤집어 쓴 듯한 느낌.

"아트! 정신차려!"
"마마 위험해-!"
".........루사-!"




정신을 차리니 회색빛 공간에 누워있었다. 불한증막처럼 덥다. 아니 그냥 불 속에 앉아 있다가 맞으려나.

여기가 어딘지 알아보려고 했으나 음울한 회색만이 시야를 매꿨다.

"들어왔군. 마마는 아직인가?"
"...디..에..."
"그래. 생각보다 오래 버텨서 놀랐다. 뜨겁나?"

난 대답하지 않았다. 당연한 걸 왜 묻는 거냐.

"좀만 참아. 곧 끝날테니."
"언...제?"
"5분 안에."

다른 애들은 어떻게 된 거지? 사트는? 타트는? 개들도 당했나? 마지막에 달려온 사람들은 누구지?

"궁금한 게 많겠군. 열기가 아닌 열기 너머의 것을 느껴라. 뭐가 있지?"

온 감각을 집중했다. 뜨거운 온기 너머로 생명력이 느껴졌다. 새들과 금속의 매끄러움, 숨 쉬는 나무들. 이상하다. 분명 몬스터가 다 부셨을 텐데? 잠깐. 이런 거 어디서 본 적 있다.

"크큭, 크크큭!"

플랜트 타워 에너지 뱅크.

"루사, 네가 제일 빨리 당했다."

원령들이 뭉쳐 만들어진 살아 움직이는 생명력의 원천. 요절한 자들이 깃들어 주변의 모든 생명을 빼앗는 악의의 결정체.

"우리 츤데레 공주님은 언제까지 버티실지 볼까?"

시야가 맑아진다. 흐릿하던 것이 형체를 찾는다. 여전히 몸은 굳어 있었지만 간신히 고개는 돌릴 수 있었다.
 무기력한 사트와 타트가 보였다. 사트는 늘어진 채 위를 보고 있었고 손을 쥐락펴락 하는 타트의 일그러진 옆얼굴이 보였다.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피투성이인 루사형이 보인다.

"오-."
 
디에형의 탄성과 함께 공간이 흔들렸다. 흔들리는 찰나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몸을 내리누르는 압력은 이 괴물이 만들어낸 것인가?

"크윽...네 녀석!!"
"사랑싸움은 단둘이 하라니까."
"디에. 이게 무슨 짓이지?"
"그래도 날 알아차리는 건 마마 뿐이군. 그 능력은 인정해주지. 그러나 루사 위에 있으면 매력지수가 반감된다고."
"너!"
"힘빼지 마라."

하고 많은 데 중에 왜 루사 형 위로 떨어진 거야!
형! 진짜 사귀는 거야?

"후후후 실험 개시다!"

주변이 하얘졌다.




Day7~  Happy Halloween

눈을 떠보니 방 안이었다. 몸을 일으킬랬으나 온몸이 짓눌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햇살이 내리비치는 오후인가. 아트랑 타트는 어떻게 됐을까? 사냥을 하다가 디에 형이 재밌는 몬스터가 있다고 꼬드겼고 따라갔다가 당했다. 그 몬스터는 충분히 강했다. 이전까지 본 적 없는 독특한 형태의 에너지 코어. 내 육체에 저 기술을 접목한다면 난 형보다 강해질 수 있을까? 더 생각하고 싶지만 내리누르는 눈꺼풀이 무겁다. 조금만...더 자고 생각하자...

형이, 루사형이 형을 안았다. 진짜 사귀는 걸까? 어둠 속을 헤매면서도 여전히 두 사람의 관계가 궁금했다. 어째서. 어째서? 부유물처럼 암흑을 떠다닌다. 이 어두운 곳을 나가면 꼭 물어보겠어.



"역시 일어나 있었군."
"하나 물어보지."
"대답은 바라지 마."
"넌 알고 있었나? 우리가 바뀐 것."
"크훕!"
"비웃지 마라. 입 찢어질라."
"공주님이 그런 저렴한 단어를 쓰면 안 되지."
"공주님이라고 하지 마!! 목적이 뭐냐?"
"흠, 글쎄? 색다른 할로윈?"
"장난치지 마!"
"왜 네 마음대로 장난이라 규정하지? 난 충분히 진지한데?"

방 안이 사악한 웃음소리로 물들고 유일한 목격자의 얼굴이 소리에 따라 검게 물들어갔다. 살기는 보랏빛을 띄며 짙어져갔다.

"걱정 마라. 애들은 다 깨어날 거야. 요즘 다들 철야길래 수면시간을 확보해주려던 것 뿐이라고. 그리고,"

방문을 열며 디에가 상큼하게 말했다.

"이럴 땐 고맙다고 하는 거야 공주님."


"젠장."

방문이 닫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루사가 깨어났다. 다크서클이 턱 밑까지 내려올 기세였으나 내가 더 심했나보다.

"이럴 때라도 쉬면 안 되냐?"
"시끄러."
"합법적으로 자게 해준 거라잖아?"
"듣고 있었어? 근데 왜 가만히 있었어?"
"말해 무엇하나. 한 두 번도 아니고."

디에는 악명 높았다. 이곳에서는 침대 하나만 딸랑 있는 작은 방만을 쓰며 그의 실험실을 본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몇 일씩 행방불명 됐다가 가끔씩 이곳에 오곤 했다. 여름과 몇일 전 있었던 전야제. 그 때가 아닌 다른 시기에 그가 아침을 먹으러 온다거나 건물 어딘가에 앉아 있다던가 한다면 그것은 기막힌 악운이었다. 왜냐하면 걸리는 사람은 그의 실험대상처럼 되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다들 예전보다 강해졌고 그가 지키는 길목을 알기에 피해다니지만 그는 막내인 애드를 7일 만에 안대를 찬 소년으로 만들어왔다. 새 이름을 원한 그를 우리는 타임 트레이서, 타트라고 불렀다.

"한동안 조용하더니 우리 모두를 실험대상으로 쓸 줄이야. 이래서 맹수가 조용하면 더 경계해야 하는 건데..."

손이 내 손을 잡았다. 온기가 느껴졌다.

"그 때 왜 나 대신 맞은 거지?"
"네가 먼저 가면 디에가 널 약한 공주님이라 했을 테니까."
"그건 살았으니 하는 말이고. 죽을 수도 있었어. 왜 그랬어?"

더 다그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가 꽉 껴안는 바람에 사고가 마비됐다. 버둥거렸으나 이 상태에서도 루사는 나보다 셌다. 근육돼지.

"고마워."
"밑도 끝도 없군."
"살아줘서."
"......나도."

안겨 있어서 못 보는 너의 얼굴엔 미소가 피었을까?

"근데 뭐 이상한 거 못 느끼나?"
"음?"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웃는 거 같으면서 우는 듯한 표정이 됐다.

"디에가 고마워하라더군."

루사는 작게 뇌까렸다.

미친놈.




"허리가 쑤셔...아트, 파스 좀 붙여쥐."
"밥 먹고 하면 안 되냐."
"아앙~ 지금 해 줘~ 아프단 말야~"

아침부터 우는 소리를 하는 사트에게 꿀밤을 먹이고 싶었지만 저를 어미 잃은 새끼 짐승처럼 올려보는 얼굴에 아트는 한숨만 내셨다.

'달칵'

샐러드를 한 두 입 먹더니 포크를 그대로 싱크대에 투척한다. 먹던 샐러드를 랩으로 싸곤 냉장고에 넣은 뒤 부엌을 나간다. 루사처럼 서글서글 하던 마마형이 갑자기 원상태로 돌아온 것에 사트와 아트는 어리둥절했다. 유일하게 루사와 타트는 덤덤했다. 뭔가 바뀐 분위기에 제자리를 찾은 것 같으면서도 느껴지는 이질감에 동생들은 얼굴만 마주볼 뿐이었다.

"비켜봐."

마마가 나가고 퍼뜩 정신을 차린 아트는 칭얼거리는 사트를 무시하고 부엌을 나갔다.

"형!"

헐떡거리며 붙잡는 동생을 의아하게 보며 마마는 다음 말을 기다렸다. 머리가 살짝 헝크러져 있다.

"무슨 일이지?"
"형 괜찮아?"
"뭐가?"
"그냥...전야제 이후로 괜찮나 해서. 거의 안 쉰 거 같던데."

마마는 생각했다. 자신의 동생이 진짜 묻고 싶은 건 저게 아닐 거다.

"내가 요즘 너무 서글서글하게 지냈단 생각이 들어서. 그러니까 그깟 괴물 하나 처리 못 하고 당한 거겠지. 그렇지?"
"형?"
"걱정 마라. 앞으론 그런 일 없을 테니."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돌아서려는데 아트의 다급한 물음이 발목을 잡는다.

"루사형이랑 무슨 사이야?"

흠...이번엔 시간이 좀 걸렸다. 호감이 있다 그러기엔 확실치 않았고 싫어한다고 하는 건 맞지 않았다. 단순한 라이벌의 공기는 모호한 흐름으로 변질된 지 오래였다. 근데 아트 표정이 애매하다.

"아트. 내 사랑하는 동생아."
"응?"
"질투하니?"
"응?!?"
"나와 루사가 무슨 사인지 왜 궁금하니?"
"그야 애들이 형이랑 루사형이랑 그렇고 그렇다고!"

아트는 마마의 검지 손가락에 입술이 눌려 더 말하지 못 했다. 마마는 붉게 물든 아트가 귀여웠다. 귀는 아직 정상이라 마음에 안 들지만.

"이런. 내 동생이 질투를 할 줄은 몰랐군."
"아, 아니야 그런거!"

그래, 조금만 더.

"질투에 명약이 있긴 한데......내가... 이뻐해줄까?"

조금만 더.

마마는 귀까지 새빨개진 아트의 흘러내린 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었다. 머리를 정돈해주는 손길에 애정이 깃들어 있다.

"넌 머리 정리 잘 해야 해. 사트가 덮칠라."

마마는 무어라 항의하는 동생에게 상큼한 음성으로 쐐기를 박았다.

"루사 질투하지 마. 형 넘버원은 항상 너니까."

그렇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귀까지 새빨개진 아트를 보며 마마는 입술을 깨물었다. 저 눈치 빠른 녀석이 알아채면 안 되니까. 서둘러 방으로 돌아온 마마는 방문을 잠그고 자지러졌다.




"아트 어디 아파?"

부엌으로 돌아오니 루사형도 없었다. 타트는 피곤한 얼굴로 사트의 등에 파스를 붙여주고 있었다.

"미안. 못 기다리겠어서."
"상관 없어. 고마워 타트."
"..."

머리를 살짝 끄덕인 타트는 파스와 식사의 잔해를 처리하곤 방으로 돌아갔다.

"오늘 형들 좀 이상해."

아트는 아까 있었던 일을 회상하느라 사트가 하는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형들이 괴물한테 먹히더니 원상복귀 됐나 봐."

이에 사트의 얼굴에 사악한 미소가 스치는 걸 보지 못 했다.

'쪽!'

불시에 당한 볼키스에 아트는 멍하게 자극원을 바라봤다. 위험하단 걸 눈치챘으나 이미 늦었다.

"아트야~"

그 뒤는 상상력에 맞기겠다.




디에는 차원의 틈에 개설한 제 실험실에서 모든 열쇠를 틀어쥔 자답게 여유로운 모습으로 책상에 남겨진 편지를 읽고 있었다.

'내 부탁 들어줘서 고마워. 플랜트 뱅크 실험 성공했길 바래. 아니면 누구 덕분에 아까운 자원이 낭비된 거니까. 남은 실험도 성공해서 목적을 달성하면 날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언제가 될 진 모르겠지만.'

끝까지 제멋대로군.

디에는 썩어버린 마음으로 미소 지으며 마마로부터 걸려오는 화상전화를 깨끗이 무시했다. 지하실로 향하는 문을 닫자 더 이상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마 저 녀석도 끈질기군. 다른 녀석은 별 말 없는데 유달리 늘어진단 말이야.

다음에 만나면 어떤 장난으로 입막음을 할 지 궁리하며 전신을 스캔했다. 두터운 철문이 열리고 퀴퀴한, 그러나 상쾌한 실험실 특유의 냄새가 났다.

"안녕? 오늘은 컨디션이 좋네?"

친근하게 부르는 검은 자위가 빛났다. 진득한 녹색 액체가 간간히 기포로 흐트러진다. 워터캡슐 안의 실험체는 연구자의 목소리를 못 듣는 건지 미동조차 없었다. 장착된 산소호흡기만이 간간히 기포를 배출하며 그가 살아있음을 알렸다.

"대부분의 강력한 에너지 동력원은 결국 다른 생물의 생명력을 에너지로 전환시키는 류지. 매개체는 생명력. 즉 다른 생물이 없으면 그건 오합지졸만 못 해. 하지만 플랜트 뱅크는...크하핫!"

모든 걸 흡수하는 검은자위는 새까만 어둠으로 물들어 꿈틀대는 세포 덩어리를 보았다.

"밤새 분석한 결과 이 녀석은 여태 내가 찾아낸 살아있는 동력원들과는 다르단 걸 깨달았어. 다른 것들은 흡수한 생명력만큼의 파워만 쓸 수 있지만 이건 아니야. 흡수한 것보다 강한, 전혀 흡수하지 않아도 강력한 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어! 마침내 그 비밀을 알아냈다고! 우린 더 강해질 수 있어!"

더 이상 약물따위 필요 없을 거야. 무한한 에너지만 있다면 차원을 이동할 때마다 몸이 부식되지도 않을 거고 어쩌면 이미 부식된 부분도 되돌릴 수 있을 거야!

이어진 뒷말은 사악한 웃음소리에 파묻혔다. 그 웃음이 처량하게 들린 건 기분 탓일까?

"크킄, 크크큭, 크하하핫!"

미친듯한 웃음소리를 배경으로 실험이 시작됐다. 잔해. 저 캡슐 안에 든 것은 온전치 못 하다. 그렇기에 살려두려면 지속적으로 매개체를 공급해야 하고 마침내 찾아낸 최적의 생명체를 디에는 주입했다. 풍족하게 얻어낸 샘플로 임상실험은 끝난 상태. 이제 이식하여 결과를 지켜보는 것만 남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하고 디에는 기지개를 켰다. 간헐적으로 움찔거리는 실험체를 그는 흥미롭단 듯이 노려봤다. 새까만 눈자위가 실험중이라 그런지 이성적이다.

"어디 얼마나 강해지는지 보자꾸나. 날 실망시키지 않으리라 믿는다."

비틀린 비웃음은 어딜 향해 가는 것일까?

"애드."




"망할 녀석..."

끝까지 자신의 화상전화를 씹는 디에에게 욕을 퍼부으며 마마는 타트와 통화를 시도했다.

"마마형, 무슨 일이세요?"
"네 형 어딨냐?"

화면은 보지도 않으며 마마가 쏘아붙였다. 타트의 대꾸가 없자 마마는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이 왜 대답이..."

폭발한 마마의 신경질은 이어진 타트의 외마디 신음소리에 소멸했다. 한순간 새파랗게 변한 오른쪽 얼굴이 순식간에 돌아온다.

"너, 무슨 실험을 하는 거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복용하는 약물의 부작용입니다."

힘들어 하면서도 일일히 대답하는 타트가 안 쓰럽다.

"디에가 너한테 실험 중이냐?"
"아닙니다! 그런 건 절대 아닙니다! 그저 제 실험에 의해 생기는 부작용을 방지하기 위한 약물 때문입니다!"
"아님 말지 뭘 그리 당황해?"

이어진 정적에 마마는 타트가 입을 열지 않을 것을 확신했다. 한숨을 쉬며 디에의 행방을 물으니 시공간에 있을 거란 쓸모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디에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전야제 사건은 어떤지 물으니 자신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며 머리를 긁적인다.

역시, 손을 썼군.

마마는 전화를 종료하자마자 바득바득 이를 갈았다. 전야제 때 정체불명의 생명체에게 흡수된 후 제자리로 돌아왔다. 간만에 긴머리를 묶으며 자신의 실험실에 틀어박혀 그 생물에 대해 조사했으나 이렇다 할 데이터가 없었다. 기껏해야 이계의 생물이란 것 정도. 그렇다면 그것은 디에가 이계에서 가져온 것일까?

"하-."

의문투성이다. 풀리지 않는 숙제 같다. 디에, 무슨 꿍꿍이냐. 마마는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다.




그 시각 아트는 자신을 덮쳐 발목의  상처를 핥으려던 사트를 벌주며 책을 읽고 있었다.

"아트 미안해. 다신 안 그럴게. 그니까..."
"팔 높이 들어."
"넵."

끽소리도 못 하고 사트는 팔을 번쩍 들었다. 의자를 든 팔이 미세하게 진동했으나 별 거 아니란 듯 아트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종이 넘기는 소리와 간간히 훌쩍이는 소리만이 정적을 두드렸다. 아트의 눈치를 살피던 사트는 그의 눈이 빛나는 것을 보며 언제 애교를 부려 이 난관을 탈출할지 고민했다.

"아트? 무슨 일이야? 설마 사트가 덮친..."
"그런 거 아니야! 전야제 때 그 식물 말야. 플랜트 타워 에너지 뱅크 같아."
"넌...기억이 나니?"

동생을 놀리던 마마가 진지하게 물었다. 아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찾아봐도 이 세계에는 그런 고차원적인 동력원은 없어. 그래서 내가 조사를 좀 했는데, 이 식물, 엘프랑 비슷해."
"뭐?"
"실은 발목이 꿰뚫렸을 때 가시의 일부를 뜯어냈어. 그것의 파형을 분석한 결과 엘프와 비슷하게 나타났어."

쓰고 남은 샘플이 든 봉투를 흔들며 아트는 데이터를 보내주겠다고 했다.

"분석하고 연락하지."
"이따 저녁 먹고 얘기하자."
"한시라도 빨리...뒤에 저거 사트냐?"

저거라고 불린 사트가 볼을 부풀리자 마마와 아트는 웃어버렸다.

"벌 잘 줘라."
"응."
"무리하진 말고. 발목 덧나면 안 되니까."
"응. 루사 형한테는 물어봤어?"
"...그 근육돼지는 묻지도 마."
"역시 기억 못 하는구나?"

차라리 그거면 말이나 않지.

전화를 끊고 아트는 자료를 보내준 뒤 시스템을 껐다. 그리곤 사트 앞에 서서 헛기침을 하더니 무릎을 굽혀 눈을 맞췄다.

"팔 아파?"
"응."
"내리게 해줄까?"
"정말? 화 풀렸어?"
"아니."

금새 시무룩한 사트를 보며 아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전야제 때 무리했는데 너무 혹사시키나 싶어서. 다른 벌 줄까? 팔 안 아픈 걸로."

2탄인 거냐...

사트는 속으로 가슴을 탕탕 쳤다.

"..그...래."
"좋아 내려."

의자를 내린 순간 위험할 거란 걸 감지했다. 불길한 예감은 틀리질 않는다.

"아, 아, 아트! 잠, 잠깐만!!"
"착하지?"

거침없는 손놀림에 사트는 움찔움찔거렸다.

"..하...하윽"

터지는 신음소리에 아트는 미소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