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 아닌 늦은 밤. 어린 공학소년은 스크린을 켠 채 다이너모의 업그레이드에 집중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가족이자 친구 역할을 해 온 이 물체는 소년을 세상으로부터 지켜줄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그것을 강하게 발전시키기 위해 오늘도 밤샘 연구를 지속하고 있었다. 에러가 나기 전까진.

 

"...뭐야. 이거 왜 이러는 거야."

 

 작게 시작한 알람소리가 점점 커져서 이내 모든 스크린들이 연주하는 불협화음이 되었다. 어쩔 줄 몰라 허둥대자 각각의 악기들은 자신을 연주하는 연주자에게 제 주인은 인도했다.

 정신을 차리고 본 것은 난생 처음 보는 공간. 작열하는 푸른색이 검은 하늘에 균열을 긋고 있는 곳이었다. 자신의 연구가 이곳으로 이끈 걸까, 잠시 생각했으나 시공간에 손대지 않았던 것을 고려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원인은 외부에 있을 것이다.

 

"언제든지 찾아와도 된다고 했지? 내 여흥을 위해서."

 

 기분 나쁘게 웃는 상대는 어느날 자신의 앞에 나타났었던 가면의 남자였다. 어딘가 음습하고 불길한 기운이 느껴져서 보는 순간 이맛살을 찌푸렸었는데 트락들에게 잡힐 뻔한 걸 막아줬던지라 차마 부탁을 거절하지 못 했었다. 한참을 말없이 노려보고 있으니 상대쪽에서 음악의 주제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내가 널 부른 이유는 너에게 가능성을 제시하기 위함이다. 네가 너무 한 가지 길만 고집하는 것 같아서 시야를 넓혀주기 위해 불렀달까? 무릇 공학자라면 가능한 모든 가능성을 검토해야 할 필요성이 있으니까."

 

그게 자신과 무슨 상관일까. 남의 일에 신경꺼라 반박하는 것조차 귀찮아서 이맛살을 찌푸리며 쏘아보니 특유의 불쾌한 키득거림과 함께 남자는 시공을 열었다.

 

"들어갈 수는 없지만 볼 수는 있는 거울, 지금부터 3가지 가능성을 보여줄 테니 잘 보도록."

 

거울의 수면이 흔들렸다. 점점 가라앉는 의식 속에서 소년의 시야가 흐려졌다. 무릇 생명체는 자신의 시간이 아닌 곳에서는 이방인이고, 이방인에게 타인의 시공간은 허락되지 않은 것이다. '들어갈 수는 없지만 볼 수는 있다'는 무슨 뜻이었을까.

 

 

Ch1. Phsycic Tracer

 

 굉음과 함께 떨어진 곳은 알테라코어. 이곳은 예전에 자신이 퐁퐁거리는 녀석들의 부탁으로 잠시 갔었던 곳이었다. 공간 자체는 어렵지 않았으나 중앙부까지의 거리가 길고 나소드킹이라는 제법 성가신 녀석이 살던 곳이었다. 주변을 살피자 앞에 주먹을 휘두르며 맨 몸으로 나소드들을 처치하는 다소 정신나간 녀석이 보였다. 눈이 반쯤 풀린 것이 미치광이라 봐도 손색 없을 것 같았다. 근육도 엄청 났고... 자신과도 많이 닮았다. 머리가 삐죽삐죽하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정신없이 구경하던 중 나소드 한 마리가 자신이 있는 쪽으로 왔다. 다이너모를 전투모드로 전환하며 파티클 액셀레이터를 쓰려던 찰나 앞에 선 남자의 공격에 부서진 나소드 파편이 자신을 통과해 나동그라졌다. 남자는 파편을 보지도 않고 알테라 코어의 중심부로 들어갔고 소년은 추스를 세도 없이 남자를 따라 중심부로 들어갔다. 다소 죽이기 귀찮은 나소드킹이 자리를 잡고 남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뒤로 이어진 것은 자신도 잘 아는 수순. 에너지를 부수고 코어 장치를 노출시키는 것. 소년은 그 간의 전투장면을 분석하며 이 남자가 자신보다 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몇몇 기술은 자신도 아는 것이었지만 특정 수준 이상의 것들은 전혀 생각지 못한 것들이었다. 마지막으로 본것은 손쉽게 수중에 넣은 물건을 보며 미친듯이 웃어재끼는 남자의 얼굴이었다.

 

Ch2. Arc Tracer

 이번에는 어디로 온 걸까. 답을 채 알기도 전에 커다란 돌덩이부터 날아온 것을 보면 이곳은 페이타의 깊숙한 지하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 듀터가 마족의 녹색으로 물들인 연기가 방안에 가득했다. 그리고 그 녀석과 대치하고 있는 코트를 입은 남성은 어줍짢다는 표정으로 마족을 깔아보고 있었다. 자신은 이곳에 들어왔다가 애꿎은 다이너모만 박살난 채 돌아와서 더 기분이 나쁜 곳, 자신과 닮은 듯 닮지 않은 남성은 과연 어떻게 할까. 기대하며 눈을 깜빡인 순간 상황은 이미 정리되어 있었다. 어느새 소환된 정육면체는 불길한 기운을 내뿜으며 먹이를 갈구하듯 날카로운 소음을 내고 있었고 남자는 그대로 에머시스트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 이후의 상황은 일순. 별다른 손도 쓰지 않았는데 하늘에서는 빛이 쏟아져내리고 다이너모는 자수정을 집중 사격했다. 기운이 쇠한 녀석이 비틀비틀 일어나자 남자는 조소하며 최후의 심판을 내렸다. 심장을 꿰뚫은 일직선의 에너지가 소년의 시야를 마비시켰다.

 

Ch3. Time Tracer

 또 다른 이색적인 공간. 아직 얘기만 듣고 미처 가보지 못한 이곳은 마족들이 들끓는 곳이었다. 언젠가 더 강해지면 가보고자 했던 벨더 전장의 중앙부. 제법 멀면서도 가까워보이는 곳에서 왜인지 마족들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허공에서 허우적대며 떨어지는 모습이 흡사 분수대에서 뿜어져나온 물 같다. 호기심을 안고 가까이 다가가자 새까만 남자가 에너지를 분출하며 마족들을 소탕하고 있었다. 아니, 소탕보단 죽인다가 맞아라고 생각하며 소년은 가까이 다가갔다. 다소 독특한 모양의 다이너모와 남자 주변에 생성되어 있는 흑자색의 균열들이 그가 정상이 아님을 알려주었다. 하늘을 수놓는 마족들을 보며 소년은 남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새까만 흑자위와 눈이 맞았다. 심장을 꿰뚫는 듯한 통증에 소년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자신을 본 것인지 그것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남자 주변에서 증가하는 균열들과 증폭되는 에너지에 저항할 수 없음은 확실했다. 터질 듯 조여오는 심장에 비명이 새어나오기 직전 남자가 외친 명령어는 소년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역시 나약하군."

 

얼마나 잔 것일까. 검푸른 공간에서 눈을 떴다. 새까만 암흑과 기분 나쁜 웃음소리. 그것이 소년의 의식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저것들은 뭐야."

"큭큭큭... 글쎄."

"나랑 전부 똑같이 생겼어. 설마, 저게 전부 '나'인가?"

"다행히 머리는 안 다쳤나 보군. 자,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가능성은 다 보여줬는데 어느 게 가장 마음에 들지?"

 

흰 색 코트. 가장 강해보이고 안정적인 것은 그 사람 같았다. 그러나 전투스타일을 볼 때 그 경지에 오를 정도면 이 사람도 가히 정상은 아닐 거란 것이 소년의 판단이었다. 첫 번째 남자는 다이너모보단 육신을 강화시키고 그를 보조하기 위해 다이너모를 이용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세 번째는...

 

"마지막으로 보여준 녀석... 뭐하는 녀석이야?'

"그 녀석? ...직접 알아보지 그래? 기회가 된다면."

 

 킬킬거리며 웃는 모습이 꼭 나중에 만날 거라는 확신을 주는 듯 해서 더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악마 같은 눈이 자신을 꿰뚫어봤었다. 가학적으로 비웃는 모습에 심장이 내려앉았었다. 아니 파열했었다. 뭘까. 어떻게 된 걸까. 그는 어쩌다가 그렇게까지 망가진 걸까. 혼란스러움에 욕지거리가 혀끝까지 치밀었는데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면의 남자는 태연히 말을 이었다.

 

"무릇 시공간은 한 사람당 하나씩 주어진 것. 타인의 시간을 보는 것도 범죄이거늘 그 시간에 개입하려 했다면 그 정도 형벌은 극형도 아니다. 남의 것을 탐하지 말라는 말이 괜히 있을리가."

 

흔들리는 소년에게 시공간의 관리자는 속삭였다.

 

"그래서, 너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미래의 변절자 아크 트레이서."

 

"할아버지-! 할, 아, 버, 지-!"

정원에서 나소드를 들고 달려온 손자는 오늘도 제 할아버지를 애타게 찾았다. 책을 보고 있던 위로 뻗친 듯한 헤어스타일의 노인이 달려오는 남자아이를 품에 안는다.

"할아버지, 저번에 해주신 얘기 또 해주세요."

해맑은 미소를 무릎에 앉히며 나이 지긋한 신사는 운을 뗐다.



옛날 옛날에, 아주 먼 옛날에, 은색 합금으로 만든 구조물 안에서 세 형제가 살았단다. 첫째는 활발한, 둘째는 괴짜스런, 셋째는 겁이 많은 아이였지. 그러던 어느 날 첫째가 둘째가 벽과 대화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됐어. 다른 사람은 이상하게 여겼겠지만 집중력이 병적으로 세지면 나타나는 둘째만의 습성이었기 때문에 첫째는 지병이 도진 것이라 생각했단다. 연구에 몰두하다 보면 종종 허공과 얘기하곤 했거든. 그런데 어느 날은 지나가던 셋째가 열린 방 문 틈으로 둘째의 웃음소리를 들었어. 방해받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둘째 형이 연구 중에 방문을 열 리 없었기에 셋째는 인사를 하려 했단다. 그러나 이어진 건 둘째의 웃음소리 뿐이었어. 벽 쪽으로 몸을 돌린 채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것 같았는데 셋째의 눈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거든. 겁이 난 셋째는 발소리를 죽인 채 첫째에게 갔단다.

"큰 형, 큰 형 있어? 작은 형이 이상해."
"그 녀석 이상한 게 한 두번이냐."
"근데 이번에는 좀 많이 이상해. 누군가랑 대화하는 거 같은데 아무도 없어."
"그 녀석 원래 연구하다가 혼자 떠들곤 해. 밤마다 떠들어대서 시끄러 죽겠어. 방도 많은데 옮기든가 해야지 원.."
"그래고 평소랑은 다른 거 같은데 좀 가 봐. 빨리 나와봐. 이상하다고!"

셋째의 성화에 못 이겨 첫째는 그와 함께 둘째의 방으로 갔단다. 열린 문 틈으로 둘째의 웃음소리가 이어졌고 겁에 질린 셋째와 달리 첫째는 짜증스럽단 표정으로 문을 벌컥 열었어. 둘째가 연구를 시작한 이레로 잠을 거의 자지 못했기 때문에 첫째는 짜증이 쌓일 대로 쌓인 상태였지. 시끄럽다 쏘아붙이려고 방문을 벌컥 연 순간 둘째는 배를 잡고 바닥에서 뒹굴고 있었단다.

"풉...푸핫...푸흐흐...크하하학!!"

자지러지게 웃던 둘째가 타인의 존재를 알아차리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어. 한참만에야 제 형제들을 발견했는데, 한 말들은 평소와 다름없는 것들이었지.

"...문 열려 있었냐?"
"어. 그리고 너, 밤에는 좀 조용히 해. 시끄러워서 잘 수가 없잖아!"
"용건은 그것 뿐?"

끄덕이는 첫째와 달리 셋째가 우물쭈물거리다 겨우 물었었지.

"...형, 괜찮은 거지?"
"응. 멀쩡해."

헤실거리는 표정이 다소 이상했지만 나가자는 첫째의 성화에 셋째는 끌려나왔을 거다. 아마도.

"봤지? 멀쩡하잖아."
"......그래도 이상..."
"너도 좀 익숙해져라. 도대체 몇 년이냐? 네가 저 녀석 이상하다고 할 때마다 가보지만 멀쩡하잖아. 본인이 괜찮다잖아? 신경 끄고 네 연구나 해."

첫째는 셋째에게 딱밤을 때린 뒤 방으로 돌아갔어. 복도에서 셋째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방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끊겼었지. 그 뒤로 셋째가 둘째 형에게 가보자는 말은 하지 않았었던 것 같구나.

사건이 터진 것은 여름날이었을 거다. 불볕더위가 유난히 기승을 부리던 해였지. 여기서부터는 나도 전해들은 이야기니 조금 안 맞을 수도 있을 거다. 궁금하면 네 작은 할아버지에게 물어보렴.

시간은 오후 1시경. 한참 해가 높을 때라 첫째는 방에 늘어져있었어. 갈증을 못 참은 셋째는 부엌으로 물을 마시러 갔는데 부엌 뒷문으로 둘째가 나가는 것을 봤단다. 뒷문은 뒷마당으로, 뒷마당은 산으로 통하는 곳인데 수풀이 우거져서 음침하기 짝이 없었어. 여름에는 녹음이 무성해서 햇빛이 거의 들지 않았고 습했지. 겨울에는 앙상한 가지들이 귀신이 숨어있는 것처럼 서늘했단다. 평소 쾌적한 것을 선호하는 둘째가 왜 그런 곳으로 가는지 궁금했던 셋째는 소리를 죽이고 뒤를 밟기 시작했어. 도착한 곳은 나무로 만든 허름한 헛간. 그 집을 살 때부터 뒤에 있던 건물인데 그게 어떻게 쓰였는지에 대한 가설은 아주 많았지. 좋은 용도로 쓰이지 않았다는 소문이 많아서 비교적 싸게 살 수 있었는데 그 부동산 업자가...... 크흠. 이야기가 옆으로 샜구나. 미안하다. 그래, 어디까지 얘기했지?

 둘째를 따라간 셋째는 그 허름한 헛간에 도착했어. 헛간 내부 벽면에는 여러가지 도형들과 공식들이 적힌 종이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단다. 간간히 그림들도 보였는데 유독 정육면체가 많았어. 모두 둘째의 손글씨로 쓰인 것들이었고 그것들은 연구자료처럼 보였지만 무슨 연구인지는 알 수 없었단다. 셋째는 충격을 받아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는데 헛간 밖에서 둘째의 목소리가 들렸어. 고양이들이 잘 먹는다는 참치를 땅에 내려놓고 허공을 쓰다듬기도 하고, 작게 웃으며 '나비야-.'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이 실제 고양이를 대하는 것과 비슷했다고 하더구나. 셋째는 겁이 나서 집으로 달려와 첫째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첫째는 근처 정신과 병원에 전화를 한 뒤 둘째에게 달려갔단다. 여전히 고양이를 쓰담는 듯한 행동을 하는 둘째 앞에는 부식되어가는 가득 찬 참치캔이 놓여 있었어.

병원 복도에서 무심한 표정으로 기다리니 의사가 첫째와 셋째를 불렀어. 그리고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차트에 열심히 적더구나. 그리고 5시간 쯤 뒤 종이 한 장을 내밀었어. 그것을 유심히 보던 첫째와 셋째는 둘째를 정신과 병원에 입원시켰단다. 그들은 거기서 모든 사건이 끝난 거라 생각했고 다시 평화로운 나날들이 돌아왔단다.



"그래서 둘째는 어떻게 됐어요?"
"그 녀석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끝내 호전되지 못 했다고 들었다."
"그럼 병원에서 죽은 거에요?"
"......그렇다라고 봐야겠지."
"......안타까워요. 첫째와 셋째가 조금만 신경써줬어도 괜찮았을 것 같은데..."
"세상에는 인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들도 많단다. 이런, 벌써 세 시구나. 간식 먹을 시간이다."

*

"아버님, 작은 아버님 오셨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몇 년 전 과부가 된 며느리가 나가자 방의 주인보다 조금 젊어보이는 노인이 들어왔다. 그는 키가 큰 편이었는데 살집 하나 없는 몸 때문에 더 커 보였다.

"형, 왜 안 왔어?"
"뭘?"
"어제. 둘째 형 기일이었잖아."
"......"
"적어도 기일정도는 챙겨야 하는 거 아냐? 양심이 있어야지."
"난 그 녀석 보고 미치라고 한 적 없어."
"작은 형이 자신을 정신과 병원에 입원시키라고 한 적도 없어."

잠시간 살벌한 기운이 방 안에 감돌았다. 형을 노려보던 노인은 성큼성큼 다가와 형이 보고 있던 종이를 빼앗았다.

"맨날 일만 하면서 하루 정도는 빼도 상관없는..."

사락. 소리없이 카펫 위에 떨어진 종이를 말없이 주우며 형은 동생을 타일렀다.

"이미 오래 지난 일이고 더 이상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야. 그 당시에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었어. 병원에 입원까지 시켜줬잖아? 회복하지 못한 건 그 녀석이 나약했기 때문이야."
"...나 며칠 전에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형은 그 병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었다면서?" 
"겨우 그것 때문에 온 거야?"
"겨우 그것? 둘째 형이 치료라는 미명 하에 받은 건 오늘날의 고문과 다름이 없어. 근데, 겨우 그것이라고?"
"처음에는 약물치료를 했어. 근데 그게 안 들었잖아? 병원 측에서는 그 녀석을 치료하기 위해 애썼어. 그래서 최후의 수단을 사용한 거고. 병원이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의료행위를 행하겠다는데 보호자로서 그걸 막는 건 환자를 방치하는 것과 다름이 없어."
"아니, 그건 막을 수 있었어. 알아보니까 둘째 형에게 약물치료로서 복용됐다는 약, 환각제다더라. 형은 알고 있었지?"
"...아니."
"거짓말."
"진짜 몰랐다 그건."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그 병원은 오래 전에 폐업했어."
"그럼 그 때 작은 형 주치의와 담당 간호사, 아니 담당 의료진 전부를 찾아내서 대가를 치르게 해! 그게 형 일이잖아?"

형은 동생의 분노한 얼굴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알아본 뒤에 연락하겠다고 말했다. 형을 수상쩍게 노려보며 나가는 동생의 뒤를 막연히 담배만 피우며 바라보던 노인은 긴 시간동안 생각에 잠겼다.

"...여보세요?"
"오랜만이군."
"아, 안녕하십니까, 루나틱 사이커님. 바꿔드리겠습니다."

루나틱 사이커라 불린 노인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잠시 일처리 중이였습니다. 무슨 일이신가요?"
"내가 이전에 한 일에 대한 정보가 남아있는 것 같군. 일부는 새어나간 것 같고. 내가 부탁한 정보 세탁은 제대로 진행된 건가?"
"네. 아는 사람 모두를 처리했고 입막음을 했는데 뭔가 착오가 있었나봅니다. 제가 직접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다시 나서는 일은 없길 바라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일이 끝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한 모금. 두 모금. 담배를 세 모금 째 들이마시며 루나틱 사이커는 자신이 주워든 종이를 보았다. 몇 십년을 서랍장 속에 간직해 둔 그것. 오늘 태워버리려고 했는데 계획이 어그러진 것 같다. 태우는 대신 그는 웅얼웅얼, 종이의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진단서
환자명: 아크 트레이서
나이: 18
증상: 헛것을 보며 현실과 공상을 구분하지 못한다. 자주 혼잣말을 하며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다.
병명: 정신분열증으로 판단되어 입원 후 정기적인 치료를 받아야 한다.
특이사항: 약물주사가 통하지 않을 경우 다른 방법을 사용할 것.
치료현황: 3주 간의 약물치료. 효과 없음. 2차 방법으로 치료 시도.
               2차 치료 중 환자가 병원을 탈출하려함.
               2차 치료 4주간 진행. 환자의 불안정한 상태가 심해짐.
               환자의 5번째 탈출 시도 후 보호자가 퇴원 수속을 진행."

노인은 서랍장에서 다른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그 종이에 적힌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의뢰서
의뢰인: 사이킥 트레이서
피의뢰인: 아크 트레이서
나이: 18

치료현황:
 약물의 효과가 잘 들음. 환각제의 효과가 나타나 증상이 더욱 심해짐. 환각, 환청, 그에 따른 기타 증상들이 수반됨. 3주간 실행.
 심폐소생술에 사용되는 기계를 관자놀이에 대고 전기충격 시도. 증상이 더욱 악화됨. 4주간 실행.
 피의뢰인의 병원을 탈출하려는 행동이 심화되어 의뢰인에 의해 퇴원.
비고:
 제정신으로 돌아오긴 힘들 것으로 추정.'

루나틱 사이커는 서랍장에서 꺼낸 종이를 한참 동안 보았다. 종이가 타들어가며 매캐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재만 남은 것을 확인한 뒤 노인은 손자의 방으로 갔다. 평온하게 잠든 아이의 얼굴에 주름진 손길이 스쳤다.

"내가 네게 거짓말을 했구나."

깊게 잠든 손자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안심한 할아버지는 손자에게 소곤소곤 비밀얘기를 했다.

"둘째는 퇴원을 했단다. 하지만 그의 정신은 돌이길 수 없이 망가져 있었고 형제들은 그가 더 이상 회복될 수 없다 판단했지. 그래서 그들은 둘째를 선한 목적으로 썼단다. 사람을 더 강하게 만들기 위한 실험의 재료로서 말이다."

노인은 손자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더없이 부드러움 음성이 속삭였다.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보다 강한 사람이 생기는 것을 매우 싫어한단다. 나중에 네가 나보다 강해지기 전에 내가 죽어야 할 텐데... 아니면 네 아빠처럼 너도 똑같은 꼴을 당하게 될 테니 말이다."

노인의 얼굴의 인자한 미소가 속삭였다.

"잘 자거라 애드."


***


"반장님, 오늘도 야근이십니까?"
"...들어가야지."
"저녁부터 무슨 파일을 그렇게 심각하게 보세요?"
"아무것도 아니야."
"......"
"별 거 아니니 신경쓰지 말고 퇴근해."
"예. 내일 뵙겠습니다."

직책에 비해 제법 젊어보이는 형사는 미제 사건파일을 읽고 있었다. 매섭지만 제법 서러운 눈빛의 노형사는 스크린을 뚫어져라 노려보다가 파일을 닫았다. 그는 사연 많은 형사였는데 원래 과학자였던 그가 경찰이 된 건 몇 십년 전에 의문스런 죽음을 맞이한 그의 형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가 보고 있던 파일의 내용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미제사건 보고서
타입: 형사
사건 당시 담당자: 로드 나이트(은퇴)
현 담당자 : 디아볼릭 에스퍼 
피의자:
피해자: 아크 트레이서
사건요약: 인근 야산에서 훼손이 심한 시체 한 구 발견. 한쪽 눈이 없었으며 구타의 흔적이 있다. 주삿바늘로 인한 멍자국과 불법 수술의 결과물로 의심되는

             흉터들이 수십개.
비고: 공소시효 만료로 인해 수사 종료. 학대 빛 불법적인 의료 행위로 인한 쇼크사로 추정.'


오늘도 데이터를 분석하러 책상 앞에 앉은 주인님은 특유의 기품과 냉정함을 발산하고 있다. 지금의 주인님을 처음 본 건 약 10년 전 쯤이었다고 한다. 기록에 확신이 없는 건 데이터의 유실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초기의 다이너모가 아니다.

주인님은 강해지길 원하셨다. 누구보다 빠르고, 강하며, 그래서 다시는 자신을 업신여기는 자가 없게 만드는 것. 그것이 내가 모시게 된 주인의 유일무이한 목적이었다.

"...젠장! 결과가 예상값과 다르잖아!"

이미 충분히 강하신 것 같은데 여전히 힘을 갈구하는 주인님은 특유의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종이를 집어던졌다. 강박증이 도진건지 이마를 짚은 모습이 힘겨워 보인다. 철야 17일째. 이쯤되면 내 동족이란 생각이 든다


고른 숨소리가 방을 지배한다. 평화로운 표정을 보니 오늘은 악몽이란 걸 꾸지 않는 것 같다. 망하지 않게 조심조심 이불을 덮어드리지만 유연성이란 기능은 없어서 기어이 뒤척이고 마는 주인님을 보며 팬소리를 죽였다. 다행히 더 움직이진 않았다. 행운이든 당연이든 목적을 달성했다. 주인님 의견대로 '쓸모없는 망할 고철덩어리'는 아닌가 보다.

다른 방에서 충전 중이던 주인님을 가장 오랫동안 지킨 나소드가 온다. 저것엔 나는 모르는 여러 데이터들이 암호가 걸린 채 보관되고 있다. 듣기로는 나소드 연구를 시작할 때부터 옆에 있던 것이라고 했다. 그 데이터들을 소장하고 싶었지만 나는 허락된 백업장소가 아니었다. 오래된 나소드가 길을 비켜준다. 배터리 잔량을 보니 더 이상의 기록은 불가능하다. 충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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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나간 녀석은 제일 마지막에 만들어진 것이다. 가장 반질반질하며 새 것이기에 성능도 좋다. 오래된 녀석들도 이미 부품 교체와 업그레이드를 통해 진화했지만 태생이 다른 것이 부럽다. 생물은 오래 살수록 연륜이란 기능이 생긴다고 하는데, 기계에게는 마냥 좋은 소식은 아니다.

새 것이라 그런지 녀석의 배포는 주인을 닮았다. 거침없이 목표를 향해 나간다. 공격적인 성향의 나소드를 원한 주인은 자신의 6번째 창작물을 가장 강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녀석은 내 데이터에 손을 대려 했다. 주인은 나를 퇴물쯤으로 여기는 반면 늦게 만들어진 녀석일수록 아끼는 것 같았다. 나를 볼 때는 심박수가 아주 안정적인데 저것을 볼 때는 미세하게 그 파동이 다르다. 그것은 주인이 매력적인 실험체를 발견했을 때 나타나는 파형과 비슷했다. 알만큼 아는 나는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나 보다. 보호할 데이터가 없었다면 이미 뜯겨서 새로운 다이너모나 드론을 만드는데 쓰였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나는 쓸모없는 망할 고철덩어리란 소리를 자주 듣는다.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상체가 건강해보이지 않는다. 철야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연구에 매진하던 것이 엊그제 같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저런 것일까.

"네 외관과 부품이 닳는 것과 비슷한 거야."

내 질문에 귀한 데이터인 놀란 얼굴을 잠깐 보여준 주인은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었다. 그런 쓸모없는 데이터는 쌓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 뒤로 명령이 아니면 대답하지도 질문하지도 않았다. 기계는 목적에 충실하면 되는 것이다.

이대로 허공에 떠 있으면 엘 아까운 줄 모른다고 할 것이다. 책상은 주인이 차지하고 있어서 앉을 수 없다. 주인을 옮기자니 '망할 고철덩어리'를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침대에 있자니 '빌어먹을 고철덩어리'를 들을 것 같다. 오늘 보초는 바닥에서 해야 겠다. 그나마 카펫이 깔려 있으니 저번처럼 흠집이 나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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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에드워드 그레노어. 날 찍는 것의 이름은 다이너모. 초기 프로토타입에서 많이 변화시켰지만 그래. 이 몸이 만든, 나소드다."

흔적도 희미한 오래된 기억의 소리가 들린다. 꿈인 줄 알았던 소리가 점점 선명해진다. 몽롱함과 다른 이질감에 꿈에서 느껴지는 선명함인지 가늠해보다 눈이 떠졌다. 돌아온 의식에 망막에 맺힌 것은 아주 오래된 기계, 내가 걸어온 모든 데이터를 저장하고 있는 나의 분신과 같은 다이너모였다.

"누가 함부로 꺼내보라고 했지?"

으름장을 놓듯 스크린을 꺼버리자 느리게 다이너모가 올라온다. 눈높이를 맞춘 스크린에 '죄송합니다.'란 간단한 문구가 뜬다. 한동안 뚫어져라 바라봤다. 다이너모는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는 것 같았다.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묻어버린 기억이 다시 살아난 것이 언짢을 뿐이었다.

"주인님."
"...뭐지?"
"나중에, 만에 하나 주인님께 아이가 생긴다면 이 이야기를 들려줘도 되겠습니까?"
"......넌 내가 아이를 갖길 바라냐?"
"......"
"결혼도 하고?'
"......"
"그딴 건 강해지는 데 아무런 도움이 안 돼. 오히려 약점이 될 뿐이야."
"이제는 힘보다 소중한 것을 찾으실 때도 되지 않으셨습니까?"

다이너모는 냉정했다. 나는 이미 흘러가버린 세월의 산물로서 지나간 과거에 대해 보상받을 수 없다고 했다. 추억도, 저택도, 과거도 새로 만들 수 없다고 했다. 어머니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러나 주인님을 닮은 아이에게는 다른 결말을 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나에게, 나와 닮은 나의 아이에게 새로운 미래를 주라고 했다. 그것은 가능하며, 기회가 된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내가 만든 것이지만 난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다이너모는 웃음소리 비슷한 것을 냈다. 그래봤자 녹음된 것이지만 왠지 그게 친근해서 웃어버리고 말았다. 다이너모가 조금 전의 소리를 조금 더 크게 냈다. 이 녀석이 미소짓는 걸 본 것은 내 착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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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그랬어?"
"예."

똘망똘망한 눈망울이 제법 주인님을 닮았다. 천진난만한 목소리에 심박수를 체크하니 다소 상기된 듯 하다. 평소보다 살짝 빨라져서 긴장했지만 건강에 위협이 되는 것은 아니라 판단되어 경보시스템을 껐다. 사내아이의 웃음소리가 울리더니 이내 자신의 우상을 찾는다.

"아빠! 아-빠-!"

저 멀리서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비척비척 걸어오는 주인님이 보인다. 얼굴엔 짜증이 가득했지만 연구소에서만 지내던 지난날의 어두운 빛은 없었다. 얼굴이 다소 상기되고 심박수도 평상시보다 빠른 것을 보면 들뜬 상태라고 추정된다. 사내아이가 달려가자 팔을 벌려 안아드는 모습은 익숙해 보였다.

"아빠, 다이너모가 아빠 어린 시절 보여줬어! 아빠가 다이너모 만들었데!"

주인님이 가장 오래된 것을 쏘아본 것 같지만 못마땅한 시선은 아이의 기습뽀뽀에 빠르게 사라졌다.

"내 나이에 아빠가 다이너모를 만들었데! 아빠 대단해!!"

아이의 심박수가 빨라져서 그런지 주인님의 심박수도 빨라졌다. 연결되어 있단 것은 서로의 상태를 공유하는 것인가 보다. 결혼을 하시고 아이가 생기신 뒤로 더 자주 미소지으시는 것이 기분이 좋으신 것 같다.

문득 오래된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져 그것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아까 있던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무슨 소리를 내고 있다. 작지만 사람의 웃음소리 같다. 아이를 안은 주인님이 그것과 점점 가까워졌다. 이후 내가 기록한 것은 짧게 이어진 낮은 웃음소리였다.

제비꽃이 휘날린다. 연두빛 언덕 위에 누워 자연과 하나된 듯한 존재의 뾰족한 귀가 보인다. 언덕과 같은 빛깔의 머리카락이 햇살을 받아 금빛으로, 은빛으로, 하늘빛으로 반짝이길 잠시, 느리게 뜨인 눈이 이것도 곧 끝날 환상이라 고했다. 보다 더 강해지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노력해왔었다. 인간들과 마족들이 함부로 파괴하는 숲을 지키기 위해 처음으로 활을 잡았던 그 날을 기억한다. 타고난 시력과 순발력으로 궁수 한 명의 몫을 해내는 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었다. 정든 보금자리. 자신의 고향이자 정신적 지주인 숲 구석구석을 담으며 친하게 지내던 나무들과 동물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곤 지금 이 언덕 위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가장 좋은 경치는 마음에 있는 것이라 했던가. 벌써부터 그리움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한동안 이 하늘을 볼 수 없을 것이다. 

 

 

피 맺힌 절절함이 고막을 타격한다. 한이 서린 울음소리가 골목을 매우고 한없이 깊어진 절망이 어린아이의 의식을 불태웠다. 마족들이 휩쓸고 간 자리는 남은 것이 거의 없었다. 그들의 술수에 놀아나 애꿎은 곳에 병력을 배치하여 구할 수 있는 생명을 살해한 꼴이 되자 군사의 리더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상황보고를 한 병사에게 생존자를 찾으라 이른 뒤 리더는 조금 전부터 자신을 공포에 질린 시선으로 바라보던 아이에게 다가갔다. 살짝 들려있던 궤짝이 소리없이 닫히는 것에 조용히 타이르는 소리가 이어진다. 잠시 후 열린 궤짝에서 그슬린 흔적이 가득한 적발의 사내아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의 것과 비슷한 색상에 문득 고향에 두고 온 어린 남동생이 생각난 기사는 아이를 안아올려 병사들이 주둔한 곳으로 갔다. 더 이상의 생존자가 없는 마을에 계속 머무를 필요는 없다. 지금은, 떠날 때이다.

 

 

타인의 눈을 피하여 발걸음 닿는 대로 걷다보니 이상한 동굴에 도착했다. 깊은 숲 속, 산짐승마저도 자취를 감춘 이곳은 수련을 하기 딱 좋은 곳이었다. 오래전에 죽었어야 할 육신은 문명이란 것과 결합되면서 그 생이 연장되었고 그것은 자신에겐 더없는 고통으로 다가왔었다. 그러나 그것에 계속 얽매여 있을 순 없었다. 잃어버린 것이 있단 것은 되찾아야 할 것이 있단 것과 같았다. 비록 온전한 모습으로 되찾을 순 없어도 적어도 남아있는 불미스런 기록만큼은 제거할 수 있을 것이었다. 아직 사람의 것인 손이 주먹을 쥔다. 복수할 것이다. 반드시.

 

 

쇠와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울린다. 세월에 젊음을 반납한 대가로 노련함을 얻은 중년의 기사와 아직 젊은 육체를 소유하고 노련함을 갈망하는 젊은 기사간의 대련이 절정에 치닫는다. 어릴 적 헤어진 사람은 자신의 형제이자 왕국 최고의 기사였다고 했다. 중년의 기사는 젊은 기사의 패기를 기특해하며 특별히 자신의 제자가 되는 것을 허락했고 나날이 일취월장하는 실력에 언제 둥지를 떠나보낼 지 고민하고 있었다. 새는 주어진 하늘이 클수록 성장하는 법. 조만간 이별이 만남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부딪히는 검날의 주인은 생각했다.

 

 

집을 떠나 정신적 고향이 된 탑에서 망토를 두른 소녀가 걸어나왔다. 앞으로 자신의 앞에 펼쳐질 수많은 이야기들과 그들로 인해 찾을 자신의 가능성에 소녀는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먼 길에 오르기 전 필요한 것들을 구매한 뒤 숲으로 향했다. 이 길을 따라가면 수도에 닿을 것이다.

 

 

긴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뜬 곳은 스스로를 봉인했던 캡슐 안이었다. 이전보다 강해진 나소드들을 보며 알 수 없는 희열을 느낀 것 같았다. 감정회로란 것이 존재한다고 한들 나소드인 자신이 인간의 감정을 느낄 수 있을 리 없을 터인데 어째서라고 묻는다면 이 회로를 집어넣은 자신을 만든 자의 변덕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 같았다. 채비라고 할 것도 없이 자신의 사랑하는 기어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펼쳐진 것은 망망대해. 이 바다를 건너 대륙으로 가면 자신의 존재의의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깊은 한숨은 그간의 수련이 고됨을 알려주는 동시에 더 이상 남아있는 것이 없음을 뜻했다. 드디어, 기존에 익혔던 기술과 새로이 연마한 기술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게 되었다. 태어날 때부터 자신을 수호한 캐논과 순백의 갑주는 자신이 엘에게 선택받았음을 알려주는 상징이자,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가문의 유산이었다. 처음으로 선 전장에서 무고한 사람들이 한없이 많이 죽는 것을 봐온 자신은 더 이상 그런 사람이 없게 만들 거라 새긴 비석을 스스로에게 세웠다. 이제 안락한 수련장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 신념을 위해서.

 

 

오라버니를 잃은 슬픔은 더 없이 깊었다. 가문과 명예를 모두 버리고 마족의 앞잡이가 된 오라버니에게 물을 것이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창은 약해빠졌다. 옆에는 자신에게 거래를 제안한 강력한 존재가 여전히 손을 뻗을 채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 존재라면 자신에게 필요한 강력한 힘을 줄 수 있을지도 몰랐으나 그녀의 미소는 통 속을 알 수 없었다. 자신이 바라는 것은 가족의 안전과 오라버니를 원래대로 되돌려 놓는 것. 목적을 위해서라면 이런 망설임마저 사치일 수도 있으나 스스로의 안전이 걸린 문제에 망설임이 따랐다. 일말의 침묵 끝에 황금빛 눈이 결의를 내비쳤다. 가문의 여식은 목적을 위해 자신의 안전을 대가로 지불했다.

 

 

모든 것이 불탔다. 이미 그 시점에서 모든 것과 이별했다고, 오로지 분노와 증오, 힘에 대한 열망만이 남았다고 자부하고 있던 공학자는 오랜 세월 자신이 강해질 때까지 머무르던 푸른 차원에서 나와 또 다른 푸름을 맞닥뜨렸다. 몇 년만에 보는 나무와 생명체들에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자료를 검색하다 우연히 열람하게 된 것은 엘리오스에 사는 인공지능의 고대 나소드. 기능도, 위치도, 만든 이도 불명이지만 나소드를 연구하는 자신에게 그것의 코드는 충분히 가치를 지니고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어떻게 찾아낸 그녀의 시그널로 위치를 추적해본다. 스크린에 표시된 움직이는 점. 그는 목표물이 향하는 곳으로 좌표를 설정했다.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었다. 자신에게 대가 없는 친절을 베푼 사내에게 보상을 해주는 마음으로 힘을 빼앗긴 마족은 거래를 제안했다. 시간이 없단 말에 사내는 별다른 의심없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자신을 노리던 배신자를 처단함으로서 일단의 위기는 모면했다. 앞으로 어떤 종류의 암살자들이 몰려올 지는 알 수 없었으나 지금은 그를 살린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자신은 이미 권력과 지위와 이별한 몸이었다. 더 이상의 이별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

 

 

마족들의 비명이 낭자한 곳에서 고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개인별로 최강의 기력을 가진 전사들은 각자의 무기로 적을 소탕하고 있었다. 검, 마법, 나소드, 창, 대포, 마족의 힘... 그들에 의해 떨어진 머리는 셀 수 없을 정도였으나 쉴 새 없이 몰려드는 마족 병사들에 전사들은 서서히 지쳐갔다. 거칠어지는 숨을 가다듬으며 허공을 가르길 두어 번, 온몸의 근육은 휴식을 요구하였으며 비릿함에 지끈거리던 후각은 감흥이 없어진 지 오래였다. 총성이 울린 것은 그때였다. 하늘에서 이 세계의 것이 아닌 듯한 빛이 내려왔고 이제껏 본 적 없는 화력무기들이 순식간에 근방에 있던 모든 마족을 사살했다. 청안의 여자는 빨간 대지 위에서 상큼하게 웃으며 엘 수색대 대원들에게 다가왔다. 저벅저벅 걸어오는 소리는 새로운 동료의 출현을 알리고 있었다.

 

"나약함과 이별할 시간입니다."

 

 

 

 

 

 

 

 

 

 

 

 

 

 

 

 

 

 

 

 

 

'와르르'

 

나무토막들이 자리를 이탈함과 동시에 표정이 무너져내린다. 들려오는 싫은 소리와 씩씩거리는 소리에 다급히 달려온 눈동자에 담긴 것은 공들여 쌓은 탑이 무너져 억장이 내려앉은 아이의 축 처진 어깨였다. 분명 슬프고 안 좋은 상황인데 회상이란 수면에 떠오른 모습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간다. 웃음을 겨우 참은 시선은 기척을 내며 아이의 옆에 앉는다.

 

"아가."

"내가 열심히 쌓은 건데 무너져버렸어."

 

화가 난 건지 속이 상한 건지 그 경계에 있는 목소리로 제 어미를 올려다보는 아이는 실망스러운 눈치였다.

 

"엄마 보여줄려고 열심히 쌓은 건데..."

 

그 모습이 마치 어릴적 자신을 보는 것 같아 자식을 쓰다듬는 손길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이어진 포옹에 아이는 어리광을 부렸다. 다음에는 꼭, 멋있는 탑을 보여주렴. 아이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

 

 

 

오늘도 매를 맞는다. 궂은 일을 해본 적도 없지만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했던 자신은 이런 일과는 거리가 멀었다. 바닥을 쓸고 가구를 닦는다. 손이 트고 여러 차례 채워진 인생이란 족쇄는 목에 선명한 상흔을 남겼다. 번번히 자신을 탐하려는 어른들과 한 푼이라도 더 받으려는 상인들의 등살에 피골이 상접한 몸은 움직이는 것 자체가 무리.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도 어려웠지만 하지 않으면 돌아오는 것은 구타였고 남는 것은 싱싱한 흔적이었다.

 

'와르르'

 

날아온 손지검에 중심을 잃고 휘청이다 물건들을 정리해서 넣어둔 상자를 엎어버렸다. 상자와 물건들에 뒤섞여 바닥을 나뒹굴었다. 예의 사내새끼가 기생오라비처럼 생겨선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줄 모른다는 소리를 하며 새주인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노예 주제에. 제대로 정리해 놔!"

 

충격에 오그린 것도 잠시, 들려온 발소리에 벌떡 일어나 물건들을 상자에 담았다. 집이 불타기 전 크고 안락했던 방에는 푹신한 침대와 가벼운 합금으로 만든 다양한 모형들, 여러 지식이 담긴 책, 천으로 만든 고양이 솜인형, 아버지께서 갖다주신 나소드 미니어처들이 있었다. 자동차와 나소드를 가지고 놀던 어느 하루는 잠시 한눈을 판 사이 사라진 나소드 정찰병 모형을 찾느라 온 집을 뒤진 적도 있었다. 실수로 제 발에 차인 그것은 하인들의 발길에 이리저리 채이다가 어머니의 침실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아버지께서 처음 주신 것으로 각별한 애정이 있던 것을 잃어버린 아이의 얼굴에는 '찾았습니다.'란 한 마디에 다시 웃음꽃이 피었었다. 어머니는 작은 상자를 하나 가져오셨고, 그 사건 이후 장난감을 가지고 논 다음에는 그 상자에 담아 보관했다. 정리를 하던 손이 차츰 느려졌다. 뺨을 강타한 아픔보단 다른 곳이 더 아픈 것 같았다. 소년의 망막에 바닥에 어질러진 나무토막들이 맺혔다.

 

 

 

**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니까!"

"어, 어, 어!?"

 

'와르르'

 

고귀한 마족씩이나 된다는 녀석들이 하는 짓을 몇 시간째 시큰둥하게 관찰하던 표정이 일순 굳었다. 카드, 인형, 뽀루쿠키, 이외의 여러가지 물건들을 가지고 놀던 마족들은 일정한 크기의 나무토막들로 탑을 쌓다가 무너뜨린 참이었다.

 

"쯧. 사공이 많으니 배가 산으로 가지."

 

핀잔에 가늘게 뜬 실눈이 돌아오자 머쓱해진 당사자는 눈치를 살피며 방으로 들어갔다. 머리를 쓸어올리는 손길에 후회가 묻어있었다. 심통을 부렸다. 이성과 계산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조금 전의 행동은 감정의 폭발 또는 과거에 대한 감상에서 기인한 것 같았다. 그러나 어째서 배가 아픈 것인지 명확하게 규명할 수 없었다. 왜. 나는. 그런. 어린아이 같은 행동을 한 것일까?

 

 

 

'톡'

'톡'

규칙적으로 나무가 나무를 두드리는 소리가 정적을 깬다. 이상하리만치 규칙적이고 균일한 소리는 나무토막을 쥔 손으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가장 좋은 음악은 규칙적이면서도 거슬리지 않아야 한다란 규칙 아래, 아무도 없는 빈 방에서 어린아이였던 어른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스름이 내려앉고 어둠이 지평선을 덮은 한밤중. 방문이 열리고 슬리퍼 끌리는 소리가 거실로 이어진다. 곧이어 얕은 한숨 소리와 함께 마루가 삐걱거렸다. 거실 바닥에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는 나무토막을 줍는 어른의 눈은 심연만큼 깊게 침잠해있었다.

 

"정리란 단어는 아는 건지..."

 

정리를 하길 한참, 모아진 나무토막에 별안간 재밌는 생각이 들었다. 피식, 바람 빠진 듯한 미소를 지으며 커진 손으로 직사각형 모양의 탑을 쌓기 시작했다. 한 개, 두 개, 세 개......... 와르르.

 

"아..."

 

말이란 것은, 대화란 것은, 화자와 청자가 없으면 성립될 수 없는 공식과도 같은 것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뒤이어 혀 끝에 올려진 문장은 더 이상 들어줄 대상이 없었고 해줄 대상 또한 없었다. 그럼에도 쉽사리 내려놓지 못 하고 입술을 달싹이던 어른은 자신만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나지막히 읊조렸다.

 

"보여주려고 쌓은 건데."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해본다. 그러나 어른이 된 어린아이의 동심은 이미 오래 전에 무너져버렸다. 와르르.

 

 

 

 


 

 

위가 첫 도안이었고

아래가 그 결과물이다.

 

 

사용 도구는

pentel graph1000

Ain HB lead

Ain 지우개 가벼운 타입

이다.

 

 

다 그리고 나니 왼쪽 끈을 빼먹은 걸 발견했다.

핸드폰으로 수정할 때 추가해야겠다.

 

난 아직 기억하고 있다. 살랑이는 연녹색 위에 앉아 빛이 만개한 하늘을 바라보며 어머니의 손을 잡고 새근새근 잠이 들던 시절의 기억을. 꽃내음 가득한 봄바람이 어머니와 내 머리칼을 쓰담을 때 어렴풋이 말했었다.


"엄마."

"왜 그러니 아가?"

"전 엄마가 너무 좋아요."


내 가문이 멸족당하고 어머니께서 나를 구하려다 대신 당하셨을 때 나는 도망치고 있었다. 잠에서 깨어나니 집은 불바다였고, 어머니는 더 이상 내 옆에 없었다. 그 뒤로 물건인 것처럼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이용당하고, 버려지고, 표현할 수 없는 꼴을 많이 당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건 슬프지만 내가 당한 꼴을 당하지 않은 것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타임 트레이서가 됐다.


확률은 50%가 조금 넘는 수준. 성공할 거란 확신도 없었고, 그 전에 시공의 독소로 사망할 확률이 더 높았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았고 수 천번, 수 만번의 실패 끝에 내가 태어난 시공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시간대는 어머니가 살아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절망스러웠다. 그렇게 노력해서 겨우 왔는데 어머니는 이미 싸늘한 상태였다. 어째서? 그건 나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다시 시작된 실험은 육신을 더욱 망가뜨렸다. 시공의 독소는 천천히 내부에서 외부를 잠식해가며 살을 파먹고 장기 속으로 침투하다 못해 겉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눈물이 검은색이 된 것은 물론이거니와 비쩍 마른 몸은 더 이상 살이 찌지 않았다. 독소정화제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지만 이마저도 맞지 않으면 시공을 열 수 없었기에 어거지로 목에 주삿바늘을 꽂으며 실험을 연명하고 있었다. 오늘도 그런 수많은 날들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엄마?"



눈 앞에 내 것처럼 새하얀 머리칼을 휘날리는 여인이 없었더라면.



"아가?"



눈 앞에 날 알아보는 어머니가 없었더라면 검은색 눈물이 떨어질 일도 없었겠지.


어머니는 다른 사람들이 흉측하다 부르는 이런 모습마저 사랑해주셨다. 나는 간호를 받았고, 그냥 어쩌다가 갑자기 아프게 된 장성한 도련님 정도가 되었다. 어머니와 살 수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난 행복했다. 집에 화재가 나기 전까진.


누가 불을 질렀는지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 난 모른다. 그저 벗어나고 싶어했던 과거가 다시 반복되는 것에 겁에 질려버렸다.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숲 속으로 도망가셨다. 그런 어머니의 손을 붙잡은 내 손에 힘이 들어간 순간 총성이 울렸다.






"....아가? 아가!"






눈에 보여서 다행이다. 시꺼멓게 변했을지라도 날아오는 은빛 탄환을 붙잡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몸이 기우뚱하며 쓰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팠다. 아팠고, 그저 아팠으나 풀에 피가 번지듯 미소가 번졌다.




"엄마."

"아가...아가 죽으면 안 돼..아가.."

"전 엄마가 너무 좋아요."




그동안 사랑해줘서 고마워요.

나 알아봐줘서 고마워요.

이런 모습의 나도 사랑해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내가 당신 대신 죽을 수 있어서 기뻐요.

엄마.


사랑해요.













불타는 저택에 주인을 잃은 다이너모가 전원이 꺼지기 전 마지막 기록을 파일로 작성한다.


'2016.5.15. 실험 성공.'


저장하기 전에 꺼져버렸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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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8 ~ 데이터의 결말

성가셔...

아트와 통화가 끝나고 한참이 지난 지금도 근육돼지는 내 허리를 껴안고 놔 줄 생각을 안 한다. 덕분에 따뜻하긴 하다만 움직임의 제약이 많아 불편하다.

"루사..."

몆 시간째 이 모양이다. 내가 부르면 금새 자는 척을 하며 더 들러붙는다. 쳇!

"연구에 방해되니 제발 좀 놓지?"
"넌 알고 있었냐? 걔네 둘 사귀는 거."
"인제 눈치챘군."
"이미 알고 있었다만 다들 숨기는 눈치라서. 사트에겐 내가 아는 거 비밀로 해 줘."

건성으로 '그래.'라 대답한 뒤 다시 데이터에 몰두했다. 쏟아지는 숫자들과 수치들. 너희들은 내 물음에 답을 줄 수 있을까?




"분석한 결과 이 세계에는 없는 구조 같다."

저녁을 건성으로 먹으며 아트에게 지금까지 분석한 정보를 전달했다. 사트는 피곤하다며 나오지 않았고 아트는 지쳐보이지만 식물 얘기에 금새 눈을 반짝거린다.

"...결론은 이 세계 생물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는 거다."
"그럼 어떡하죠?"
"다시 나타나지만 않는다면 상관없을 일이다만 어째 그럴 거 같지 않군. 근데 타트는 어디 있지?"

원래 늦게 나오는 녀석인지라 신경 쓰지 않았는데 오늘은 영 안 올 분위기다. 제 형과 다르게 밥은 꼭 챙기는 녀석인데...

"오다보니 문 잠겨 있었어요."

문득 저번 통화가 생각났다. 아주 잠깐이지만 파랗게 변했던 얼굴과 당황한 음성이 좋지 않은 예감을 쿡쿡 찔렀다.

"타트 녀석은 내가 챙길테니 넌 사트에게 가 봐."
"네. 안녕히 주무세요."

어느 정도 회복된 모양이다. 궁금증도 일단락 됐고 아픈 것도 참을만 해진 걸까.

"먼저 일어날게."

루사를 놔두고 음식을 적당히 챙겨 타트의 방으로 향했다. 잠긴 문 너머로 기척이 없다. 문을 부숴야 하나?

'규칙 1조 1항 문 잠그고 들어간 사람을 귀찮게 하지 말 것.'

그래. 단순히 실험이 안 끝난 걸 수도 있겠지. 노크를 한 뒤 문 아래 구멍으로 음식을 밀어넣었다. 이거라도 열려 있으니 다행이다.




그 시각 타트는 디에의 실험실에 있었다. 차원을 이동할 수 있는 오직 둘만이 올 수 있는 그곳엔 기형의 인간이 마족화된 다이너모로 감싸진 채 수면에 빠져 있었다.

"완성했다."

광기인지 집착인지, 복합적인 감정에 사로잡힌 두 눈은 기묘했다.

"어떠냐, 내 작품이?"

타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물끄러미 바라볼 뿐.

"아무 말도 안 하는군. 망가진 것에 대한 연민인가? 크하핫!"

타트의 오른쪽 얼굴이 뒤틀린다. 붉게, 검게, 푸르게, 보랏빛의 각인이 진동하자 눈쌀이 절로 찌푸려진다. 고통스러워하는 타트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디에는 타트의 오른쪽 눈을 뽑아버렸다.

"그 불쾌한 시선도 오늘이 마지막이군. 이제 한 쪽 밖에 없으니 안대 따윈 필요 없겠지?"

디에의 손에서 하늘하늘 흔들리던 안대가 찢어졌다. 지켜봐. 난 반드시 이룰 거니까. 네가 버린 우리의 꿈을 내가! 반드시!! 성공시킬 거니까!!!
 웃으며, 디에는 기형의 인간과 함께 차원의 틈으로 사라졌다. 아무 저항도 않던 타트는 울며 자조했고 그의 검게 물든 눈은 붉은 액체를 뿜어냈다. 그 모습이 가히 위협적이여서 마족이 강림한 것이라 오인할 상황이었다.




Day9~ 새벽
 
'탁 타닥 드르륵'

주인 없는 실험실을 누군가 뒤지고 있다. 앉아있다고 바뀌는 것은 없기에 소년은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그러기를 몇 시간째. 드디어 원하는 것을 찾은 듯 거친 숨을 몰아쉬며 흐릿한 시선으로 자신의 손목을 보았다.

"좌표설정."

위험한 여행의 시작이었다.




Day 10~ 방심하지 마

오늘도 연구실은 평화로웠다. 시끄러운 것보단 낫지만, 따분하다.

"루사한테나 가볼까..."

...

...

...


그래. 이 몸이 친히 방문해볼까?

그러나 계획은 실현되지 못 했다. 방을 나서려 일어선 순간 그 녀석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마마, 위험해!"
"대낮부터 무슨..."

헛소리냐고 쏘아붙이려 했다. 이어진 강력한 소음만 아니었다면.

'우당탕탕탕!'

건물이 흔들리고 가루가 떨어진다. 간간히 돌조각이 떨어지는 게 보였고 나를 감싼 루사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안 다쳤어?"

피투성이가 된 채 묻는다. 내 몫까지 받아낸 모양이다. 다행히 건물이 붕괴되진 않아서 조심스레 구급상자 쪽으로 갔다.

"...읏..."
"엄살 부리지 마."

신음하는 녀석을 봐주곤 구급상자를 들고 복도로 나왔다. 부디 무사해야 할 텐데..!

"아트!"

이쪽은 상황이 더 안 좋아보였다. 직격탄을 맞은 듯 이곳저곳이 붕괴되어 있었고 벽에 구멍도 나 있었다.

"사트는 어디 있어?"

아트를 짓누른 돌을 들어올리며 루사가 물었다. 다행히 몸은 괜찮아 보였다. 부러졌을 순 있겠지만 절단할 일은 없을 것 같다.

"...밖으로......"
"여긴 내가 맞지. 필요하면 엄호하겠다."

혼절한 아트에게 응급처치를 하니 루사가 제 동생을 데리고 돌아온다. 이미 혼절한 상태. 충격을 그대로 받은 건지 상태가 말이 아니다.

"찾다가 다친 거냐."
"살릴 수 있나?"

감아준 붕대 위로 흐르는 피에 낮게 빛나는 눈빛이 짐승의 것과 닮았다. 어떤 놈이든 가만두지 않겠단 눈빛에 등골이 서늘하다.

"가만두지 않을 거다."

이 가는 소리가 들린다.

"절대 가만두지..."
"굿 데이 투 다이."

응급처치를 끝낸 난 싱긋 웃으며 최후판결을 내렸다.

"다이너모, 전투 모드로!"



**



"크하하학!"

마을 집 서너개를 한 번에 날린 존재가 뒤를 돌아본다.

"부숴버려!"

한 마디, 한 마디에 터전이 날아가고 삶이 사라진다.

"신나. 너무 신나!"

누군가의 즐거움은 타인의 악몽을 자아냈고, 그 악몽으로 빚어진 미소는.






"팬저 버스터!"



비명소리로 물든다.

"지금 뭐 하는 거지?"
"네 녀석들..."
"정신 차려! 왜 그러는 거야?"
"......크하하핫! 몰라서 묻는 거냐? 네놈들이 원하던 강력한 힘. 내가 손에 넣은 이 힘을 보라고? 어때? 멋지지 않나?"
"그래서 마을을 쑥대밭을 만들고 있는 거냐!"
"흥. 너희들이 원하던 게 이런 거 아니었나?"
"제정신이냐!?"

웃는 미소가 루시퍼처럼 황홀하다.

"이제 날 막을 수 있는 건 없어! 전부 내 손에 넣어 더 강해지겠다. 협조할 생각이 없다면 비켜서라."
"그렇게 둘 것 같아?"
"아포칼립스!"

강력한 전파장이 진동한다. 빛, 전기, 먼지. 자욱한 연기 속에서 나타난 건 승리가 아닌 잃어버렸던 소중함.

"너...넌!"

정확하겐.

잃어버렸다 '되찾았다'고 생각한 소중함이었다.
 

Day4 ~ 소문을 타고

"사트 뭐해?"
"훈련."

역시나 그 형에 그 동생이다. 형이 더 능글맞긴 하지만 훈련 중엔 둘 다 단호박이다.

"오늘 아침에 재밌는 걸 봐서...혹시 네 형이랑 마마형이랑 사겨?"

들던 역기를 놓칠 뻔 했다.

"ㅁ...뭐? 형이?"
"요즘 계속 붙어다니잖아. 마마형이 연구자료 같은 거 들고 루사형 방으로도 들어가던 걸? 나올 땐 콧노래까지 부르던데?"
"헤? 마마형이?"

역기를 들다가 마마형을 죽이면 죽였지 사귄다고?

"아트는 알아?"
"마마형을 그대로 빼다 박은 아트님이 아시면 그 자리에서 코코아를 뿜을 걸?"
 

"크핫!"
"내 말이 맞지?"

뜨거운 코코아를 어쩌지 못하고 캑캑거리는 아트를 두고 두 트레이서는 이 사건을 그대로 조망하기로 했다.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건진 모르겠으나 전말보단 결말이 더 궁금했다. 아트만이 시체라도 본마냥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Day5 ~ 여름에

볕 좋은 여름날이다. 아지트 옥상의 습한 바람과 작열하는 햇빛에 오후가 하품한다. 늘어지게 자고 싶다.

"형, 여기서 뭐해? 한참 찾았잖아."
"무슨 일이지?"

못 들을거라도 들은 표정이 됐다.

"형, 요즘 너무 마마형 같아."
"그래?"
"밥 먹고 바로 방에 가는 것도 그렇고, 방에만 처박혀있는 것도 그렇고, 옥상에 혼자 있는 것도 그렇고, 둘이 몸만 바뀐 거 같아."
"......그래서 용건은?"
"지금처럼 용건만 따지는 것도 그렇고."
"할 말 없음 내려가지?"
"혹시 바다 갈래? 애들이랑 형들이랑 다같이 가기로 했는데 형만 못 찾아서..."
"마마도 가나?"
"...응..."
"언제 출발하지?"
"2시간 후."
"바쁘군."

걸음걸이, 옷차림, 성격까지 전부 마마를 닮아가는 루사를 보며 사트는 속으로 한숨을 내셨다. 아트 성격이 왜 그런지 이해가 된다.

 

"아트 안에 있어?"

대답도 하기 전에 문부터 열고 들어오는 들뜬 모습에 아트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연구해야 한다고, 같이 가자고 할 땐 내내 거절하더니 사트가 물으니까 바로 수락한다. 속 좁아보이긴 싫어 내색은 안 했지만 섭섭한 마음만은 어쩔 수 없었다.

"아직이네?"

가방까지 들고 와선 완성도 120%의 피서지 코스프레를 선보인다.

"...내가 가잘 때는 콧방귀도 안 뀌더니..."

작게 중얼거렸는데 그걸 들었나보다.

"아트, 삐졌어?"

사랑에 빠진 형의 모습은 이런건가? 아직도 받아들이지 못한 열애설에 점점 루사를 닮아가는 마마가 버거웠다. 그러나 생전 없던 애교를 부린다거나 장난을 치는 게 싫지만은 않았다.

"다음 번엔 나랑만 가자."
"...그래."

대답이 늦다. 입을 비죽 내민 채 툴툴거리니 형이 더 꼬옥 안아준다.

"내가 어떻게든 가줄테니까 화내지 마. 응?"
"형! 남자끼리 이러지 마!"
"남자 이전에 내 사랑하는 동생이다만?"

이건 루사형이 사트가 삐졌을 때 하는 건데... 사트는 엄청 싫어하는 것 같지만 난......싫지만은 않다.

"거짓말 한 거면 다신 안 볼 거야."

그래, 그래. 라며 어떻게든 가겠다고 하니 마음이 좀 풀어진다. 거짓말이라고 해도, 기분은 좋다.

"근데...짐마저 싸게 좀 놔주면 안 될까?"




"바다다-!"

그 형에 그 동생이다. 저 새파란 끝도 안 보이는 망망대해가 뭐가 좋다고 저러는지 모르겠다. 물론, 이건 나와 루사만, 정확하겐 나만 아는 사실일 거다. 다른 이들 눈엔 정반대로 생긴 청소년과 어른 한 명이 바다를 보고 신났다 정도로 보이겠지.

"형이 저렇게 바다를 좋아했구나."

옆에서 멍해진 아트가 짧은 감상을 읊었다.

"바다가 싫어서 거절한 게 아니구나..."
"그건 아닐거다."
"응?"
"바다가 싫어서일 거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바다가 아니라 물을 싫어하거든. 물가, 바닷가, 냇가, 종류 상관없이 싫어할 거다."
"루사형은 마마형 어린시절을 알아요?"
"......안다기 보단 짐작가는 게 있을 뿐이야."

너무 단정적으로 말했나. 그렇게 의심하는 눈으로 보면 내가 미안하잖아. 뭐라고 해명이라도 해야 할 거 같아 말을 고르는데 저멀리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린다.

"아트-, 바다 보고 싶다며-, 왜 거기 서 있어-?"
"가-!"
"기회는 왔을 때 잡아야지-!"

튜브를 끼고 잘도 논다. 내 얼굴로 저런 표정도 지을 수 있던가. 참으로 해맑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 봐. 저 말은 맞는 말이니까."

우두커니 앉아 하늘과 이어진 망망대해를 본다. 그 날도 이런 날이었다. 더없이 해 맑고 밝은 날이었다.

"난 신경쓰지 말고. 가서 형이랑 놀아."

뭐가 찜찜한건지 한참을 내 얼굴만 들여다보던 아트는 말없이 튜브를 들고 바다로 돌진했다. 사트, 아트, 타트, 마마가 된 루사 그리고 반강제로 입수당한 디에까지. 다섯 사람이 노는 걸 보며 잠시 과거로 생각의 좌표를 설정했다.




"우와--, 바-다-다-!"
"우리 아들 좋아?"
"응응! 좋아. 바다 넓어! 완전 커!"

처음 본 바다는 눈이 부셨다. 탁하면서 짙푸른 푸름이 연한 하늘과 이어져 바다와 하늘이 같은 곳은 아닐까란 생각을 했었다. 빛은 다소 바랬지만 그 말을 듣고 웃으셨던 어머니가 여전히 선명하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다로 들어간 나는 파도를 타고 제법 멀리까지 나갔다. 집체만한 파도가 몰려온 건 그 때였다.

"꺄아악!"

누구의 목소린지 분간할 수 없는 비명이 모래를 요동치게 하고 난 그대로 파도 밑으로 가라앉았다. 몸에 끼고 있던 튜브는 어디로 갔는지 잡히지 않았다. 이대로 물 속에서 죽는구나 싶을 때 누군가가 내 팔을 잡아당겼고 난 의식을 잃었다.

"ㅁ...마마야, 정신이 드니?"

눈을 뜬 이후의 일은 기억하기 싫을 만큼 끔찍했다. 날 때부터 체온이 낮았던 어머니는 내가 올라오지 않자 만삭의 몸으로 바다에 뛰어들었고 간신히 날 데려오는데 성공했지만 그대로 임시보건소에서 쓰러지셨다. 직원들이 응급처치를 했으나 이미 새파랗다 못해 보랏빛으로 물든 입술은 다시 생기를 띠지 못했다. 아버지는 병윈에서 눈을 뜨자마자 엄마부터 찾던 아들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주시곤 어디론가 가셨다. 기력을 회복하고 처음 본 어머니의 웃는 얼굴은 사진 속에 담겨 그 날의 하늘처럼 선명하게 빛났다. 그리고 나와 닮은, 그러나 어머니를 생각나게 하는 외모의 아주 작은 갓난쟁이를 만났다.

"이 아이는 아크 트레이서, 네 동생이다."

그게 내 어머니와의 마지막 만남이자 동생과의 첫 만남이었다.




"앗 차거!"

홀딱 젖자 좌표가 원점으로 돌아온다. 짠내가 코를 찌르고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간간히 비웃음 같은 놀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다 한순간 조용해진다. 다른 형태의 짠내가 코를 찌른다.

"......루사, 울어?"

내가...울고 있는 건가...? 고개를 숙인채  헛웃음을 삼키는데 일부가 그만 새나가고 말았다.

"루사 옆엔 내가 있을게."

모래 쓸리는 소리가 처참할 정도로 날카롭게 심장에 박힌다. 어머니도 이랬을까? 내가 파도에 삼켜져 나오지 않을 때, 어머니도 파도 치는 소리가 심장에 박혔을까?

"마마."
"...시...끄러."

주는 호의마저 뿌리칠 정도로 아팠다. 말없이 어깨를 내어주는 온기에 악문 잇사이로 신음이 새어나가 귓 속 모래를 긁는다. 그래. 난 아팠었고, 아팠고, 아프다.

내 흐느낌이 계속 되는 동안 사람의 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우리 외엔 사람 하나 없던 해변은 이질적인 존재는 나 하나뿐인 양 파도치는 소리, 바람 부는 소리, 간헐적인 갈매기 울음소리만이 가득했다.

"괜찮나?
"...흐끅..."
"가끔은, 울어버리는 게 낫지."
"...잘난..흐끅...하지 마."
"핀잔 주는 걸 보니 돌아왔군."

어깨가 푹 젖었다. 그럼에도 불평 한 마디 없이 옆에 있어줬다.

"...왜 말 안 했어? 우는 거 싫어하잖아."
"이럴 땐 고맙다고 하는 거다."
"...미안해."
"미안하면 애들이랑 나랑 바다서 놀자."
"그건......."
"아, 이것도 못 해주냐?"

짐짓 못 말린단 얼굴로 으름장을 놓는다. 그게 루사 같아서 난 웃어버렸다. 그제야 고요하던 해변가에 안도의 숨소리가 들리고 루사의 얼굴에도 웃음이 피었다.

그 날, 난 16년만에 바다에서 재밌는 시간을 보냈다.





 난 우는 것을 싫어한다. 남이 우는 것도 싫지만 내가 우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마마가 그렇게 서럽게 울었을 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여전히 귓가에 쟁쟁한 내 울음소리에 난 자연스레 기억하고 말았다. 오래전에 삭제한, 정확하겐, 삭제하려고 부단히 노력한 기억이...

"엄마...엄마, 가지 마..."


아버지는, 그 사람은 전혀 좋은 사람이 못 됐다. 어릴 적 나는 힘 없는 나약한 어린아이일 뿐 아버지에게 학대 당하는 어머니를 구할 힘따위 없었다. 그러나 의지만은 있었기에 하루는,

"엄마 때리지 마요!"

그 후론 나도 같이 맞았다. 덕분에 엄마를 보호하는 데 거리낌이 없어졌지만 번번히 내 몫의 폭력 또한 어머니가 감당해야 했다. 어머니의 등은 피멍과 상처로 검붉게 아로새겨졌다. 마치 원래 피부색이 그러하듯이.

"...앞으론 끼어들지 말고 숨어 있어."

아버지가 던진 화병의 파편에 맞아 찢기고 부어오른 상처를 보며 어머니가 하신 말씀은 그러했다. 숨어있으라고. 눈에 띄지 말라고.

"어린 놈의 자식이 벌써부터 외박이야!"

오늘도 술을 먹고 들어온 아버지가 난동을 부리고 어머니의 송곳같은 비명이 귀를 찌르다, 돌연 잠잠해졌다. 아버지가 갔을 새벽 난 걸어잠근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어머니는 마룻바닥에 엎드려 계셨다.

"엄마, 일어나 봐. 약 발라야 돼."

어머니의 팔이 마룻바닥만큼 차갑다. 바닥에 흥건한 피가 푸르게 변색될 동안 난 어머니가 시킨 대로 숨어 있었다. 눈에 띄지 않게. 흐르는 눈물이 마룻바닥에서 차게 식는 걸 보며 다짐했다. 그 새벽이 내가 운 처음이자 마지막 날이 될 거라고.

"여보세요?"

동이 트자 경찰에 전화했다. 여기 사체가 있으니 장례 좀 치뤄달라고. 그것이 내가 막을 수도 있었던 비극의 주인공에게 발라준 마지막 약이었다.




탁.

손가락끼리 부딪히는 마찰음에 고개를 든다. 나, 아니 마마가 서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해?"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거짓말 하지 말랬지?"

마마는 그 날 바닷가에서 내 어깨에 다 쏟아버린 후 괜찮아졌나보다. 덕분에 난 슬럼프에 빠졌지만.

"가끔은 울어버리는 게 낫지."

저 녀석, 기억하고 있었나?

옆에 턱 앉아 자기 어깨를 탁탁 두드리는 폼이 선심쓰는 것 같다. 내 얼굴로 그런 표정 짓지 말라고.

"미안하지만 난 마스터마인드라고. 얼굴만 너란 걸 기억해주면 좋겠군."
"...내 얼굴로 울어놓고 잘도 말한다."
"내 얼굴로 튜브 끼고 잘도 놀더군. 여하튼,"
"여하튼?"

얼굴이 새빨개져선 우물거리는 표정으로 머뭇거린다. 고맙단 말이 그렇게 힘드냐... 아주 작게 '고마워.' 한 마디를 더듬거리더니 이내 귀까지 푹 익어버린 마마가 벌떡 일어났다.

"어깨 필요없으면 가..간다!!"

어딜 도망가!

"야, 이건 좀!?"
"난 어깨보다 등이 좋다-."
"어이 잠..잠깐만! 지금은 내 등이다만?"
"원래는 내 등이었다. 내 등이 이렇게 포근하구나. 그래서 네가 맨날 내 등에 기대 데이터를 본 거군?"
"......"
"몸 바뀌기 전에 나도 만끽해야겠다-."

난 농담으로 던진 말인데 어깨 너머로 당황한 얼굴이 보인다. 그게 마마 같아서, 안심이 됐다.

"...뭐라고 했어?"

다행이라고. 괜찮은 거 같아서.




Day6 ~ 전야제

이상하다. 보통 서너시간이면 더 이상 몬스터가 보이지 않는데 올해는 어디선가 끈임없이 나온다.

"다이너모 히트 디텍팅(heat detecting)"

1km 전방에 엄청난 열기가 감지됐다. 만에 하나 마계의 포털이 열린 것이라면 저곳이 근원지리라.

"1km 전방에 고에너지가 감지됐어."
"진원지는 그곳인가?"
"가보면 알겠지."

왼쪽에서 튀어나온 머쉬룸앤트를 썰어버리면서 루사가 씹어뱉었다. 자꾸 튀어나오는 몬스터들이 어지간히 거슬리나 보다. 앞에선 잡몬들이 잔뜩 몰려온다.

"나한테 맞겨. 다이너모 구성모드!"
 
사이드에서 써도 되지만 몬스터들의 중심에서라면 그 효과는 몇십배로 증폭된다.

"사이오닉 제너레이터!"

몬스터들의 유혈을 흩뿌리며 붉게 물든 길을 나아간다. 100m 안으로 들어온 근원지. 저곳만 격파하면 우승은 우리 것이다.




준비는 끝났다.
루사의 몸이 된지도 약 1년이 되간다. 우리의 역할 바꾸기는 얼마 지속되지 않았다. 바뀐 상태가 오래 지속되자 우린 어쩌면 이대로 평생 살아야 할 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고 서로의 몸을 서로의 스타일대로 어느정도까진 개조하기로 합의했다.

"루..아직도 운동 중이야?"
"원래 마지막에 적당히 해주는 게 좋아. 더구나 넌 근육이 전혀 없다고."
"설마 나도 너처럼 우락부락해지는 거냐?"
"그럴려고 해도 불가능 해. 근육이 만들어지지 않는 체질이야. 속근육만 키우고 있으니 걱정마."
"그게 좋은...거라고 해두지."
"나가자."

땀에 젖은 내 얼굴이 낯설다. 다이너모는 겉모습을 바꾸어 서로의 것을 쓰고 있다. 루사의 것은 투박하지만 확실히 강한 맛이 있었고, 내 다이너모는 유려해서 자유자재로 변환이 가능하다. 내가 루사 걸 쓰는 건 어렵진 않지만 재미가 없었고, 루사는 내 것이 지나치게 복잡하다고 했다. 그래서 두달 반 정도 이어진 서로의 연구를 대신해주는 것은 종료됐다. 대신 식사시간에 철야를 선언하고 방문을 걸어잠근 뒤 몰래 서로의 방에 잠입하여 연구를 계속했다.

"올해는 2인조인가?"
"응."
"그나마 다행이군."
"그렇지."

내일은 우리들이 좋아하는 날이다. 우리들은 1년에 두 번 모든 연구실을 비운다. 한 번은 여름으로 휴식을 위해서고, 다른 한 번은 가을과 겨울의 중간으로 서로의 연구성과를 겨루기 위한 시합이 이뤄진다.

'삐비비빅 삐비비빅'

다들 준비된 모양이다.

"푹 젖었군. 오늘같은 날은 사랑 좀 안 하면 안 되냐?"

디에의 비아냥같은 놀림에 폭소한 사트와 못 말린다는 얼굴의 타트와 불편한 기색의 아트가 보인다. 아트야, 그리 보지 마라...

"아트, 형을 그렇게 노려보면 쓰냐-!"
"크학!"

미안하다. 형이 지켜주고 싶다만 지금은 끼기가 애매하구나.

"이제 그만 시작하지."

우린 총 3팀으로 나뉘어 출발했다. 나와 루사, 사트와 타트, 디에와 아트였다. 디에가 왜 아트랑 붙은 건진 알 수 없으나 수확이 있으니 저럴거란 생각이 든다만...찜찜하다.

'까악 까악 까악'

나소드 까마귀가 시합의 시작을 알렸다.

"자, 어디 한 번 가볼까?"

사냥 개시다!




뭐 이런 미친 괴물이 있나!

살다살다 저런 건 처음 보겠다. 사냥이 시작된 직후 먼저 가라던 디에 형은 어딜 갔는지 안 보인다. 결론적으론,

나 혼자 미친 사람처럼 싸우고 있단 거다!

"드론 액티베이터. 러싱드론."

단거리 공격은 거의 불가능한 저것의 형태를 뭐라 해야 하나. 삼 층으로 이뤄진 탑 같은 형탠데 층별로 플랜트 오버로드처럼 촉수가 있고 촉수 밑엔 길고 짧은 가시들이 진동하고 있다. 층의 회전방향은 서로 반대이며 빙글빙글 돌면서 촉수가 미친듯이 주변 물건을 집어삼킨다.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무참히 부서지고 융해되고 흡수되었다.

마족 중에 저런 것도 있던가?

새로운 샘플이 나타난 건 좋다만 혼자서 상대하긴 벅차다. 팬저버스터까진 앞으로 15초 그동안 드론으로 어떻게든...

"젠장!"

1층 가시에 걸리고 말았다. 정확하겐 여러개로 나뉘어있던 가시들이 길고 두꺼운 하나의 가시로 변해 내 발목을 관통했다. 촉수들을 피하느라 눈치채지 못 했다. 통증도 통증이지만 움직임이 봉쇄돼 날아오는 촉수를 피하지 못 하는 게 더 큰 문제다.

"이렇게...끝낼 수는..."
"팬저버스터!"

디에형인가. 촉수가 몸을 휘감아 목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뜨겁다. 피부가 녹아내리는, 산을 뒤집어 쓴 듯한 느낌.

"아트! 정신차려!"
"마마 위험해-!"
".........루사-!"




정신을 차리니 회색빛 공간에 누워있었다. 불한증막처럼 덥다. 아니 그냥 불 속에 앉아 있다가 맞으려나.

여기가 어딘지 알아보려고 했으나 음울한 회색만이 시야를 매꿨다.

"들어왔군. 마마는 아직인가?"
"...디..에..."
"그래. 생각보다 오래 버텨서 놀랐다. 뜨겁나?"

난 대답하지 않았다. 당연한 걸 왜 묻는 거냐.

"좀만 참아. 곧 끝날테니."
"언...제?"
"5분 안에."

다른 애들은 어떻게 된 거지? 사트는? 타트는? 개들도 당했나? 마지막에 달려온 사람들은 누구지?

"궁금한 게 많겠군. 열기가 아닌 열기 너머의 것을 느껴라. 뭐가 있지?"

온 감각을 집중했다. 뜨거운 온기 너머로 생명력이 느껴졌다. 새들과 금속의 매끄러움, 숨 쉬는 나무들. 이상하다. 분명 몬스터가 다 부셨을 텐데? 잠깐. 이런 거 어디서 본 적 있다.

"크큭, 크크큭!"

플랜트 타워 에너지 뱅크.

"루사, 네가 제일 빨리 당했다."

원령들이 뭉쳐 만들어진 살아 움직이는 생명력의 원천. 요절한 자들이 깃들어 주변의 모든 생명을 빼앗는 악의의 결정체.

"우리 츤데레 공주님은 언제까지 버티실지 볼까?"

시야가 맑아진다. 흐릿하던 것이 형체를 찾는다. 여전히 몸은 굳어 있었지만 간신히 고개는 돌릴 수 있었다.
 무기력한 사트와 타트가 보였다. 사트는 늘어진 채 위를 보고 있었고 손을 쥐락펴락 하는 타트의 일그러진 옆얼굴이 보였다.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피투성이인 루사형이 보인다.

"오-."
 
디에형의 탄성과 함께 공간이 흔들렸다. 흔들리는 찰나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몸을 내리누르는 압력은 이 괴물이 만들어낸 것인가?

"크윽...네 녀석!!"
"사랑싸움은 단둘이 하라니까."
"디에. 이게 무슨 짓이지?"
"그래도 날 알아차리는 건 마마 뿐이군. 그 능력은 인정해주지. 그러나 루사 위에 있으면 매력지수가 반감된다고."
"너!"
"힘빼지 마라."

하고 많은 데 중에 왜 루사 형 위로 떨어진 거야!
형! 진짜 사귀는 거야?

"후후후 실험 개시다!"

주변이 하얘졌다.




Day7~  Happy Halloween

눈을 떠보니 방 안이었다. 몸을 일으킬랬으나 온몸이 짓눌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햇살이 내리비치는 오후인가. 아트랑 타트는 어떻게 됐을까? 사냥을 하다가 디에 형이 재밌는 몬스터가 있다고 꼬드겼고 따라갔다가 당했다. 그 몬스터는 충분히 강했다. 이전까지 본 적 없는 독특한 형태의 에너지 코어. 내 육체에 저 기술을 접목한다면 난 형보다 강해질 수 있을까? 더 생각하고 싶지만 내리누르는 눈꺼풀이 무겁다. 조금만...더 자고 생각하자...

형이, 루사형이 형을 안았다. 진짜 사귀는 걸까? 어둠 속을 헤매면서도 여전히 두 사람의 관계가 궁금했다. 어째서. 어째서? 부유물처럼 암흑을 떠다닌다. 이 어두운 곳을 나가면 꼭 물어보겠어.



"역시 일어나 있었군."
"하나 물어보지."
"대답은 바라지 마."
"넌 알고 있었나? 우리가 바뀐 것."
"크훕!"
"비웃지 마라. 입 찢어질라."
"공주님이 그런 저렴한 단어를 쓰면 안 되지."
"공주님이라고 하지 마!! 목적이 뭐냐?"
"흠, 글쎄? 색다른 할로윈?"
"장난치지 마!"
"왜 네 마음대로 장난이라 규정하지? 난 충분히 진지한데?"

방 안이 사악한 웃음소리로 물들고 유일한 목격자의 얼굴이 소리에 따라 검게 물들어갔다. 살기는 보랏빛을 띄며 짙어져갔다.

"걱정 마라. 애들은 다 깨어날 거야. 요즘 다들 철야길래 수면시간을 확보해주려던 것 뿐이라고. 그리고,"

방문을 열며 디에가 상큼하게 말했다.

"이럴 땐 고맙다고 하는 거야 공주님."


"젠장."

방문이 닫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루사가 깨어났다. 다크서클이 턱 밑까지 내려올 기세였으나 내가 더 심했나보다.

"이럴 때라도 쉬면 안 되냐?"
"시끄러."
"합법적으로 자게 해준 거라잖아?"
"듣고 있었어? 근데 왜 가만히 있었어?"
"말해 무엇하나. 한 두 번도 아니고."

디에는 악명 높았다. 이곳에서는 침대 하나만 딸랑 있는 작은 방만을 쓰며 그의 실험실을 본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몇 일씩 행방불명 됐다가 가끔씩 이곳에 오곤 했다. 여름과 몇일 전 있었던 전야제. 그 때가 아닌 다른 시기에 그가 아침을 먹으러 온다거나 건물 어딘가에 앉아 있다던가 한다면 그것은 기막힌 악운이었다. 왜냐하면 걸리는 사람은 그의 실험대상처럼 되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다들 예전보다 강해졌고 그가 지키는 길목을 알기에 피해다니지만 그는 막내인 애드를 7일 만에 안대를 찬 소년으로 만들어왔다. 새 이름을 원한 그를 우리는 타임 트레이서, 타트라고 불렀다.

"한동안 조용하더니 우리 모두를 실험대상으로 쓸 줄이야. 이래서 맹수가 조용하면 더 경계해야 하는 건데..."

손이 내 손을 잡았다. 온기가 느껴졌다.

"그 때 왜 나 대신 맞은 거지?"
"네가 먼저 가면 디에가 널 약한 공주님이라 했을 테니까."
"그건 살았으니 하는 말이고. 죽을 수도 있었어. 왜 그랬어?"

더 다그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가 꽉 껴안는 바람에 사고가 마비됐다. 버둥거렸으나 이 상태에서도 루사는 나보다 셌다. 근육돼지.

"고마워."
"밑도 끝도 없군."
"살아줘서."
"......나도."

안겨 있어서 못 보는 너의 얼굴엔 미소가 피었을까?

"근데 뭐 이상한 거 못 느끼나?"
"음?"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웃는 거 같으면서 우는 듯한 표정이 됐다.

"디에가 고마워하라더군."

루사는 작게 뇌까렸다.

미친놈.




"허리가 쑤셔...아트, 파스 좀 붙여쥐."
"밥 먹고 하면 안 되냐."
"아앙~ 지금 해 줘~ 아프단 말야~"

아침부터 우는 소리를 하는 사트에게 꿀밤을 먹이고 싶었지만 저를 어미 잃은 새끼 짐승처럼 올려보는 얼굴에 아트는 한숨만 내셨다.

'달칵'

샐러드를 한 두 입 먹더니 포크를 그대로 싱크대에 투척한다. 먹던 샐러드를 랩으로 싸곤 냉장고에 넣은 뒤 부엌을 나간다. 루사처럼 서글서글 하던 마마형이 갑자기 원상태로 돌아온 것에 사트와 아트는 어리둥절했다. 유일하게 루사와 타트는 덤덤했다. 뭔가 바뀐 분위기에 제자리를 찾은 것 같으면서도 느껴지는 이질감에 동생들은 얼굴만 마주볼 뿐이었다.

"비켜봐."

마마가 나가고 퍼뜩 정신을 차린 아트는 칭얼거리는 사트를 무시하고 부엌을 나갔다.

"형!"

헐떡거리며 붙잡는 동생을 의아하게 보며 마마는 다음 말을 기다렸다. 머리가 살짝 헝크러져 있다.

"무슨 일이지?"
"형 괜찮아?"
"뭐가?"
"그냥...전야제 이후로 괜찮나 해서. 거의 안 쉰 거 같던데."

마마는 생각했다. 자신의 동생이 진짜 묻고 싶은 건 저게 아닐 거다.

"내가 요즘 너무 서글서글하게 지냈단 생각이 들어서. 그러니까 그깟 괴물 하나 처리 못 하고 당한 거겠지. 그렇지?"
"형?"
"걱정 마라. 앞으론 그런 일 없을 테니."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돌아서려는데 아트의 다급한 물음이 발목을 잡는다.

"루사형이랑 무슨 사이야?"

흠...이번엔 시간이 좀 걸렸다. 호감이 있다 그러기엔 확실치 않았고 싫어한다고 하는 건 맞지 않았다. 단순한 라이벌의 공기는 모호한 흐름으로 변질된 지 오래였다. 근데 아트 표정이 애매하다.

"아트. 내 사랑하는 동생아."
"응?"
"질투하니?"
"응?!?"
"나와 루사가 무슨 사인지 왜 궁금하니?"
"그야 애들이 형이랑 루사형이랑 그렇고 그렇다고!"

아트는 마마의 검지 손가락에 입술이 눌려 더 말하지 못 했다. 마마는 붉게 물든 아트가 귀여웠다. 귀는 아직 정상이라 마음에 안 들지만.

"이런. 내 동생이 질투를 할 줄은 몰랐군."
"아, 아니야 그런거!"

그래, 조금만 더.

"질투에 명약이 있긴 한데......내가... 이뻐해줄까?"

조금만 더.

마마는 귀까지 새빨개진 아트의 흘러내린 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었다. 머리를 정돈해주는 손길에 애정이 깃들어 있다.

"넌 머리 정리 잘 해야 해. 사트가 덮칠라."

마마는 무어라 항의하는 동생에게 상큼한 음성으로 쐐기를 박았다.

"루사 질투하지 마. 형 넘버원은 항상 너니까."

그렇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귀까지 새빨개진 아트를 보며 마마는 입술을 깨물었다. 저 눈치 빠른 녀석이 알아채면 안 되니까. 서둘러 방으로 돌아온 마마는 방문을 잠그고 자지러졌다.




"아트 어디 아파?"

부엌으로 돌아오니 루사형도 없었다. 타트는 피곤한 얼굴로 사트의 등에 파스를 붙여주고 있었다.

"미안. 못 기다리겠어서."
"상관 없어. 고마워 타트."
"..."

머리를 살짝 끄덕인 타트는 파스와 식사의 잔해를 처리하곤 방으로 돌아갔다.

"오늘 형들 좀 이상해."

아트는 아까 있었던 일을 회상하느라 사트가 하는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형들이 괴물한테 먹히더니 원상복귀 됐나 봐."

이에 사트의 얼굴에 사악한 미소가 스치는 걸 보지 못 했다.

'쪽!'

불시에 당한 볼키스에 아트는 멍하게 자극원을 바라봤다. 위험하단 걸 눈치챘으나 이미 늦었다.

"아트야~"

그 뒤는 상상력에 맞기겠다.




디에는 차원의 틈에 개설한 제 실험실에서 모든 열쇠를 틀어쥔 자답게 여유로운 모습으로 책상에 남겨진 편지를 읽고 있었다.

'내 부탁 들어줘서 고마워. 플랜트 뱅크 실험 성공했길 바래. 아니면 누구 덕분에 아까운 자원이 낭비된 거니까. 남은 실험도 성공해서 목적을 달성하면 날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언제가 될 진 모르겠지만.'

끝까지 제멋대로군.

디에는 썩어버린 마음으로 미소 지으며 마마로부터 걸려오는 화상전화를 깨끗이 무시했다. 지하실로 향하는 문을 닫자 더 이상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마 저 녀석도 끈질기군. 다른 녀석은 별 말 없는데 유달리 늘어진단 말이야.

다음에 만나면 어떤 장난으로 입막음을 할 지 궁리하며 전신을 스캔했다. 두터운 철문이 열리고 퀴퀴한, 그러나 상쾌한 실험실 특유의 냄새가 났다.

"안녕? 오늘은 컨디션이 좋네?"

친근하게 부르는 검은 자위가 빛났다. 진득한 녹색 액체가 간간히 기포로 흐트러진다. 워터캡슐 안의 실험체는 연구자의 목소리를 못 듣는 건지 미동조차 없었다. 장착된 산소호흡기만이 간간히 기포를 배출하며 그가 살아있음을 알렸다.

"대부분의 강력한 에너지 동력원은 결국 다른 생물의 생명력을 에너지로 전환시키는 류지. 매개체는 생명력. 즉 다른 생물이 없으면 그건 오합지졸만 못 해. 하지만 플랜트 뱅크는...크하핫!"

모든 걸 흡수하는 검은자위는 새까만 어둠으로 물들어 꿈틀대는 세포 덩어리를 보았다.

"밤새 분석한 결과 이 녀석은 여태 내가 찾아낸 살아있는 동력원들과는 다르단 걸 깨달았어. 다른 것들은 흡수한 생명력만큼의 파워만 쓸 수 있지만 이건 아니야. 흡수한 것보다 강한, 전혀 흡수하지 않아도 강력한 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어! 마침내 그 비밀을 알아냈다고! 우린 더 강해질 수 있어!"

더 이상 약물따위 필요 없을 거야. 무한한 에너지만 있다면 차원을 이동할 때마다 몸이 부식되지도 않을 거고 어쩌면 이미 부식된 부분도 되돌릴 수 있을 거야!

이어진 뒷말은 사악한 웃음소리에 파묻혔다. 그 웃음이 처량하게 들린 건 기분 탓일까?

"크킄, 크크큭, 크하하핫!"

미친듯한 웃음소리를 배경으로 실험이 시작됐다. 잔해. 저 캡슐 안에 든 것은 온전치 못 하다. 그렇기에 살려두려면 지속적으로 매개체를 공급해야 하고 마침내 찾아낸 최적의 생명체를 디에는 주입했다. 풍족하게 얻어낸 샘플로 임상실험은 끝난 상태. 이제 이식하여 결과를 지켜보는 것만 남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하고 디에는 기지개를 켰다. 간헐적으로 움찔거리는 실험체를 그는 흥미롭단 듯이 노려봤다. 새까만 눈자위가 실험중이라 그런지 이성적이다.

"어디 얼마나 강해지는지 보자꾸나. 날 실망시키지 않으리라 믿는다."

비틀린 비웃음은 어딜 향해 가는 것일까?

"애드."




"망할 녀석..."

끝까지 자신의 화상전화를 씹는 디에에게 욕을 퍼부으며 마마는 타트와 통화를 시도했다.

"마마형, 무슨 일이세요?"
"네 형 어딨냐?"

화면은 보지도 않으며 마마가 쏘아붙였다. 타트의 대꾸가 없자 마마는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이 왜 대답이..."

폭발한 마마의 신경질은 이어진 타트의 외마디 신음소리에 소멸했다. 한순간 새파랗게 변한 오른쪽 얼굴이 순식간에 돌아온다.

"너, 무슨 실험을 하는 거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복용하는 약물의 부작용입니다."

힘들어 하면서도 일일히 대답하는 타트가 안 쓰럽다.

"디에가 너한테 실험 중이냐?"
"아닙니다! 그런 건 절대 아닙니다! 그저 제 실험에 의해 생기는 부작용을 방지하기 위한 약물 때문입니다!"
"아님 말지 뭘 그리 당황해?"

이어진 정적에 마마는 타트가 입을 열지 않을 것을 확신했다. 한숨을 쉬며 디에의 행방을 물으니 시공간에 있을 거란 쓸모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디에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전야제 사건은 어떤지 물으니 자신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며 머리를 긁적인다.

역시, 손을 썼군.

마마는 전화를 종료하자마자 바득바득 이를 갈았다. 전야제 때 정체불명의 생명체에게 흡수된 후 제자리로 돌아왔다. 간만에 긴머리를 묶으며 자신의 실험실에 틀어박혀 그 생물에 대해 조사했으나 이렇다 할 데이터가 없었다. 기껏해야 이계의 생물이란 것 정도. 그렇다면 그것은 디에가 이계에서 가져온 것일까?

"하-."

의문투성이다. 풀리지 않는 숙제 같다. 디에, 무슨 꿍꿍이냐. 마마는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다.




그 시각 아트는 자신을 덮쳐 발목의  상처를 핥으려던 사트를 벌주며 책을 읽고 있었다.

"아트 미안해. 다신 안 그럴게. 그니까..."
"팔 높이 들어."
"넵."

끽소리도 못 하고 사트는 팔을 번쩍 들었다. 의자를 든 팔이 미세하게 진동했으나 별 거 아니란 듯 아트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종이 넘기는 소리와 간간히 훌쩍이는 소리만이 정적을 두드렸다. 아트의 눈치를 살피던 사트는 그의 눈이 빛나는 것을 보며 언제 애교를 부려 이 난관을 탈출할지 고민했다.

"아트? 무슨 일이야? 설마 사트가 덮친..."
"그런 거 아니야! 전야제 때 그 식물 말야. 플랜트 타워 에너지 뱅크 같아."
"넌...기억이 나니?"

동생을 놀리던 마마가 진지하게 물었다. 아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찾아봐도 이 세계에는 그런 고차원적인 동력원은 없어. 그래서 내가 조사를 좀 했는데, 이 식물, 엘프랑 비슷해."
"뭐?"
"실은 발목이 꿰뚫렸을 때 가시의 일부를 뜯어냈어. 그것의 파형을 분석한 결과 엘프와 비슷하게 나타났어."

쓰고 남은 샘플이 든 봉투를 흔들며 아트는 데이터를 보내주겠다고 했다.

"분석하고 연락하지."
"이따 저녁 먹고 얘기하자."
"한시라도 빨리...뒤에 저거 사트냐?"

저거라고 불린 사트가 볼을 부풀리자 마마와 아트는 웃어버렸다.

"벌 잘 줘라."
"응."
"무리하진 말고. 발목 덧나면 안 되니까."
"응. 루사 형한테는 물어봤어?"
"...그 근육돼지는 묻지도 마."
"역시 기억 못 하는구나?"

차라리 그거면 말이나 않지.

전화를 끊고 아트는 자료를 보내준 뒤 시스템을 껐다. 그리곤 사트 앞에 서서 헛기침을 하더니 무릎을 굽혀 눈을 맞췄다.

"팔 아파?"
"응."
"내리게 해줄까?"
"정말? 화 풀렸어?"
"아니."

금새 시무룩한 사트를 보며 아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전야제 때 무리했는데 너무 혹사시키나 싶어서. 다른 벌 줄까? 팔 안 아픈 걸로."

2탄인 거냐...

사트는 속으로 가슴을 탕탕 쳤다.

"..그...래."
"좋아 내려."

의자를 내린 순간 위험할 거란 걸 감지했다. 불길한 예감은 틀리질 않는다.

"아, 아, 아트! 잠, 잠깐만!!"
"착하지?"

거침없는 손놀림에 사트는 움찔움찔거렸다.

"..하...하윽"

터지는 신음소리에 아트는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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