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리쬐는 햇살과 다소 짜증 섞인 신음이 아침을 맞이했다. 거칠고 매서운 샌더 특유의 모래바람은 열린 창문을 통해 마을 여관에 묶던 연구자의 안면을 사정없이 강타했다. 분명 밤에 창문을 걸어 잠그고 잤을 터인데 활짝 열린 창문 사이로 휘몰아치듯 침입한 모래바람은 다이너모로 구현한 자명종소리보다 효과적이었다. 사내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서둘러 창문을 닫고 헝클어진 머리를 빗었다. 밤새 열려있었던 것일까, 빗질을 할 때마다 머리카락 사이로 모래가 한 움큼씩 쏟아져 나왔다. 모래 속에서 잤다고 작게 투덜거린 마스터마인드는 정갈하게 머리를 묶었다. 300년 뒤의 시공에 떨어져서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 끝에 완성한 기술들인데 어째서 더 강한 위력을 발휘하지 못 하는지, 거울 속의 사내는 불만에 차 보였다. 하피들과 트락들을 처리하는 것은 성가신 일이었다. 그럼에도 처리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칼루소 부족들은 힘에서 밀리는 면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다이너모의 공격력을 개선시켜서 해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들도 마족을 처리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었던 것일까, 도무지 베히모스의 심장부에서는 진전이라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여관에서 마을 주민들끼리 수군대는 소리와 혀 차는 소리가 자존심에 대창처럼 꽂혔다.
 
“저 남자 또 가는 거야? 지독하다, 지독해.” 
“저러다 또 마을사람들만 위험해지겠군. 다른 곳도 아니고 몬스터들의 소굴 중심부에서 쓰러져버리면 구조하기도 어려운데......”
 
 이번에도 실패인가. 오늘도 베히모스를 장악한 마족의 얼굴은 보지 못 했다. 더 강력한 것, 이제껏 만들어내지 못한 기술이 필요했다. 더 나아간다면 저번처럼 뻗어버리고 말 것이란 계산 결과가 스크린에 떠 있었다. 이 이상의 진행은 아둔한 발악이다. 사내는 평소보다 일찍 여관으로 돌아왔고, 이 날만큼은 마을사람들도 더 이상 그에 대해 수군거리지 않았다. 

 꼬박 5일을 마을 외곽으로 다녀온 사내의 몰골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5일 동안 마을로 돌아오지 않았던 사내는 떠날 때보다 야위어 있었고, 머리카락 또한 푸석푸석했다. 모래바람과 먼지, 몬스터의 잔해쯤으로 보이는 핏자국들이 엉겨 붙은 전신에서는 사람들이 고개를 돌릴 만큼 강한 악취가 풍겼다. 여관 주인은 말없이 목욕물을 준비해주었고 목욕을 마친 그는 식사도 하지 않은 체 잠들었다. 굳게 걸어 잠근 창문 아래에는 지난 5일간 그가 악착같이 모은 것들이 담긴 묵직한 천 주머니가 놓여 있었다.
 제대로 먹은 것이 없을 거라 여긴 여관주인은 소화가 잘 되고 위장에 무리가 되지 않는 음식을 준비해 사내의 방문을 두드렸다. 여러 가지로 귀찮은 일을 만드는 남자였지만 어찌되었든 그 덕분에 몬스터들의 침입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그는 연구목적으로 잠시 묶어간다고 말했을 뿐 무엇을 연구하는지,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는 함구하였다.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았으나 여관 주인은 자신의 영역이 아니라며 매번 고개를 추켜드는 의심을 외면했다. 진짜 이유가 무엇이든 그 남자 덕분에 마을이 평온해진 것은 사실이었고 별다른 문제는 일으키지 않았으니 손해날 것이 없다 생각한 것은 여관주인의 긍정적인 성격과 매사 둥글둥글하게 사는 것이 이로운 그의 직업 탓일 것이다. 경쾌한 노크소리에도 들려오는 대답이 없자 주인은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심호흡을 하며 식사를 가져왔다고 말하려는 순간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책상 앞에 앉아 무수히 많이 띄워진 스크린들을 보며 미소를 짓고 있는 사내 때문이었다. 그의 눈에 어린 것은 이제껏 본 적 없는 집착이었다. 사내가 무어라 웅얼거리는 것을 주인은 가까스로 알아들었다.
 
“드디어, 드디어 완성했다!”

 
 그 난리를 쳐서 이룬 결과가 겨우 이 정도인 것인가? 사내는 스스로의 발명에 뿌듯하면서도 기대에 못 미치는 성과에 또 다시 혀를 찰 수 밖에 없었다. 연이은 테스트에서 새로운 기술은 기대했던 것만큼 자율적이고 지능적으로 구현되지 못 했다. 명중률은 자신이 직접 조준하는 팬저 버스터에도 못 미쳤으며 시전자를 따라 움직여야 할 타이밍에도 자신의 자리를 고수하는 등, 전투상황에 유동적으로 대처하지 못 했다. 공격력 상승은 어디까지나 명중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어떻게든 자신을 따라 이동하고 주변의 적을 정확하게 섬멸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것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지난 며칠간 쏟아 부었던 노력이 모두 헛수고가 될 것이다. 명중률, 명중률을 높여야 했다. 씻고 나오니 여관주인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식사라면 아래층에 가서 해도 된다만.”
 
 이맛살을 찌푸릴 법도 한데 여관주인은 서글서글 웃으며 오늘은 모래바람도 불지 않고 간만에 날씨가 화창하니 조금 쉬는 것이 좋을 것 같다며 식사를 내민다.
 
“쓸데없는 참견이로군.”
 
 차갑게 쏘아붙이는 것에 기분이 나빠서라도 돌아갈 거라 생각한 것은 오만이었다. 여관 주인은 호주머니에서 작은 거울을 꺼내 사내의 얼굴을 비추었다. 거울 안에는 눈 주변이 검은, 죽은 송장이 걸어 다닌다고 말해도 믿을 법한 몰골의 남자가 피곤한 시선으로 사내를 응시하고 있었다. 죽은 사람 같아서 하는 말이니까 밥 먹고 외출을 하라고, 여관에서 초상 치면 장사 책임질 거냐고 묻는 여관 주인의 목소리는 염려스러움이 가득했다. 수입이 줄어드는 것이 싫다고 생각한 사내는 주인의 의견에 수긍하였다. 효율이 떨어지는 것을 그 누가 좋아하겠는가. 빠르게 빈 그릇을 건네고 마을의 연금술사 집으로 향했다. 
 모래바람이 거칠어도 제법 활기찬 마을이었다. 평소에는 쥐 죽은 듯이 고요한 편인데 모래바람 한 번 잠잠해졌다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나온 모양이다. 길거리에는 장사꾼들이 먹을 것을 팔고 원단을 보여주며 흥정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저희들끼리만의 숨바꼭질을 하는지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술래가 벽을 마주보고 서 숫자를 큰 소리로 외치자 오빠로 보이는 한 아이가 여동생의 팔을 잡아 끌어 시장의 인파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런 모습들을 보고 있자니 가슴 한 켠이 아려온 사내는 잠시 옆으로 비켜서서 분주한 모습들을 망막에 담았다. 시장에 간 기억은 없었지만 어머니께서 들려주시던 이야기들이 생각났다. 모종 값을 흥정하던 중 벌어진 에피소드들과 키우던 식물들을 일부 처리하면서 생겼던 실랑이들. 어머니께서는 그런 얘기들을 재미있는 동화처럼 들려주셨고 무릎을 베고 누운 자신은 그 이야기들에 천진하게 웃었었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작별을 고하자 친구들과 뛰어 놀던 남자 아이가 저를 부르는 소리에 제 어머니께 달려가는 모습을 끝으로 사내는 상념을 그만두었다. 
 연금술사는 폐점 시간에 오면 어쩌냐고 잔뜩 투덜거렸다. 귀찮은 녀석이라며 늦게까지 일을 시키는 대신 값을 더 지불하라는 요구에 잠시 생각에 잠긴 사내는 내일 찾으러 오면 되지 않냐고 물었다. 연금술사는 안경 너머로 사내를 뚫어져라 응시하다가 깊게 한숨을 쉬고는 양이 많아서 시간이 걸리겠지만 만드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니 들어와서 기다리라고 했다. 원래 이렇게 친절했던 할멈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웬일로 차와 의자를 내어줬다.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 싶어 유심히 바라보니 차 한 잔을 느릿하게 비워낸 그녀가 말을 꺼냈다.
 
“고민이 있는 모양이구먼.”
 
 눈매가 매섭게 올라가는 사내를 연금술사는 귀엽다는 듯이 웃어넘겼다.
 
“의외로 해결책은 등잔 밑에 있는 법이지. 너무 멀리 보지도, 가까이 보지도 말게. 젊은 친구가 그러다가 나보다 일찍 저 세상으로 가겠구먼. 건강은 젊을 때 챙겨야 돼.”
 
 짧은 잔소리를 끝으로 연금술사는 만들어달라던 음식들을 모두 건네주었다. 값을 치르며 추가수당을 물어보니 시계를 쳐다본 그녀는 정확하게 폐점시간이라며 추가수당은 필요 없다고 했다. 가게 밖으로 나서는 그를 이상하리만치 유심히 쳐다보는 그녀가 이상했지만 그런 걸 일일이 신경 쓰는 성격도 아니거니와 아는 척해주기에는 너무 피곤하여 저절로 발걸음이 여관방으로 향했다.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 오늘 있었던 일들을 회상하던 사내는 빈 속에 곡기가 한꺼번에 들어가서 그런지 아침부터 느껴지던 메스꺼움에 눈을 감아버렸다. 해결책은 등잔 밑에 있다. 방 천정에 달린 소박한 등이 어둑해진 하늘 덕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저놈의 창문은 제대로 닫히질 않는 것인지 모래 냄새를 가득 실은 바람이 전등을 미세하게 흔들었다. 벽면에 일렁이는 가구의 그림자들 사이로 낮에 봤던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동생을 잡아 끌던 손이 어머니께서 내밀어주시던 다정한 손과 겹쳐졌다.
 
“그 도서관 안으로 어머니도 끌어당겼으면 좋았을 텐데.”
 
 자조적으로 말한 것들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무의미한 것들이었다. 다시 한 번 그림자를 외면하려던 사내는 불현듯 벌떡 일어났다. 왜 미처 그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일까? 다이너모를 불러 스크린을 띄운 사내의 방에는 밤새도록 불이 켜져 있었다. 
 지나온 발자취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뿌듯함이 가득했다. 더 이상 하피들을 처리하기 위해 매번 발사 각도를 조절할 필요가 없어졌다. 높은 명중률이 상향된 공격력과 만나 빚어낸 시너지 효과는 상상 이상의 파괴력을 자랑했다. 타격 대상을 흡입하고, 유도기를 장착한 신기술은 프로토타입 때와는 다른 성능을 발휘했는데 자동 조준 기술을 삽입하자 팬저 버스터를 개별적으로 사용하는 것보다 몬스터를 처리하는 시간이 빨라졌다. 그렇지만 여전히 미처 죽이지 못한 잔챙이들이 남는 것이 화근이었다. 더불어 숨 좀 돌리기 위해 그리고 비교적 자신이 덜 움직이기 위해 만들어낸 기술치고는 지속시간이 너무 짧았다. 1분도 채 못 채우고 사라져버리니 이건 에너지만 축내는 기술에 가까웠다. 한 끝이, 부족했다. 샌더의 몬스터들을 사냥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숨겨진 비밀통로. 그곳에는 표면에 드러난 것보다 짙은 음모가 있었다. 그곳에서 만난 제정신이 아닌 몬스터를 처리하기 위해선 보다 긴 지속시간과 강력한 한 방이 필요했다. 현재의 기술로서는 제 수명이 다하면 무기력하게 사라지는 것이 전부. 에너지를 과도하게 소모하지 않기 위해 지속시간을 제한한 것은 큰 실수였다. 포션을 복용하거나 다이너모의 과부하를 막기 위해 필요한 시간은 1분 남짓. 즉, 최소 1분 이상은 버텨주면서 근처에 오는 적을 모두 섬멸하고, 혹시라도 1분 내에 다이너모가 상태 회복을 못 하거나 자신이 미처 준비가 안 됐을 경우 시간을 벌어주기 위한 한 방이 필요했다.
 
“수명시간을 제어하는 공식 수정, 사라질 때의 폭발력과 타격횟수 증가. 두 가지를 해결하려면 소환할 때 사용한 에너지를 대상이 그대로 흡수하여 에너지 효율을 높여야 한다. 폭발력과 타격횟수는 뒷부분의 코드를 약간 수정해야겠군. 그러나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은 1분간 쉴 새 없이 공격을 유지하면서도 마지막에 충분한 시간을 벌어줄 수 있는 강한 폭발력과 충분한 타격횟수를 구현하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의 양이다. 다이너모, 계산을.”
 
 계산 결과 기존에 사용하던 것들보다 많은 자원 소모를 요구했다. 물론, 평상시라면 위험하지 않겠지만 해당 기술은 이전보다 강한 몬스터에게 사용될 것. 공격력과 명중률이 제대로 나오지 않을 경우 자칫하다간 목만 날아갈 것이다. 기본적으로 다이너모는 엘 에너지를 이용하여 기동하며 고안한 기술들 또한 엘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들이 많았다. 이번 신기술 또한 그런 류인데 일부는 다이너모의 에너지를 쓰되 나머지를 외부에서 충당한다면 요구 조건을 만족하는 기술을 완성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실마리를 따라간 곳은 다시 한 번 연금술사의 집이었다. 저번에 만들어달라던 양이 제법 컸던 탓일까, 해볼 테면 해보라는 표정으로 안경을 고쳐 쓰는 연금술사에게 사내는 전혀 다른 것을 물었다.
 
“엘 에너지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지?”
 
 말꼬리가 짧다며 혀를 차대는 걸 깔끔하게 무시한 체 대답을 재촉하는 사내에게 연금술사는 엘의 조각을 분해하면 엘의 힘이 응축된 보석을 얻을 수 있다고 귀띔해주었다.
 
“이 조각들 전부 분해해줄 수 있나?”
 
 연금술사는 그러면 그렇지, 갈수록 귀찮은 일거리들만 의뢰한다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반나절을 소모하여 사내는 충분한 양의 엘의 정수를 얻을 수 있었다. 
 여관방으로 돌아온 사내는 무엇을 하는 것인지 근래 들어 방에서 통 나오질 않았다. 무언가 연구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 여관 주인은 특히나 그의 방 주변이 시끄럽지 않게 관리하며 제일 구석진 방을 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방 안에서는 다이너모가 분주하게 시뮬레이션을 실행하고 있었고 모든 것을 감독하는 관리자는 기계만으로는 부족한 듯 조바심이 난 표정으로 손수 여러 가지 가능성들을 수학적으로 검증하고 있었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세운 가설들을 차례차례 지워나가던 사내는 점점 그가 찾는 해답에 가까워져 갔다. 비록 그것이 지속적인 ED 소모를 부를지라도 더 강해질 수 있다면, 그래서 더 수월해 질 수 있다면, 그래서 어머니께서 나소드 공학자로 성장한 자신의 모습을 자랑스러워하실 수 있다면. 오로지 그 생각을 하며 사내는 다시금 밤샘에 돌입했다. 


 익숙한 기계음이 가득 찬 귓바퀴에 규칙적인 신호음이 잡혔다. 며칠 간의 연산 끝에 엘의 정수 1개와 전투 중 사용할 수 있는 다이너모에 내장된 최대 에너지를 사용하여 1분 동안 신기술을 유지할 수 있는 코드를 완성하였다. 이와 동시에 누수 되던 에너지를 흡수하여 지속시간을 안정적으로 만들고 공격력을 상승시켰으며, 메모리를 압축하여 대상을 소환한 후에도 다이너모는 개별적으로 전투를 계속 할 수 있게 개조했다. 더불어 대상이 뇌파를 추적해 자신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코드를 추가하여 제 곁에서 일정 거리 이상 떨어지지 않고 주변으로 몰려드는 적들을 섬멸할 수 있게 수정했다. 남은 것은 원하는 결과가 나오는지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멀리서 폭주한 몬스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마족에게 오염되어 제정신이 아닌 것을 섬멸하고 모래바람에서 벗어날 시간이 도래한 것이다. 몬스터를 마주하기 전에 사내는 지난 세월을 잠시 돌아보았다. 엘 에너지를 모으기 위해 고대 설계도를 연구한 것과 인공지능을 위해 알테라를 이 잡듯이 뒤졌던 시절. 그리고 마침내 완성한 궁극의 기술을. 추억에 빠진 그의 기척을 느꼈는지 베히모스가 사내를 노려보며 포효한다. 주인의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모인 6개의 수족에게 사내는 짧게 명령했다.
 
“Good day to die.”

묵시록의 시작이었다.

 때 아닌 늦은 밤. 어린 공학소년은 스크린을 켠 채 다이너모의 업그레이드에 집중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가족이자 친구 역할을 해 온 이 물체는 소년을 세상으로부터 지켜줄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그것을 강하게 발전시키기 위해 오늘도 밤샘 연구를 지속하고 있었다. 에러가 나기 전까진.

 

"...뭐야. 이거 왜 이러는 거야."

 

 작게 시작한 알람소리가 점점 커져서 이내 모든 스크린들이 연주하는 불협화음이 되었다. 어쩔 줄 몰라 허둥대자 각각의 악기들은 자신을 연주하는 연주자에게 제 주인은 인도했다.

 정신을 차리고 본 것은 난생 처음 보는 공간. 작열하는 푸른색이 검은 하늘에 균열을 긋고 있는 곳이었다. 자신의 연구가 이곳으로 이끈 걸까, 잠시 생각했으나 시공간에 손대지 않았던 것을 고려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원인은 외부에 있을 것이다.

 

"언제든지 찾아와도 된다고 했지? 내 여흥을 위해서."

 

 기분 나쁘게 웃는 상대는 어느날 자신의 앞에 나타났었던 가면의 남자였다. 어딘가 음습하고 불길한 기운이 느껴져서 보는 순간 이맛살을 찌푸렸었는데 트락들에게 잡힐 뻔한 걸 막아줬던지라 차마 부탁을 거절하지 못 했었다. 한참을 말없이 노려보고 있으니 상대쪽에서 음악의 주제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내가 널 부른 이유는 너에게 가능성을 제시하기 위함이다. 네가 너무 한 가지 길만 고집하는 것 같아서 시야를 넓혀주기 위해 불렀달까? 무릇 공학자라면 가능한 모든 가능성을 검토해야 할 필요성이 있으니까."

 

그게 자신과 무슨 상관일까. 남의 일에 신경꺼라 반박하는 것조차 귀찮아서 이맛살을 찌푸리며 쏘아보니 특유의 불쾌한 키득거림과 함께 남자는 시공을 열었다.

 

"들어갈 수는 없지만 볼 수는 있는 거울, 지금부터 3가지 가능성을 보여줄 테니 잘 보도록."

 

거울의 수면이 흔들렸다. 점점 가라앉는 의식 속에서 소년의 시야가 흐려졌다. 무릇 생명체는 자신의 시간이 아닌 곳에서는 이방인이고, 이방인에게 타인의 시공간은 허락되지 않은 것이다. '들어갈 수는 없지만 볼 수는 있다'는 무슨 뜻이었을까.

 

 

Ch1. Phsycic Tracer

 

 굉음과 함께 떨어진 곳은 알테라코어. 이곳은 예전에 자신이 퐁퐁거리는 녀석들의 부탁으로 잠시 갔었던 곳이었다. 공간 자체는 어렵지 않았으나 중앙부까지의 거리가 길고 나소드킹이라는 제법 성가신 녀석이 살던 곳이었다. 주변을 살피자 앞에 주먹을 휘두르며 맨 몸으로 나소드들을 처치하는 다소 정신나간 녀석이 보였다. 눈이 반쯤 풀린 것이 미치광이라 봐도 손색 없을 것 같았다. 근육도 엄청 났고... 자신과도 많이 닮았다. 머리가 삐죽삐죽하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정신없이 구경하던 중 나소드 한 마리가 자신이 있는 쪽으로 왔다. 다이너모를 전투모드로 전환하며 파티클 액셀레이터를 쓰려던 찰나 앞에 선 남자의 공격에 부서진 나소드 파편이 자신을 통과해 나동그라졌다. 남자는 파편을 보지도 않고 알테라 코어의 중심부로 들어갔고 소년은 추스를 세도 없이 남자를 따라 중심부로 들어갔다. 다소 죽이기 귀찮은 나소드킹이 자리를 잡고 남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뒤로 이어진 것은 자신도 잘 아는 수순. 에너지를 부수고 코어 장치를 노출시키는 것. 소년은 그 간의 전투장면을 분석하며 이 남자가 자신보다 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몇몇 기술은 자신도 아는 것이었지만 특정 수준 이상의 것들은 전혀 생각지 못한 것들이었다. 마지막으로 본것은 손쉽게 수중에 넣은 물건을 보며 미친듯이 웃어재끼는 남자의 얼굴이었다.

 

Ch2. Arc Tracer

 이번에는 어디로 온 걸까. 답을 채 알기도 전에 커다란 돌덩이부터 날아온 것을 보면 이곳은 페이타의 깊숙한 지하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 듀터가 마족의 녹색으로 물들인 연기가 방안에 가득했다. 그리고 그 녀석과 대치하고 있는 코트를 입은 남성은 어줍짢다는 표정으로 마족을 깔아보고 있었다. 자신은 이곳에 들어왔다가 애꿎은 다이너모만 박살난 채 돌아와서 더 기분이 나쁜 곳, 자신과 닮은 듯 닮지 않은 남성은 과연 어떻게 할까. 기대하며 눈을 깜빡인 순간 상황은 이미 정리되어 있었다. 어느새 소환된 정육면체는 불길한 기운을 내뿜으며 먹이를 갈구하듯 날카로운 소음을 내고 있었고 남자는 그대로 에머시스트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 이후의 상황은 일순. 별다른 손도 쓰지 않았는데 하늘에서는 빛이 쏟아져내리고 다이너모는 자수정을 집중 사격했다. 기운이 쇠한 녀석이 비틀비틀 일어나자 남자는 조소하며 최후의 심판을 내렸다. 심장을 꿰뚫은 일직선의 에너지가 소년의 시야를 마비시켰다.

 

Ch3. Time Tracer

 또 다른 이색적인 공간. 아직 얘기만 듣고 미처 가보지 못한 이곳은 마족들이 들끓는 곳이었다. 언젠가 더 강해지면 가보고자 했던 벨더 전장의 중앙부. 제법 멀면서도 가까워보이는 곳에서 왜인지 마족들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허공에서 허우적대며 떨어지는 모습이 흡사 분수대에서 뿜어져나온 물 같다. 호기심을 안고 가까이 다가가자 새까만 남자가 에너지를 분출하며 마족들을 소탕하고 있었다. 아니, 소탕보단 죽인다가 맞아라고 생각하며 소년은 가까이 다가갔다. 다소 독특한 모양의 다이너모와 남자 주변에 생성되어 있는 흑자색의 균열들이 그가 정상이 아님을 알려주었다. 하늘을 수놓는 마족들을 보며 소년은 남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새까만 흑자위와 눈이 맞았다. 심장을 꿰뚫는 듯한 통증에 소년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자신을 본 것인지 그것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남자 주변에서 증가하는 균열들과 증폭되는 에너지에 저항할 수 없음은 확실했다. 터질 듯 조여오는 심장에 비명이 새어나오기 직전 남자가 외친 명령어는 소년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역시 나약하군."

 

얼마나 잔 것일까. 검푸른 공간에서 눈을 떴다. 새까만 암흑과 기분 나쁜 웃음소리. 그것이 소년의 의식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저것들은 뭐야."

"큭큭큭... 글쎄."

"나랑 전부 똑같이 생겼어. 설마, 저게 전부 '나'인가?"

"다행히 머리는 안 다쳤나 보군. 자,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가능성은 다 보여줬는데 어느 게 가장 마음에 들지?"

 

흰 색 코트. 가장 강해보이고 안정적인 것은 그 사람 같았다. 그러나 전투스타일을 볼 때 그 경지에 오를 정도면 이 사람도 가히 정상은 아닐 거란 것이 소년의 판단이었다. 첫 번째 남자는 다이너모보단 육신을 강화시키고 그를 보조하기 위해 다이너모를 이용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세 번째는...

 

"마지막으로 보여준 녀석... 뭐하는 녀석이야?'

"그 녀석? ...직접 알아보지 그래? 기회가 된다면."

 

 킬킬거리며 웃는 모습이 꼭 나중에 만날 거라는 확신을 주는 듯 해서 더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악마 같은 눈이 자신을 꿰뚫어봤었다. 가학적으로 비웃는 모습에 심장이 내려앉았었다. 아니 파열했었다. 뭘까. 어떻게 된 걸까. 그는 어쩌다가 그렇게까지 망가진 걸까. 혼란스러움에 욕지거리가 혀끝까지 치밀었는데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면의 남자는 태연히 말을 이었다.

 

"무릇 시공간은 한 사람당 하나씩 주어진 것. 타인의 시간을 보는 것도 범죄이거늘 그 시간에 개입하려 했다면 그 정도 형벌은 극형도 아니다. 남의 것을 탐하지 말라는 말이 괜히 있을리가."

 

흔들리는 소년에게 시공간의 관리자는 속삭였다.

 

"그래서, 너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미래의 변절자 아크 트레이서."

 

자정이 넘어가자 급하게 뛰어가는 발소리가 울린다. 통, 통, 통, 급하게 뛰어가는 모습이 시계에 쫓기는 토끼와 겹쳐졌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것은 시계 대신 녹색 액체를 통, 통, 통 흘리며 뛰어가고 있단 것 뿐. 계단을 사뿐사뿐 올라 이곳에서 가장 낮은 층에 사는 그들의 군주에게 달려간 자는 이곳에 사는 쥬비기들을 대표하는 가장 큰 쥬비기였다.

"오버로드님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매애애애-."

크게 울부짖은 플랜트 오버로드 세 마리가 천천히 일어섰다. 원래 이곳을 벗어나는 일이 없지만 한 해 딱 하루 그들이 윗층으로 올라가 다른 하급 몬스터들과 어울리는 날이 있었다. 쥬비기는 영광스런 표정으로 길을 안내했다. 이곳에서 가장 오래 살았으며 이곳을 창시했다 일컬어지는 플랜트 오버로드는 지하정원에 사는 식물들 중에서도 가장 크고 강했다. 셋이 함께 생활하는 공동체였는데 이들이 어디서 어떻게 탄생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저 이들이 이곳에 처음 뿌리내린 식물들이며 현재의 지하정원을 만들고 이곳에서 죽어가던 식물들을 되살린 자들이란 것 외에는 식물들 사이에 딱히 더 알려진 것이 없었다.
 무너질 것 같은 소음이 잦아들고 마침내 지하정원의 중간층에 도착한 오버로드는 공터의 정중앙에 등을 맞대고 자리를 잡았다. 음침한 마을에서 가장 음습한 곳에 사는 몬스터들은 한 번 자리를 잡으면 이동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다같이 모이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였고 이내 장내에 모인 모든 주민들이 신호를 기다렸다. 정적.

"......... 매애애애-!"

세 오버로드의 우렁찬 울음소리를 필두로 쥬비기들이 스위치를 눌렀다. 언제 설치되었는지 모를 스피커에서 음악이 터져나오자 몬스터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파티를 즐기기 시작했다. 이곳을 지키는 글리터 병사들 또한 창과 방패를 내려놓고 시간을 즐겼는데 춤을 추기보단 술을 마시거나 고기를 뜯는 류가 많았다.
  쥬비기들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좌우로 흔들거나 서로의 엉덩이를 부딪히면서 박자를 탔다. 여럿이 모여 고개를 넘기도 했고 적당한 타이밍에 독을 터뜨리기도 했다. 남을 잘 따라다니는 습성 때문에 무리지어 다니는 군락을 다른 군락이 따라가기도 했는데 돌아다니다 글리터 병사들을 만나면 서로 약속이나 한 듯 독을 터뜨렸다고 한다.
 변이된 덩굴줄기는 비트에 맞춰 바닥을 후려쳤는데 거대한 음악 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일부는 모여서 쥬비기를 들어올려주기도 하고 술에 취한 글리터나 친구와 떨어진 쥬비기를 묶고 괴롭히기도 했다. 일부는 다크 드로세라의 눈을 감아 시야를 차단했는데 참다 못한 드로세라가 뿌린 독에 중독되어 근육통을 앓았다는 후문이 있다. 
 다크 드로세라는 생김새 때문에 격렬한 춤을 출 수는 없었지만 특유의 거대한 손과 유연성으로 파티를 즐겼다. 바닥을 후려치는 덩굴줄기들과 함께 박수를 치거나, 음악에 몸을 맡긴 채 흔들흔들 거리며 독을 내뿜는 녀석들이 대부분이었다. 일부는 술에 취한 글리터들을 흠씬 두들겨패기도 했는데, 글리터 병사와 다크 드로세라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었으나 소문에 따르면 난폭해진 글리터 병사들이 식물들을 자주 괴롭혔다고 한다.
  가장 조용하게 파티를 즐기는 군락은 썬더플라이들이었다. 이들은 조명을 대신하였는데 여럿이 모여서 허공의 이곳 저곳에서 터질 뿐인지라 이들이 상황을 즐기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음악이 점점 커지고 파티의 열기도 차차 식어갈 즈음 장내가 쥐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파티의 끝을 알리는 양의 울음소리가 끝나자 이곳의 주인들은 육중한 몸을 이끌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들이 나가는 것을 지켜본 다른 몬스터들도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고 글리터 병사들 또한 다시 창과 방패를 들었다. 허공에서 가장 밝게 빛나던 썬더플라이들도 어둠 속으로 숨어버리자 지하정원에는 평소의 냉혹한 정적만이 감돌 뿐 아무 소리도, 아무 생명도 느껴지지 않았다. 잠시나마 활기를 품었던 정원은 다시 검은 독을 품고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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