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리쬐는 햇살과 다소 짜증 섞인 신음이 아침을 맞이했다. 거칠고 매서운 샌더 특유의 모래바람은 열린 창문을 통해 마을 여관에 묶던 연구자의 안면을 사정없이 강타했다. 분명 밤에 창문을 걸어 잠그고 잤을 터인데 활짝 열린 창문 사이로 휘몰아치듯 침입한 모래바람은 다이너모로 구현한 자명종소리보다 효과적이었다. 사내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서둘러 창문을 닫고 헝클어진 머리를 빗었다. 밤새 열려있었던 것일까, 빗질을 할 때마다 머리카락 사이로 모래가 한 움큼씩 쏟아져 나왔다. 모래 속에서 잤다고 작게 투덜거린 마스터마인드는 정갈하게 머리를 묶었다. 300년 뒤의 시공에 떨어져서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 끝에 완성한 기술들인데 어째서 더 강한 위력을 발휘하지 못 하는지, 거울 속의 사내는 불만에 차 보였다. 하피들과 트락들을 처리하는 것은 성가신 일이었다. 그럼에도 처리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칼루소 부족들은 힘에서 밀리는 면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다이너모의 공격력을 개선시켜서 해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들도 마족을 처리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었던 것일까, 도무지 베히모스의 심장부에서는 진전이라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여관에서 마을 주민들끼리 수군대는 소리와 혀 차는 소리가 자존심에 대창처럼 꽂혔다.
 
“저 남자 또 가는 거야? 지독하다, 지독해.” 
“저러다 또 마을사람들만 위험해지겠군. 다른 곳도 아니고 몬스터들의 소굴 중심부에서 쓰러져버리면 구조하기도 어려운데......”
 
 이번에도 실패인가. 오늘도 베히모스를 장악한 마족의 얼굴은 보지 못 했다. 더 강력한 것, 이제껏 만들어내지 못한 기술이 필요했다. 더 나아간다면 저번처럼 뻗어버리고 말 것이란 계산 결과가 스크린에 떠 있었다. 이 이상의 진행은 아둔한 발악이다. 사내는 평소보다 일찍 여관으로 돌아왔고, 이 날만큼은 마을사람들도 더 이상 그에 대해 수군거리지 않았다. 

 꼬박 5일을 마을 외곽으로 다녀온 사내의 몰골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5일 동안 마을로 돌아오지 않았던 사내는 떠날 때보다 야위어 있었고, 머리카락 또한 푸석푸석했다. 모래바람과 먼지, 몬스터의 잔해쯤으로 보이는 핏자국들이 엉겨 붙은 전신에서는 사람들이 고개를 돌릴 만큼 강한 악취가 풍겼다. 여관 주인은 말없이 목욕물을 준비해주었고 목욕을 마친 그는 식사도 하지 않은 체 잠들었다. 굳게 걸어 잠근 창문 아래에는 지난 5일간 그가 악착같이 모은 것들이 담긴 묵직한 천 주머니가 놓여 있었다.
 제대로 먹은 것이 없을 거라 여긴 여관주인은 소화가 잘 되고 위장에 무리가 되지 않는 음식을 준비해 사내의 방문을 두드렸다. 여러 가지로 귀찮은 일을 만드는 남자였지만 어찌되었든 그 덕분에 몬스터들의 침입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그는 연구목적으로 잠시 묶어간다고 말했을 뿐 무엇을 연구하는지,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는 함구하였다.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았으나 여관 주인은 자신의 영역이 아니라며 매번 고개를 추켜드는 의심을 외면했다. 진짜 이유가 무엇이든 그 남자 덕분에 마을이 평온해진 것은 사실이었고 별다른 문제는 일으키지 않았으니 손해날 것이 없다 생각한 것은 여관주인의 긍정적인 성격과 매사 둥글둥글하게 사는 것이 이로운 그의 직업 탓일 것이다. 경쾌한 노크소리에도 들려오는 대답이 없자 주인은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심호흡을 하며 식사를 가져왔다고 말하려는 순간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책상 앞에 앉아 무수히 많이 띄워진 스크린들을 보며 미소를 짓고 있는 사내 때문이었다. 그의 눈에 어린 것은 이제껏 본 적 없는 집착이었다. 사내가 무어라 웅얼거리는 것을 주인은 가까스로 알아들었다.
 
“드디어, 드디어 완성했다!”

 
 그 난리를 쳐서 이룬 결과가 겨우 이 정도인 것인가? 사내는 스스로의 발명에 뿌듯하면서도 기대에 못 미치는 성과에 또 다시 혀를 찰 수 밖에 없었다. 연이은 테스트에서 새로운 기술은 기대했던 것만큼 자율적이고 지능적으로 구현되지 못 했다. 명중률은 자신이 직접 조준하는 팬저 버스터에도 못 미쳤으며 시전자를 따라 움직여야 할 타이밍에도 자신의 자리를 고수하는 등, 전투상황에 유동적으로 대처하지 못 했다. 공격력 상승은 어디까지나 명중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어떻게든 자신을 따라 이동하고 주변의 적을 정확하게 섬멸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것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지난 며칠간 쏟아 부었던 노력이 모두 헛수고가 될 것이다. 명중률, 명중률을 높여야 했다. 씻고 나오니 여관주인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식사라면 아래층에 가서 해도 된다만.”
 
 이맛살을 찌푸릴 법도 한데 여관주인은 서글서글 웃으며 오늘은 모래바람도 불지 않고 간만에 날씨가 화창하니 조금 쉬는 것이 좋을 것 같다며 식사를 내민다.
 
“쓸데없는 참견이로군.”
 
 차갑게 쏘아붙이는 것에 기분이 나빠서라도 돌아갈 거라 생각한 것은 오만이었다. 여관 주인은 호주머니에서 작은 거울을 꺼내 사내의 얼굴을 비추었다. 거울 안에는 눈 주변이 검은, 죽은 송장이 걸어 다닌다고 말해도 믿을 법한 몰골의 남자가 피곤한 시선으로 사내를 응시하고 있었다. 죽은 사람 같아서 하는 말이니까 밥 먹고 외출을 하라고, 여관에서 초상 치면 장사 책임질 거냐고 묻는 여관 주인의 목소리는 염려스러움이 가득했다. 수입이 줄어드는 것이 싫다고 생각한 사내는 주인의 의견에 수긍하였다. 효율이 떨어지는 것을 그 누가 좋아하겠는가. 빠르게 빈 그릇을 건네고 마을의 연금술사 집으로 향했다. 
 모래바람이 거칠어도 제법 활기찬 마을이었다. 평소에는 쥐 죽은 듯이 고요한 편인데 모래바람 한 번 잠잠해졌다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나온 모양이다. 길거리에는 장사꾼들이 먹을 것을 팔고 원단을 보여주며 흥정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저희들끼리만의 숨바꼭질을 하는지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술래가 벽을 마주보고 서 숫자를 큰 소리로 외치자 오빠로 보이는 한 아이가 여동생의 팔을 잡아 끌어 시장의 인파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런 모습들을 보고 있자니 가슴 한 켠이 아려온 사내는 잠시 옆으로 비켜서서 분주한 모습들을 망막에 담았다. 시장에 간 기억은 없었지만 어머니께서 들려주시던 이야기들이 생각났다. 모종 값을 흥정하던 중 벌어진 에피소드들과 키우던 식물들을 일부 처리하면서 생겼던 실랑이들. 어머니께서는 그런 얘기들을 재미있는 동화처럼 들려주셨고 무릎을 베고 누운 자신은 그 이야기들에 천진하게 웃었었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작별을 고하자 친구들과 뛰어 놀던 남자 아이가 저를 부르는 소리에 제 어머니께 달려가는 모습을 끝으로 사내는 상념을 그만두었다. 
 연금술사는 폐점 시간에 오면 어쩌냐고 잔뜩 투덜거렸다. 귀찮은 녀석이라며 늦게까지 일을 시키는 대신 값을 더 지불하라는 요구에 잠시 생각에 잠긴 사내는 내일 찾으러 오면 되지 않냐고 물었다. 연금술사는 안경 너머로 사내를 뚫어져라 응시하다가 깊게 한숨을 쉬고는 양이 많아서 시간이 걸리겠지만 만드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니 들어와서 기다리라고 했다. 원래 이렇게 친절했던 할멈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웬일로 차와 의자를 내어줬다.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 싶어 유심히 바라보니 차 한 잔을 느릿하게 비워낸 그녀가 말을 꺼냈다.
 
“고민이 있는 모양이구먼.”
 
 눈매가 매섭게 올라가는 사내를 연금술사는 귀엽다는 듯이 웃어넘겼다.
 
“의외로 해결책은 등잔 밑에 있는 법이지. 너무 멀리 보지도, 가까이 보지도 말게. 젊은 친구가 그러다가 나보다 일찍 저 세상으로 가겠구먼. 건강은 젊을 때 챙겨야 돼.”
 
 짧은 잔소리를 끝으로 연금술사는 만들어달라던 음식들을 모두 건네주었다. 값을 치르며 추가수당을 물어보니 시계를 쳐다본 그녀는 정확하게 폐점시간이라며 추가수당은 필요 없다고 했다. 가게 밖으로 나서는 그를 이상하리만치 유심히 쳐다보는 그녀가 이상했지만 그런 걸 일일이 신경 쓰는 성격도 아니거니와 아는 척해주기에는 너무 피곤하여 저절로 발걸음이 여관방으로 향했다.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 오늘 있었던 일들을 회상하던 사내는 빈 속에 곡기가 한꺼번에 들어가서 그런지 아침부터 느껴지던 메스꺼움에 눈을 감아버렸다. 해결책은 등잔 밑에 있다. 방 천정에 달린 소박한 등이 어둑해진 하늘 덕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저놈의 창문은 제대로 닫히질 않는 것인지 모래 냄새를 가득 실은 바람이 전등을 미세하게 흔들었다. 벽면에 일렁이는 가구의 그림자들 사이로 낮에 봤던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동생을 잡아 끌던 손이 어머니께서 내밀어주시던 다정한 손과 겹쳐졌다.
 
“그 도서관 안으로 어머니도 끌어당겼으면 좋았을 텐데.”
 
 자조적으로 말한 것들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무의미한 것들이었다. 다시 한 번 그림자를 외면하려던 사내는 불현듯 벌떡 일어났다. 왜 미처 그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일까? 다이너모를 불러 스크린을 띄운 사내의 방에는 밤새도록 불이 켜져 있었다. 
 지나온 발자취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뿌듯함이 가득했다. 더 이상 하피들을 처리하기 위해 매번 발사 각도를 조절할 필요가 없어졌다. 높은 명중률이 상향된 공격력과 만나 빚어낸 시너지 효과는 상상 이상의 파괴력을 자랑했다. 타격 대상을 흡입하고, 유도기를 장착한 신기술은 프로토타입 때와는 다른 성능을 발휘했는데 자동 조준 기술을 삽입하자 팬저 버스터를 개별적으로 사용하는 것보다 몬스터를 처리하는 시간이 빨라졌다. 그렇지만 여전히 미처 죽이지 못한 잔챙이들이 남는 것이 화근이었다. 더불어 숨 좀 돌리기 위해 그리고 비교적 자신이 덜 움직이기 위해 만들어낸 기술치고는 지속시간이 너무 짧았다. 1분도 채 못 채우고 사라져버리니 이건 에너지만 축내는 기술에 가까웠다. 한 끝이, 부족했다. 샌더의 몬스터들을 사냥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숨겨진 비밀통로. 그곳에는 표면에 드러난 것보다 짙은 음모가 있었다. 그곳에서 만난 제정신이 아닌 몬스터를 처리하기 위해선 보다 긴 지속시간과 강력한 한 방이 필요했다. 현재의 기술로서는 제 수명이 다하면 무기력하게 사라지는 것이 전부. 에너지를 과도하게 소모하지 않기 위해 지속시간을 제한한 것은 큰 실수였다. 포션을 복용하거나 다이너모의 과부하를 막기 위해 필요한 시간은 1분 남짓. 즉, 최소 1분 이상은 버텨주면서 근처에 오는 적을 모두 섬멸하고, 혹시라도 1분 내에 다이너모가 상태 회복을 못 하거나 자신이 미처 준비가 안 됐을 경우 시간을 벌어주기 위한 한 방이 필요했다.
 
“수명시간을 제어하는 공식 수정, 사라질 때의 폭발력과 타격횟수 증가. 두 가지를 해결하려면 소환할 때 사용한 에너지를 대상이 그대로 흡수하여 에너지 효율을 높여야 한다. 폭발력과 타격횟수는 뒷부분의 코드를 약간 수정해야겠군. 그러나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은 1분간 쉴 새 없이 공격을 유지하면서도 마지막에 충분한 시간을 벌어줄 수 있는 강한 폭발력과 충분한 타격횟수를 구현하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의 양이다. 다이너모, 계산을.”
 
 계산 결과 기존에 사용하던 것들보다 많은 자원 소모를 요구했다. 물론, 평상시라면 위험하지 않겠지만 해당 기술은 이전보다 강한 몬스터에게 사용될 것. 공격력과 명중률이 제대로 나오지 않을 경우 자칫하다간 목만 날아갈 것이다. 기본적으로 다이너모는 엘 에너지를 이용하여 기동하며 고안한 기술들 또한 엘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들이 많았다. 이번 신기술 또한 그런 류인데 일부는 다이너모의 에너지를 쓰되 나머지를 외부에서 충당한다면 요구 조건을 만족하는 기술을 완성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실마리를 따라간 곳은 다시 한 번 연금술사의 집이었다. 저번에 만들어달라던 양이 제법 컸던 탓일까, 해볼 테면 해보라는 표정으로 안경을 고쳐 쓰는 연금술사에게 사내는 전혀 다른 것을 물었다.
 
“엘 에너지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지?”
 
 말꼬리가 짧다며 혀를 차대는 걸 깔끔하게 무시한 체 대답을 재촉하는 사내에게 연금술사는 엘의 조각을 분해하면 엘의 힘이 응축된 보석을 얻을 수 있다고 귀띔해주었다.
 
“이 조각들 전부 분해해줄 수 있나?”
 
 연금술사는 그러면 그렇지, 갈수록 귀찮은 일거리들만 의뢰한다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반나절을 소모하여 사내는 충분한 양의 엘의 정수를 얻을 수 있었다. 
 여관방으로 돌아온 사내는 무엇을 하는 것인지 근래 들어 방에서 통 나오질 않았다. 무언가 연구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 여관 주인은 특히나 그의 방 주변이 시끄럽지 않게 관리하며 제일 구석진 방을 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방 안에서는 다이너모가 분주하게 시뮬레이션을 실행하고 있었고 모든 것을 감독하는 관리자는 기계만으로는 부족한 듯 조바심이 난 표정으로 손수 여러 가지 가능성들을 수학적으로 검증하고 있었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세운 가설들을 차례차례 지워나가던 사내는 점점 그가 찾는 해답에 가까워져 갔다. 비록 그것이 지속적인 ED 소모를 부를지라도 더 강해질 수 있다면, 그래서 더 수월해 질 수 있다면, 그래서 어머니께서 나소드 공학자로 성장한 자신의 모습을 자랑스러워하실 수 있다면. 오로지 그 생각을 하며 사내는 다시금 밤샘에 돌입했다. 


 익숙한 기계음이 가득 찬 귓바퀴에 규칙적인 신호음이 잡혔다. 며칠 간의 연산 끝에 엘의 정수 1개와 전투 중 사용할 수 있는 다이너모에 내장된 최대 에너지를 사용하여 1분 동안 신기술을 유지할 수 있는 코드를 완성하였다. 이와 동시에 누수 되던 에너지를 흡수하여 지속시간을 안정적으로 만들고 공격력을 상승시켰으며, 메모리를 압축하여 대상을 소환한 후에도 다이너모는 개별적으로 전투를 계속 할 수 있게 개조했다. 더불어 대상이 뇌파를 추적해 자신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코드를 추가하여 제 곁에서 일정 거리 이상 떨어지지 않고 주변으로 몰려드는 적들을 섬멸할 수 있게 수정했다. 남은 것은 원하는 결과가 나오는지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멀리서 폭주한 몬스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마족에게 오염되어 제정신이 아닌 것을 섬멸하고 모래바람에서 벗어날 시간이 도래한 것이다. 몬스터를 마주하기 전에 사내는 지난 세월을 잠시 돌아보았다. 엘 에너지를 모으기 위해 고대 설계도를 연구한 것과 인공지능을 위해 알테라를 이 잡듯이 뒤졌던 시절. 그리고 마침내 완성한 궁극의 기술을. 추억에 빠진 그의 기척을 느꼈는지 베히모스가 사내를 노려보며 포효한다. 주인의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모인 6개의 수족에게 사내는 짧게 명령했다.
 
“Good day to die.”

묵시록의 시작이었다.

 때 아닌 늦은 밤. 어린 공학소년은 스크린을 켠 채 다이너모의 업그레이드에 집중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가족이자 친구 역할을 해 온 이 물체는 소년을 세상으로부터 지켜줄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그것을 강하게 발전시키기 위해 오늘도 밤샘 연구를 지속하고 있었다. 에러가 나기 전까진.

 

"...뭐야. 이거 왜 이러는 거야."

 

 작게 시작한 알람소리가 점점 커져서 이내 모든 스크린들이 연주하는 불협화음이 되었다. 어쩔 줄 몰라 허둥대자 각각의 악기들은 자신을 연주하는 연주자에게 제 주인은 인도했다.

 정신을 차리고 본 것은 난생 처음 보는 공간. 작열하는 푸른색이 검은 하늘에 균열을 긋고 있는 곳이었다. 자신의 연구가 이곳으로 이끈 걸까, 잠시 생각했으나 시공간에 손대지 않았던 것을 고려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원인은 외부에 있을 것이다.

 

"언제든지 찾아와도 된다고 했지? 내 여흥을 위해서."

 

 기분 나쁘게 웃는 상대는 어느날 자신의 앞에 나타났었던 가면의 남자였다. 어딘가 음습하고 불길한 기운이 느껴져서 보는 순간 이맛살을 찌푸렸었는데 트락들에게 잡힐 뻔한 걸 막아줬던지라 차마 부탁을 거절하지 못 했었다. 한참을 말없이 노려보고 있으니 상대쪽에서 음악의 주제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내가 널 부른 이유는 너에게 가능성을 제시하기 위함이다. 네가 너무 한 가지 길만 고집하는 것 같아서 시야를 넓혀주기 위해 불렀달까? 무릇 공학자라면 가능한 모든 가능성을 검토해야 할 필요성이 있으니까."

 

그게 자신과 무슨 상관일까. 남의 일에 신경꺼라 반박하는 것조차 귀찮아서 이맛살을 찌푸리며 쏘아보니 특유의 불쾌한 키득거림과 함께 남자는 시공을 열었다.

 

"들어갈 수는 없지만 볼 수는 있는 거울, 지금부터 3가지 가능성을 보여줄 테니 잘 보도록."

 

거울의 수면이 흔들렸다. 점점 가라앉는 의식 속에서 소년의 시야가 흐려졌다. 무릇 생명체는 자신의 시간이 아닌 곳에서는 이방인이고, 이방인에게 타인의 시공간은 허락되지 않은 것이다. '들어갈 수는 없지만 볼 수는 있다'는 무슨 뜻이었을까.

 

 

Ch1. Phsycic Tracer

 

 굉음과 함께 떨어진 곳은 알테라코어. 이곳은 예전에 자신이 퐁퐁거리는 녀석들의 부탁으로 잠시 갔었던 곳이었다. 공간 자체는 어렵지 않았으나 중앙부까지의 거리가 길고 나소드킹이라는 제법 성가신 녀석이 살던 곳이었다. 주변을 살피자 앞에 주먹을 휘두르며 맨 몸으로 나소드들을 처치하는 다소 정신나간 녀석이 보였다. 눈이 반쯤 풀린 것이 미치광이라 봐도 손색 없을 것 같았다. 근육도 엄청 났고... 자신과도 많이 닮았다. 머리가 삐죽삐죽하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정신없이 구경하던 중 나소드 한 마리가 자신이 있는 쪽으로 왔다. 다이너모를 전투모드로 전환하며 파티클 액셀레이터를 쓰려던 찰나 앞에 선 남자의 공격에 부서진 나소드 파편이 자신을 통과해 나동그라졌다. 남자는 파편을 보지도 않고 알테라 코어의 중심부로 들어갔고 소년은 추스를 세도 없이 남자를 따라 중심부로 들어갔다. 다소 죽이기 귀찮은 나소드킹이 자리를 잡고 남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뒤로 이어진 것은 자신도 잘 아는 수순. 에너지를 부수고 코어 장치를 노출시키는 것. 소년은 그 간의 전투장면을 분석하며 이 남자가 자신보다 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몇몇 기술은 자신도 아는 것이었지만 특정 수준 이상의 것들은 전혀 생각지 못한 것들이었다. 마지막으로 본것은 손쉽게 수중에 넣은 물건을 보며 미친듯이 웃어재끼는 남자의 얼굴이었다.

 

Ch2. Arc Tracer

 이번에는 어디로 온 걸까. 답을 채 알기도 전에 커다란 돌덩이부터 날아온 것을 보면 이곳은 페이타의 깊숙한 지하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 듀터가 마족의 녹색으로 물들인 연기가 방안에 가득했다. 그리고 그 녀석과 대치하고 있는 코트를 입은 남성은 어줍짢다는 표정으로 마족을 깔아보고 있었다. 자신은 이곳에 들어왔다가 애꿎은 다이너모만 박살난 채 돌아와서 더 기분이 나쁜 곳, 자신과 닮은 듯 닮지 않은 남성은 과연 어떻게 할까. 기대하며 눈을 깜빡인 순간 상황은 이미 정리되어 있었다. 어느새 소환된 정육면체는 불길한 기운을 내뿜으며 먹이를 갈구하듯 날카로운 소음을 내고 있었고 남자는 그대로 에머시스트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 이후의 상황은 일순. 별다른 손도 쓰지 않았는데 하늘에서는 빛이 쏟아져내리고 다이너모는 자수정을 집중 사격했다. 기운이 쇠한 녀석이 비틀비틀 일어나자 남자는 조소하며 최후의 심판을 내렸다. 심장을 꿰뚫은 일직선의 에너지가 소년의 시야를 마비시켰다.

 

Ch3. Time Tracer

 또 다른 이색적인 공간. 아직 얘기만 듣고 미처 가보지 못한 이곳은 마족들이 들끓는 곳이었다. 언젠가 더 강해지면 가보고자 했던 벨더 전장의 중앙부. 제법 멀면서도 가까워보이는 곳에서 왜인지 마족들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허공에서 허우적대며 떨어지는 모습이 흡사 분수대에서 뿜어져나온 물 같다. 호기심을 안고 가까이 다가가자 새까만 남자가 에너지를 분출하며 마족들을 소탕하고 있었다. 아니, 소탕보단 죽인다가 맞아라고 생각하며 소년은 가까이 다가갔다. 다소 독특한 모양의 다이너모와 남자 주변에 생성되어 있는 흑자색의 균열들이 그가 정상이 아님을 알려주었다. 하늘을 수놓는 마족들을 보며 소년은 남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새까만 흑자위와 눈이 맞았다. 심장을 꿰뚫는 듯한 통증에 소년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자신을 본 것인지 그것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남자 주변에서 증가하는 균열들과 증폭되는 에너지에 저항할 수 없음은 확실했다. 터질 듯 조여오는 심장에 비명이 새어나오기 직전 남자가 외친 명령어는 소년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역시 나약하군."

 

얼마나 잔 것일까. 검푸른 공간에서 눈을 떴다. 새까만 암흑과 기분 나쁜 웃음소리. 그것이 소년의 의식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저것들은 뭐야."

"큭큭큭... 글쎄."

"나랑 전부 똑같이 생겼어. 설마, 저게 전부 '나'인가?"

"다행히 머리는 안 다쳤나 보군. 자,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가능성은 다 보여줬는데 어느 게 가장 마음에 들지?"

 

흰 색 코트. 가장 강해보이고 안정적인 것은 그 사람 같았다. 그러나 전투스타일을 볼 때 그 경지에 오를 정도면 이 사람도 가히 정상은 아닐 거란 것이 소년의 판단이었다. 첫 번째 남자는 다이너모보단 육신을 강화시키고 그를 보조하기 위해 다이너모를 이용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세 번째는...

 

"마지막으로 보여준 녀석... 뭐하는 녀석이야?'

"그 녀석? ...직접 알아보지 그래? 기회가 된다면."

 

 킬킬거리며 웃는 모습이 꼭 나중에 만날 거라는 확신을 주는 듯 해서 더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악마 같은 눈이 자신을 꿰뚫어봤었다. 가학적으로 비웃는 모습에 심장이 내려앉았었다. 아니 파열했었다. 뭘까. 어떻게 된 걸까. 그는 어쩌다가 그렇게까지 망가진 걸까. 혼란스러움에 욕지거리가 혀끝까지 치밀었는데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면의 남자는 태연히 말을 이었다.

 

"무릇 시공간은 한 사람당 하나씩 주어진 것. 타인의 시간을 보는 것도 범죄이거늘 그 시간에 개입하려 했다면 그 정도 형벌은 극형도 아니다. 남의 것을 탐하지 말라는 말이 괜히 있을리가."

 

흔들리는 소년에게 시공간의 관리자는 속삭였다.

 

"그래서, 너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미래의 변절자 아크 트레이서."

 

자정이 넘어가자 급하게 뛰어가는 발소리가 울린다. 통, 통, 통, 급하게 뛰어가는 모습이 시계에 쫓기는 토끼와 겹쳐졌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것은 시계 대신 녹색 액체를 통, 통, 통 흘리며 뛰어가고 있단 것 뿐. 계단을 사뿐사뿐 올라 이곳에서 가장 낮은 층에 사는 그들의 군주에게 달려간 자는 이곳에 사는 쥬비기들을 대표하는 가장 큰 쥬비기였다.

"오버로드님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매애애애-."

크게 울부짖은 플랜트 오버로드 세 마리가 천천히 일어섰다. 원래 이곳을 벗어나는 일이 없지만 한 해 딱 하루 그들이 윗층으로 올라가 다른 하급 몬스터들과 어울리는 날이 있었다. 쥬비기는 영광스런 표정으로 길을 안내했다. 이곳에서 가장 오래 살았으며 이곳을 창시했다 일컬어지는 플랜트 오버로드는 지하정원에 사는 식물들 중에서도 가장 크고 강했다. 셋이 함께 생활하는 공동체였는데 이들이 어디서 어떻게 탄생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저 이들이 이곳에 처음 뿌리내린 식물들이며 현재의 지하정원을 만들고 이곳에서 죽어가던 식물들을 되살린 자들이란 것 외에는 식물들 사이에 딱히 더 알려진 것이 없었다.
 무너질 것 같은 소음이 잦아들고 마침내 지하정원의 중간층에 도착한 오버로드는 공터의 정중앙에 등을 맞대고 자리를 잡았다. 음침한 마을에서 가장 음습한 곳에 사는 몬스터들은 한 번 자리를 잡으면 이동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다같이 모이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였고 이내 장내에 모인 모든 주민들이 신호를 기다렸다. 정적.

"......... 매애애애-!"

세 오버로드의 우렁찬 울음소리를 필두로 쥬비기들이 스위치를 눌렀다. 언제 설치되었는지 모를 스피커에서 음악이 터져나오자 몬스터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파티를 즐기기 시작했다. 이곳을 지키는 글리터 병사들 또한 창과 방패를 내려놓고 시간을 즐겼는데 춤을 추기보단 술을 마시거나 고기를 뜯는 류가 많았다.
  쥬비기들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좌우로 흔들거나 서로의 엉덩이를 부딪히면서 박자를 탔다. 여럿이 모여 고개를 넘기도 했고 적당한 타이밍에 독을 터뜨리기도 했다. 남을 잘 따라다니는 습성 때문에 무리지어 다니는 군락을 다른 군락이 따라가기도 했는데 돌아다니다 글리터 병사들을 만나면 서로 약속이나 한 듯 독을 터뜨렸다고 한다.
 변이된 덩굴줄기는 비트에 맞춰 바닥을 후려쳤는데 거대한 음악 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일부는 모여서 쥬비기를 들어올려주기도 하고 술에 취한 글리터나 친구와 떨어진 쥬비기를 묶고 괴롭히기도 했다. 일부는 다크 드로세라의 눈을 감아 시야를 차단했는데 참다 못한 드로세라가 뿌린 독에 중독되어 근육통을 앓았다는 후문이 있다. 
 다크 드로세라는 생김새 때문에 격렬한 춤을 출 수는 없었지만 특유의 거대한 손과 유연성으로 파티를 즐겼다. 바닥을 후려치는 덩굴줄기들과 함께 박수를 치거나, 음악에 몸을 맡긴 채 흔들흔들 거리며 독을 내뿜는 녀석들이 대부분이었다. 일부는 술에 취한 글리터들을 흠씬 두들겨패기도 했는데, 글리터 병사와 다크 드로세라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었으나 소문에 따르면 난폭해진 글리터 병사들이 식물들을 자주 괴롭혔다고 한다.
  가장 조용하게 파티를 즐기는 군락은 썬더플라이들이었다. 이들은 조명을 대신하였는데 여럿이 모여서 허공의 이곳 저곳에서 터질 뿐인지라 이들이 상황을 즐기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음악이 점점 커지고 파티의 열기도 차차 식어갈 즈음 장내가 쥐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파티의 끝을 알리는 양의 울음소리가 끝나자 이곳의 주인들은 육중한 몸을 이끌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들이 나가는 것을 지켜본 다른 몬스터들도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고 글리터 병사들 또한 다시 창과 방패를 들었다. 허공에서 가장 밝게 빛나던 썬더플라이들도 어둠 속으로 숨어버리자 지하정원에는 평소의 냉혹한 정적만이 감돌 뿐 아무 소리도, 아무 생명도 느껴지지 않았다. 잠시나마 활기를 품었던 정원은 다시 검은 독을 품고 잠들었다.



"할아버지-! 할, 아, 버, 지-!"

정원에서 나소드를 들고 달려온 손자는 오늘도 제 할아버지를 애타게 찾았다. 책을 보고 있던 위로 뻗친 듯한 헤어스타일의 노인이 달려오는 남자아이를 품에 안는다.

"할아버지, 저번에 해주신 얘기 또 해주세요."

해맑은 미소를 무릎에 앉히며 나이 지긋한 신사는 운을 뗐다.



옛날 옛날에, 아주 먼 옛날에, 은색 합금으로 만든 구조물 안에서 세 형제가 살았단다. 첫째는 활발한, 둘째는 괴짜스런, 셋째는 겁이 많은 아이였지. 그러던 어느 날 첫째가 둘째가 벽과 대화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됐어. 다른 사람은 이상하게 여겼겠지만 집중력이 병적으로 세지면 나타나는 둘째만의 습성이었기 때문에 첫째는 지병이 도진 것이라 생각했단다. 연구에 몰두하다 보면 종종 허공과 얘기하곤 했거든. 그런데 어느 날은 지나가던 셋째가 열린 방 문 틈으로 둘째의 웃음소리를 들었어. 방해받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둘째 형이 연구 중에 방문을 열 리 없었기에 셋째는 인사를 하려 했단다. 그러나 이어진 건 둘째의 웃음소리 뿐이었어. 벽 쪽으로 몸을 돌린 채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것 같았는데 셋째의 눈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거든. 겁이 난 셋째는 발소리를 죽인 채 첫째에게 갔단다.

"큰 형, 큰 형 있어? 작은 형이 이상해."
"그 녀석 이상한 게 한 두번이냐."
"근데 이번에는 좀 많이 이상해. 누군가랑 대화하는 거 같은데 아무도 없어."
"그 녀석 원래 연구하다가 혼자 떠들곤 해. 밤마다 떠들어대서 시끄러 죽겠어. 방도 많은데 옮기든가 해야지 원.."
"그래고 평소랑은 다른 거 같은데 좀 가 봐. 빨리 나와봐. 이상하다고!"

셋째의 성화에 못 이겨 첫째는 그와 함께 둘째의 방으로 갔단다. 열린 문 틈으로 둘째의 웃음소리가 이어졌고 겁에 질린 셋째와 달리 첫째는 짜증스럽단 표정으로 문을 벌컥 열었어. 둘째가 연구를 시작한 이레로 잠을 거의 자지 못했기 때문에 첫째는 짜증이 쌓일 대로 쌓인 상태였지. 시끄럽다 쏘아붙이려고 방문을 벌컥 연 순간 둘째는 배를 잡고 바닥에서 뒹굴고 있었단다.

"풉...푸핫...푸흐흐...크하하학!!"

자지러지게 웃던 둘째가 타인의 존재를 알아차리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어. 한참만에야 제 형제들을 발견했는데, 한 말들은 평소와 다름없는 것들이었지.

"...문 열려 있었냐?"
"어. 그리고 너, 밤에는 좀 조용히 해. 시끄러워서 잘 수가 없잖아!"
"용건은 그것 뿐?"

끄덕이는 첫째와 달리 셋째가 우물쭈물거리다 겨우 물었었지.

"...형, 괜찮은 거지?"
"응. 멀쩡해."

헤실거리는 표정이 다소 이상했지만 나가자는 첫째의 성화에 셋째는 끌려나왔을 거다. 아마도.

"봤지? 멀쩡하잖아."
"......그래도 이상..."
"너도 좀 익숙해져라. 도대체 몇 년이냐? 네가 저 녀석 이상하다고 할 때마다 가보지만 멀쩡하잖아. 본인이 괜찮다잖아? 신경 끄고 네 연구나 해."

첫째는 셋째에게 딱밤을 때린 뒤 방으로 돌아갔어. 복도에서 셋째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방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끊겼었지. 그 뒤로 셋째가 둘째 형에게 가보자는 말은 하지 않았었던 것 같구나.

사건이 터진 것은 여름날이었을 거다. 불볕더위가 유난히 기승을 부리던 해였지. 여기서부터는 나도 전해들은 이야기니 조금 안 맞을 수도 있을 거다. 궁금하면 네 작은 할아버지에게 물어보렴.

시간은 오후 1시경. 한참 해가 높을 때라 첫째는 방에 늘어져있었어. 갈증을 못 참은 셋째는 부엌으로 물을 마시러 갔는데 부엌 뒷문으로 둘째가 나가는 것을 봤단다. 뒷문은 뒷마당으로, 뒷마당은 산으로 통하는 곳인데 수풀이 우거져서 음침하기 짝이 없었어. 여름에는 녹음이 무성해서 햇빛이 거의 들지 않았고 습했지. 겨울에는 앙상한 가지들이 귀신이 숨어있는 것처럼 서늘했단다. 평소 쾌적한 것을 선호하는 둘째가 왜 그런 곳으로 가는지 궁금했던 셋째는 소리를 죽이고 뒤를 밟기 시작했어. 도착한 곳은 나무로 만든 허름한 헛간. 그 집을 살 때부터 뒤에 있던 건물인데 그게 어떻게 쓰였는지에 대한 가설은 아주 많았지. 좋은 용도로 쓰이지 않았다는 소문이 많아서 비교적 싸게 살 수 있었는데 그 부동산 업자가...... 크흠. 이야기가 옆으로 샜구나. 미안하다. 그래, 어디까지 얘기했지?

 둘째를 따라간 셋째는 그 허름한 헛간에 도착했어. 헛간 내부 벽면에는 여러가지 도형들과 공식들이 적힌 종이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단다. 간간히 그림들도 보였는데 유독 정육면체가 많았어. 모두 둘째의 손글씨로 쓰인 것들이었고 그것들은 연구자료처럼 보였지만 무슨 연구인지는 알 수 없었단다. 셋째는 충격을 받아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는데 헛간 밖에서 둘째의 목소리가 들렸어. 고양이들이 잘 먹는다는 참치를 땅에 내려놓고 허공을 쓰다듬기도 하고, 작게 웃으며 '나비야-.'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이 실제 고양이를 대하는 것과 비슷했다고 하더구나. 셋째는 겁이 나서 집으로 달려와 첫째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첫째는 근처 정신과 병원에 전화를 한 뒤 둘째에게 달려갔단다. 여전히 고양이를 쓰담는 듯한 행동을 하는 둘째 앞에는 부식되어가는 가득 찬 참치캔이 놓여 있었어.

병원 복도에서 무심한 표정으로 기다리니 의사가 첫째와 셋째를 불렀어. 그리고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차트에 열심히 적더구나. 그리고 5시간 쯤 뒤 종이 한 장을 내밀었어. 그것을 유심히 보던 첫째와 셋째는 둘째를 정신과 병원에 입원시켰단다. 그들은 거기서 모든 사건이 끝난 거라 생각했고 다시 평화로운 나날들이 돌아왔단다.



"그래서 둘째는 어떻게 됐어요?"
"그 녀석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끝내 호전되지 못 했다고 들었다."
"그럼 병원에서 죽은 거에요?"
"......그렇다라고 봐야겠지."
"......안타까워요. 첫째와 셋째가 조금만 신경써줬어도 괜찮았을 것 같은데..."
"세상에는 인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들도 많단다. 이런, 벌써 세 시구나. 간식 먹을 시간이다."

*

"아버님, 작은 아버님 오셨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몇 년 전 과부가 된 며느리가 나가자 방의 주인보다 조금 젊어보이는 노인이 들어왔다. 그는 키가 큰 편이었는데 살집 하나 없는 몸 때문에 더 커 보였다.

"형, 왜 안 왔어?"
"뭘?"
"어제. 둘째 형 기일이었잖아."
"......"
"적어도 기일정도는 챙겨야 하는 거 아냐? 양심이 있어야지."
"난 그 녀석 보고 미치라고 한 적 없어."
"작은 형이 자신을 정신과 병원에 입원시키라고 한 적도 없어."

잠시간 살벌한 기운이 방 안에 감돌았다. 형을 노려보던 노인은 성큼성큼 다가와 형이 보고 있던 종이를 빼앗았다.

"맨날 일만 하면서 하루 정도는 빼도 상관없는..."

사락. 소리없이 카펫 위에 떨어진 종이를 말없이 주우며 형은 동생을 타일렀다.

"이미 오래 지난 일이고 더 이상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야. 그 당시에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었어. 병원에 입원까지 시켜줬잖아? 회복하지 못한 건 그 녀석이 나약했기 때문이야."
"...나 며칠 전에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형은 그 병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었다면서?" 
"겨우 그것 때문에 온 거야?"
"겨우 그것? 둘째 형이 치료라는 미명 하에 받은 건 오늘날의 고문과 다름이 없어. 근데, 겨우 그것이라고?"
"처음에는 약물치료를 했어. 근데 그게 안 들었잖아? 병원 측에서는 그 녀석을 치료하기 위해 애썼어. 그래서 최후의 수단을 사용한 거고. 병원이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의료행위를 행하겠다는데 보호자로서 그걸 막는 건 환자를 방치하는 것과 다름이 없어."
"아니, 그건 막을 수 있었어. 알아보니까 둘째 형에게 약물치료로서 복용됐다는 약, 환각제다더라. 형은 알고 있었지?"
"...아니."
"거짓말."
"진짜 몰랐다 그건."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그 병원은 오래 전에 폐업했어."
"그럼 그 때 작은 형 주치의와 담당 간호사, 아니 담당 의료진 전부를 찾아내서 대가를 치르게 해! 그게 형 일이잖아?"

형은 동생의 분노한 얼굴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알아본 뒤에 연락하겠다고 말했다. 형을 수상쩍게 노려보며 나가는 동생의 뒤를 막연히 담배만 피우며 바라보던 노인은 긴 시간동안 생각에 잠겼다.

"...여보세요?"
"오랜만이군."
"아, 안녕하십니까, 루나틱 사이커님. 바꿔드리겠습니다."

루나틱 사이커라 불린 노인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잠시 일처리 중이였습니다. 무슨 일이신가요?"
"내가 이전에 한 일에 대한 정보가 남아있는 것 같군. 일부는 새어나간 것 같고. 내가 부탁한 정보 세탁은 제대로 진행된 건가?"
"네. 아는 사람 모두를 처리했고 입막음을 했는데 뭔가 착오가 있었나봅니다. 제가 직접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다시 나서는 일은 없길 바라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일이 끝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한 모금. 두 모금. 담배를 세 모금 째 들이마시며 루나틱 사이커는 자신이 주워든 종이를 보았다. 몇 십년을 서랍장 속에 간직해 둔 그것. 오늘 태워버리려고 했는데 계획이 어그러진 것 같다. 태우는 대신 그는 웅얼웅얼, 종이의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진단서
환자명: 아크 트레이서
나이: 18
증상: 헛것을 보며 현실과 공상을 구분하지 못한다. 자주 혼잣말을 하며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다.
병명: 정신분열증으로 판단되어 입원 후 정기적인 치료를 받아야 한다.
특이사항: 약물주사가 통하지 않을 경우 다른 방법을 사용할 것.
치료현황: 3주 간의 약물치료. 효과 없음. 2차 방법으로 치료 시도.
               2차 치료 중 환자가 병원을 탈출하려함.
               2차 치료 4주간 진행. 환자의 불안정한 상태가 심해짐.
               환자의 5번째 탈출 시도 후 보호자가 퇴원 수속을 진행."

노인은 서랍장에서 다른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그 종이에 적힌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의뢰서
의뢰인: 사이킥 트레이서
피의뢰인: 아크 트레이서
나이: 18

치료현황:
 약물의 효과가 잘 들음. 환각제의 효과가 나타나 증상이 더욱 심해짐. 환각, 환청, 그에 따른 기타 증상들이 수반됨. 3주간 실행.
 심폐소생술에 사용되는 기계를 관자놀이에 대고 전기충격 시도. 증상이 더욱 악화됨. 4주간 실행.
 피의뢰인의 병원을 탈출하려는 행동이 심화되어 의뢰인에 의해 퇴원.
비고:
 제정신으로 돌아오긴 힘들 것으로 추정.'

루나틱 사이커는 서랍장에서 꺼낸 종이를 한참 동안 보았다. 종이가 타들어가며 매캐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재만 남은 것을 확인한 뒤 노인은 손자의 방으로 갔다. 평온하게 잠든 아이의 얼굴에 주름진 손길이 스쳤다.

"내가 네게 거짓말을 했구나."

깊게 잠든 손자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안심한 할아버지는 손자에게 소곤소곤 비밀얘기를 했다.

"둘째는 퇴원을 했단다. 하지만 그의 정신은 돌이길 수 없이 망가져 있었고 형제들은 그가 더 이상 회복될 수 없다 판단했지. 그래서 그들은 둘째를 선한 목적으로 썼단다. 사람을 더 강하게 만들기 위한 실험의 재료로서 말이다."

노인은 손자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더없이 부드러움 음성이 속삭였다.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보다 강한 사람이 생기는 것을 매우 싫어한단다. 나중에 네가 나보다 강해지기 전에 내가 죽어야 할 텐데... 아니면 네 아빠처럼 너도 똑같은 꼴을 당하게 될 테니 말이다."

노인의 얼굴의 인자한 미소가 속삭였다.

"잘 자거라 애드."


***


"반장님, 오늘도 야근이십니까?"
"...들어가야지."
"저녁부터 무슨 파일을 그렇게 심각하게 보세요?"
"아무것도 아니야."
"......"
"별 거 아니니 신경쓰지 말고 퇴근해."
"예. 내일 뵙겠습니다."

직책에 비해 제법 젊어보이는 형사는 미제 사건파일을 읽고 있었다. 매섭지만 제법 서러운 눈빛의 노형사는 스크린을 뚫어져라 노려보다가 파일을 닫았다. 그는 사연 많은 형사였는데 원래 과학자였던 그가 경찰이 된 건 몇 십년 전에 의문스런 죽음을 맞이한 그의 형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가 보고 있던 파일의 내용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미제사건 보고서
타입: 형사
사건 당시 담당자: 로드 나이트(은퇴)
현 담당자 : 디아볼릭 에스퍼 
피의자:
피해자: 아크 트레이서
사건요약: 인근 야산에서 훼손이 심한 시체 한 구 발견. 한쪽 눈이 없었으며 구타의 흔적이 있다. 주삿바늘로 인한 멍자국과 불법 수술의 결과물로 의심되는

             흉터들이 수십개.
비고: 공소시효 만료로 인해 수사 종료. 학대 빛 불법적인 의료 행위로 인한 쇼크사로 추정.'


"루사아아아아!"

오늘도 여지없이 들려오는 고함소리에 애드는 혀를 찼다. 한 두 번 있는 일이었다면 무슨 일인지 궁금할 법도 했겠지만 이미 여러 차례 있는 일이다 보니 별 감흥이 없다. 한 가지 흥미를 끄는 점이 있다면 이번엔 또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정도였다.

"내가 내 연구자료에 손대지 말랬지이이!!!"
"마마, 그게... 아악! 잘못했어! 잘못했다고 마마!"

하아-.
절로 한숨이 나온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저 분들은 내 가족이다. 두 분 다 남자이며, 썩 닮은 생김새에 타인들은 터울이 긴 형제나 사촌, 또는 삼촌과 조카 정도의 관계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건넛방에서 열심히 두들겨 맞고 있는 것은 아버지 루나틱 사이커이며 자신보다 덩치가 큰 사내를 열심히 패고 있는 사람은 아마도 어머니라 불러야 할 마스터마인드다. 그리고 나는 갓난아기 때 입양된 입양아이다.


상황이 조용해진지 1시간쯤 지났다. 이쯤되면 바깥 상황이 정리되었을 것이다.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조용히 거실로 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가 식탁의자를 든 채 벌을 서고 계셨다. 무릎을 꿇고 공손하게 있는 모습이 꼭 기 죽은 강아지 같다.

"아버지, 이번엔 뭐 하셨어요?"
"...알 거 없어."
"또 공식 지우셨어요?"

뜨끔하는 표정을 보니 맞나보다. 아버지 루나틱 사이커, 줄여서 루사는 어머니인 마스터마인드, 마마의 데이터를 가끔 지우곤 한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므로 이것은 방에 들어가면 나오지 않는 어머니의 습성 때문에 생긴 일종의 버릇이라고 판단된다. 그도 그럴 것이 들어가면 몇 날 며칠, 길게는 한 달 이상 홀로 방치되니 참다 못한 아버지께서도 강경책을 사용하시는 것 같다.

"애드, 잘 들어. 마마가 들어간 지 오늘로 딱 한 달째야. 그리고 이게 벌써 5번째지. 나는 더 이상 이런 방치를 용납할 수 없어서 가만히 있지 않기로 결정했어."

 저 말을 들은 게 아마 1년쯤 전이었을 거다. 의아하게 쳐다보니 의미심장하게 웃기만 하던 아버지가 다음 방치 때부터 하기 시작한 일이 바로 데이터지우기다. 그럼에도 어머니의 성격이 무서워 처음에는 지워져도 크게 상관없는 데이터들만 지운 것 같았는데 그게 별 효과가 없자 그 때부터 지우면 안 되는, 꽤 중요한 공식들만 골라서 지운 것 같다. 예를 들면 그 공식이 없으면 더 이상 연구가 불가능하다거나, 다시 알아내기에는 시간이 아까운 공식들이라든가.
 데이터가 지워질 때마다 어머니는 불같이 화를 내셨고, 그 때마다 아버지는 벌을 서셨다. 그러다가 약속된 시간이 지나면 아버지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셨고 어머니는 내게 저녁을 주신 후 한숨을 푹푹 쉬며 아버지의 방으로 들어가셨다. 그리고 두 분 모두 다음날 늦은 오후나 되서야 나오셨다. 어머니의 연구가 길었던 날들은 이틀이 지나도 나오지 않아서 내가 노크를 한 적도 꽤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마지막 데이터 지우기가 있은지 한달이 지났다.

"마마아아아아!"

예상한 것과 반대쪽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바야흐로 아버지가 연구로 칩거를 시작한 지 일주일째. 잠깐 화장실을 다녀오시는 사이 어머니께서 아버지 방으로 들어갔다가 킥킥거리면서 나오시는 것을 봤다.

"이걸 지우면 어떡해!!!"

그대로 어머니의 연구실로 처들어가는 아버지를 보며 생각했다. 이번엔 어머니가 벌을 서시겠구나... 곧 펼쳐질 것 같은 재밌는 장면을 상상하며 방 문 틈으로 엿보았으나 기대와는 다르게 복도는 금새 조용해졌다. 어떻게 된 건지 궁금하여 방에서 나와 살금살금 다가가 어머니의 방문에 귀를 대보았다. 깨달음은 금방 왔다. 이번엔 어머니 방에서 며칠 나오지 않으실 것 같다.



오늘도 데이터를 분석하러 책상 앞에 앉은 주인님은 특유의 기품과 냉정함을 발산하고 있다. 지금의 주인님을 처음 본 건 약 10년 전 쯤이었다고 한다. 기록에 확신이 없는 건 데이터의 유실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초기의 다이너모가 아니다.

주인님은 강해지길 원하셨다. 누구보다 빠르고, 강하며, 그래서 다시는 자신을 업신여기는 자가 없게 만드는 것. 그것이 내가 모시게 된 주인의 유일무이한 목적이었다.

"...젠장! 결과가 예상값과 다르잖아!"

이미 충분히 강하신 것 같은데 여전히 힘을 갈구하는 주인님은 특유의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종이를 집어던졌다. 강박증이 도진건지 이마를 짚은 모습이 힘겨워 보인다. 철야 17일째. 이쯤되면 내 동족이란 생각이 든다


고른 숨소리가 방을 지배한다. 평화로운 표정을 보니 오늘은 악몽이란 걸 꾸지 않는 것 같다. 망하지 않게 조심조심 이불을 덮어드리지만 유연성이란 기능은 없어서 기어이 뒤척이고 마는 주인님을 보며 팬소리를 죽였다. 다행히 더 움직이진 않았다. 행운이든 당연이든 목적을 달성했다. 주인님 의견대로 '쓸모없는 망할 고철덩어리'는 아닌가 보다.

다른 방에서 충전 중이던 주인님을 가장 오랫동안 지킨 나소드가 온다. 저것엔 나는 모르는 여러 데이터들이 암호가 걸린 채 보관되고 있다. 듣기로는 나소드 연구를 시작할 때부터 옆에 있던 것이라고 했다. 그 데이터들을 소장하고 싶었지만 나는 허락된 백업장소가 아니었다. 오래된 나소드가 길을 비켜준다. 배터리 잔량을 보니 더 이상의 기록은 불가능하다. 충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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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나간 녀석은 제일 마지막에 만들어진 것이다. 가장 반질반질하며 새 것이기에 성능도 좋다. 오래된 녀석들도 이미 부품 교체와 업그레이드를 통해 진화했지만 태생이 다른 것이 부럽다. 생물은 오래 살수록 연륜이란 기능이 생긴다고 하는데, 기계에게는 마냥 좋은 소식은 아니다.

새 것이라 그런지 녀석의 배포는 주인을 닮았다. 거침없이 목표를 향해 나간다. 공격적인 성향의 나소드를 원한 주인은 자신의 6번째 창작물을 가장 강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녀석은 내 데이터에 손을 대려 했다. 주인은 나를 퇴물쯤으로 여기는 반면 늦게 만들어진 녀석일수록 아끼는 것 같았다. 나를 볼 때는 심박수가 아주 안정적인데 저것을 볼 때는 미세하게 그 파동이 다르다. 그것은 주인이 매력적인 실험체를 발견했을 때 나타나는 파형과 비슷했다. 알만큼 아는 나는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나 보다. 보호할 데이터가 없었다면 이미 뜯겨서 새로운 다이너모나 드론을 만드는데 쓰였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나는 쓸모없는 망할 고철덩어리란 소리를 자주 듣는다.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상체가 건강해보이지 않는다. 철야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연구에 매진하던 것이 엊그제 같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저런 것일까.

"네 외관과 부품이 닳는 것과 비슷한 거야."

내 질문에 귀한 데이터인 놀란 얼굴을 잠깐 보여준 주인은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었다. 그런 쓸모없는 데이터는 쌓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 뒤로 명령이 아니면 대답하지도 질문하지도 않았다. 기계는 목적에 충실하면 되는 것이다.

이대로 허공에 떠 있으면 엘 아까운 줄 모른다고 할 것이다. 책상은 주인이 차지하고 있어서 앉을 수 없다. 주인을 옮기자니 '망할 고철덩어리'를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침대에 있자니 '빌어먹을 고철덩어리'를 들을 것 같다. 오늘 보초는 바닥에서 해야 겠다. 그나마 카펫이 깔려 있으니 저번처럼 흠집이 나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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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에드워드 그레노어. 날 찍는 것의 이름은 다이너모. 초기 프로토타입에서 많이 변화시켰지만 그래. 이 몸이 만든, 나소드다."

흔적도 희미한 오래된 기억의 소리가 들린다. 꿈인 줄 알았던 소리가 점점 선명해진다. 몽롱함과 다른 이질감에 꿈에서 느껴지는 선명함인지 가늠해보다 눈이 떠졌다. 돌아온 의식에 망막에 맺힌 것은 아주 오래된 기계, 내가 걸어온 모든 데이터를 저장하고 있는 나의 분신과 같은 다이너모였다.

"누가 함부로 꺼내보라고 했지?"

으름장을 놓듯 스크린을 꺼버리자 느리게 다이너모가 올라온다. 눈높이를 맞춘 스크린에 '죄송합니다.'란 간단한 문구가 뜬다. 한동안 뚫어져라 바라봤다. 다이너모는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는 것 같았다.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묻어버린 기억이 다시 살아난 것이 언짢을 뿐이었다.

"주인님."
"...뭐지?"
"나중에, 만에 하나 주인님께 아이가 생긴다면 이 이야기를 들려줘도 되겠습니까?"
"......넌 내가 아이를 갖길 바라냐?"
"......"
"결혼도 하고?'
"......"
"그딴 건 강해지는 데 아무런 도움이 안 돼. 오히려 약점이 될 뿐이야."
"이제는 힘보다 소중한 것을 찾으실 때도 되지 않으셨습니까?"

다이너모는 냉정했다. 나는 이미 흘러가버린 세월의 산물로서 지나간 과거에 대해 보상받을 수 없다고 했다. 추억도, 저택도, 과거도 새로 만들 수 없다고 했다. 어머니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러나 주인님을 닮은 아이에게는 다른 결말을 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나에게, 나와 닮은 나의 아이에게 새로운 미래를 주라고 했다. 그것은 가능하며, 기회가 된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내가 만든 것이지만 난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다이너모는 웃음소리 비슷한 것을 냈다. 그래봤자 녹음된 것이지만 왠지 그게 친근해서 웃어버리고 말았다. 다이너모가 조금 전의 소리를 조금 더 크게 냈다. 이 녀석이 미소짓는 걸 본 것은 내 착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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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그랬어?"
"예."

똘망똘망한 눈망울이 제법 주인님을 닮았다. 천진난만한 목소리에 심박수를 체크하니 다소 상기된 듯 하다. 평소보다 살짝 빨라져서 긴장했지만 건강에 위협이 되는 것은 아니라 판단되어 경보시스템을 껐다. 사내아이의 웃음소리가 울리더니 이내 자신의 우상을 찾는다.

"아빠! 아-빠-!"

저 멀리서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비척비척 걸어오는 주인님이 보인다. 얼굴엔 짜증이 가득했지만 연구소에서만 지내던 지난날의 어두운 빛은 없었다. 얼굴이 다소 상기되고 심박수도 평상시보다 빠른 것을 보면 들뜬 상태라고 추정된다. 사내아이가 달려가자 팔을 벌려 안아드는 모습은 익숙해 보였다.

"아빠, 다이너모가 아빠 어린 시절 보여줬어! 아빠가 다이너모 만들었데!"

주인님이 가장 오래된 것을 쏘아본 것 같지만 못마땅한 시선은 아이의 기습뽀뽀에 빠르게 사라졌다.

"내 나이에 아빠가 다이너모를 만들었데! 아빠 대단해!!"

아이의 심박수가 빨라져서 그런지 주인님의 심박수도 빨라졌다. 연결되어 있단 것은 서로의 상태를 공유하는 것인가 보다. 결혼을 하시고 아이가 생기신 뒤로 더 자주 미소지으시는 것이 기분이 좋으신 것 같다.

문득 오래된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져 그것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아까 있던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무슨 소리를 내고 있다. 작지만 사람의 웃음소리 같다. 아이를 안은 주인님이 그것과 점점 가까워졌다. 이후 내가 기록한 것은 짧게 이어진 낮은 웃음소리였다.

01 The unknown

오늘도 분주하게 움직이는 손을 보며 과거를 회상한다. 자신의 집착이 거대해져 스스로를 집어삼킬 즈음 만난 어린 녀석은 막연하게 눈을 반짝이며 형처럼 되고 싶다 말했다. 그 때의 나는 '내가 먼저 성공해서 도와줄게.'라고 했던가.

신경질적으로 연필 긁는 소리가 나더니 '뽀각' 이내 부러지고 만다. 머리를 헝클이는 손이 짜증스럽다는 듯 책상을 내려치기 직전 잠잠히 누워 있던 디아볼릭 에스퍼가 눈을 떴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책상 앞에 앉아 신음하는 어린 녀석이 보인다. 그 때의 꼬맹이가 컸다. 언제 저렇게 커버렸을까, 흘러가버린 세월의 무상함을 느낀 눈이 검게 변한다. 자신이 일어난 것도 모른 채 열중하고 있는 뒷모습에 에스퍼는 몸을 일으켜 비척비척 다가갔다. 부비적인 목 언저리가 따뜻하다. 그 따뜻함이 베개보다 부드럽다 느낀 것이 착각인지, 환상인지, 곰곰히 생각할 때 즈음 목소리가 들렸다.

"깼어?"
"하지 말랬잖아..."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이미 몇 달 전, 아니 몇 년 전부터 무의미해진 말이었다. 녹음된 말 밖에 반복 못하는 고장난 인형처럼 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각자의 의견밖에 주장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에스퍼와 타임 트레이서가 맺은 암묵적인 협상이었다.

"나 연구중이야."
"......"

매번 이런 식이다. 이골이 날 때도, 서로에게 화를 낼 때도 됐는데 그런 적은 초기의 몇 번을 제외하곤 전무하다. 이미 말이 안 통할 것을 알기에 서로 직감적으로 맺은 암묵적인 룰은 서로의 말을 막지 않되 한 귀로 흘려내는 것이었다. 이어지는 침묵에 타임 트레이서가 이마를 찌푸린다. 가뜩이나 철야로 몸이 무거운데 뒤에 자기보다 큰 녀석이 매달려있으니 어지간히 불편했다. 웬만하면 놔주길 바랐지만 며칠 간 자신의 철야를 묵묵히 넘어간 에스퍼가 쉽사리 풀어줄 것 같지 않았다.

"...알았어."
"오늘밤은 자는 거야?"
"......응."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니 돌아오는 미소가 환하다. 아름답다, 그렇게 표현해야 할까; 타임은 잠시 머뭇거리며 바라보다 계속 올라가있는 입꼬리를 따라 미소짓고 말았다. 연필을 내려놓자 기다렸다는듯이 자신을 들어올려 욕실로 간다. 언제 준비했는지 따뜻한 김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욕실 앞에 내려주며 이마에 입을 맞춘 사내는 기다린다는 말과 함께 방으로 돌아갔다. 가끔 자신이 완전히 녹초가 되어 버리면 같이 씻기도 하는데 오늘은 그럴 마음이 없는 것 같았고 타임은 그런 그를 구태여 붙잡지 않았다.
옷을 벗고 입욕제를 푼 뒤 물에 들어가 첨벙거리자 거품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수면 위를 가득 채운 거품들을 보니 어릴 적 어머니와 함께 했던 목욕이 생각났다. 나소드 미니어처들을 갖고 놀고 싶었지만 물기에 녹이 슬까봐 고무로 만든 노란색 아기오리와 플라스틱으로 만든 작은 배를 갖고 놀았던 것 같다. 그 다음에 무엇을 했더라... 녹진하게 풀어지는 몸에 저절로 눈이 감겼다.


눈을 뜬 곳은 자신의 침대 위였다. 어째서 공간이 바뀌어 있는지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을 안은 채 고른 숨소리를 내는 존재는 그에게 있어 우상과도 같은 존재였다. 자신과 닮은 사람 중 유일하게 자신과 같은 목표를 가진 사람. 그 사람이 어째서 포기를 하고 어째서 무기력해졌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여전히 그는 자신에게 성공의 아이콘으로서 인식됐다. 동경, 우상, 존경. 그런 단어들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찌부둥한 몸을 뒤척이자 선잠을 자고 있던건지 굳게 감긴 눈이 뜨인다. 깨끗한 시야를 확보하기 위한 몇 차례의 깜박임이 있은 후 에스퍼는 타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배고파."

아이같은 칭얼거림에 핀잔대신 잔잔한 웃음소리가 화답한다. 나른한 하품과 기지개가 이어지고 부엌으로 향하는 두 개의 발울림이 울린다. 깔끔하게 정리된 부엌은 두 사람의 옷과 상반된 흰색이었다. 앞치마를 두른 채 재료를 꺼내 물에 씻어 도마에 얹는 소리가 체계적이다. 차가운 물이 야채에 닿아 튀는 소리가 청량감을 주고 달군 프라이팬의 기름 냄새와 냄비 속에서 보글보글 끓는 역동감이 식욕을 자극한다. 이내 식탁 위에 차려진 것은 담백한 카레볶음밥과 뜨끈한 달걀국이었다.
식사 시간만큼 이 집이 시끄러운 시간이 또 있을까. 잔잔하게 식기가 식기에 부딪히는 소리가 화음처럼 이어지다 마침표를 찍는다. 다시 한 번 청량감을 과시하는 싱크대가 새로운 화음을 만들고 아직 물기가 덜 마른 접시들이 클라이맥스를 알린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은 뒤 연주되던 음악은 잘 정돈된 부엌으로 결론을 맺었다.

"어땠어?"
"맛있었어."

자신의 요리를 묻는 에스퍼에게 타임은 기쁜 마음으로 화답했다. 비벼먹는 수고를 덜어준 것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두 사람은 사이좋게 이를 닦고 침대 위에서 잠을 청했다. 연구가 고됐는지 유난히 칭얼거리는 작은 꼬맹이를 다 큰 사내가 안고 도담인다. 달빛이 구름에 가려 시야를 어둡게 만들 즈음엔 두 사람 모두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

청천벽력같은 일은 반복되던 일상에 쪽지 하나가 배달되었을 때 발생했다. 여느 때처럼 철야로 책상 앞에 앉아 있어야 할 녀석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곱게 접은 작은 쪽지 하나가 깨끗해진 책상 위에서 버젓이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피어오르는 의문보단 몰아치는 불안감에 쪽지를 펴는 행동이 다소 거칠었다.

'갖다올게.'

종이 구겨지는 소리를 시작으로 플라스틱이 마찰하는 소리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던 자료들이 하나 둘 순서를 잃고 어지러이 책상 위에 내팽개쳐졌다. 손이 주인의 신경질을 이기지 못 하고 힘줄이 돋을 즈음 드디어 찾던 내용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차율 5% 이하'

멍해진다. 보라색 동공이 넓어지며 흰 자위가 타락한다. 어째서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인지 원망스러운 마음이 검은 자위를 스멀스멀 물들였다. 분노는 아니었다. 슬픔도 아니었다. 이미 검게 변해버린 두 눈동자에 뜬 그것은 서글픔에 더 가까운, 뼈저린 회의감이었다.

'내가 말했다면 달라졌을까.'

아주 오래 전 자신이 썼던 쪽지의 내용을 떠올리며 바닥에 주저앉는다. 힘이 풀린 다리는 더 이상 그를 지탱하지 못 했다.
남자가 움직인 것은 한참이 지난 뒤였다. 급한 발걸음은 아직 되돌릴 수 있단 희망에서 비롯된 것일까. 바닥에 떨어진 쪽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02 My name is Add

문을 열어 당도한 곳은 푸른 잔디밭이 있는 벌판이었다. 둥근 언덕과 나무 한 그루, 실루엣만 어렴풋이 보이는 저택은 자신이 알던 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이전에도 본 적이 있었으나 그것은 자신이 알던 것과는 다른 것. 이번에는 저번과 다르게 오차율을 40%정도 줄였다. 무언가는 다르겠지라는 작은 희망을 가지고 타임 트레이서는 저택으로 향했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왼편에서 빨래바구니를 든 하녀 한 명이 인사를 했다.

"도련님, 다녀오셨어요?"
"...."

하녀는 타임의 기분을 살피더니 이내 작은 미소를 띄우고는 문을 조금 열어둔 채 저택으로 들어갔다. 일단은 이질감 없이 들어왔다. 어디선가 자신과 똑 닮은 또 다른 자아가 나타날까봐 조마조마했으나 그렇게 되면 어떻게든 피한 뒤 돌아가면 될 터였다. 타임은 용기를 내어 손을 뻗었다. 기름칠이 잘 되어 있었는지 부드럽게 문이 열리고 익숙한 느낌의 저택 내부가 시야를 채웠다. 자신의 등장에 지나가던 남자 한 명이 허리를 숙여 인사하곤 어머니는 방에 계신다고 말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어떻게 잘 아는지 의심스러웠지만 저를 찾고 있었을 수도 있단 생각이 들어 의심을 거두었다. 그럼에도 긴장은 더욱 날을 세웠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심장박동이 점점 빨라졌다. 긴장된 얼굴이 방문 앞에 섰다. 하나. 둘. 셋.

이어진 것은 침묵이었다. 꿈에서도 희미했던 미소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머뭇거림과 걱정, 아슬아슬함이 근육을 수축시켰다. 자신을 향하는 미소가, 자신에게 뻗은 손이, 지는 석양의 빛을 타고 자신을 불렀다. 가까이 다가가 방바닥에 앉아 머리를 기댔다. 살짝 놀라는 듯한 움직임이었으나 이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손길이 자신이 기억하던 것과 정확히 일치했다.

"오늘은 어딜 갔다 왔니?"
"...숲...에..."
"숲에?"
"숲에 산책 다녀..왔어요."

빙그레. 타임은 일순 성공했단 희열에 휩싸였다. 얼마나 바라왔던가. 이 재회를, 이 분위기를, 자신의 집을, 그리고 어머니를. 소년은 여인의 무릎에 이마를 비비며 어리광을 부렸다. 간절하게 바라던 것이 이뤄진 것 같아 이곳에는 자신과 똑같은 녀석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심지어 만약 그런 녀석이 있다면 자신의 손으로 없애버리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소년은 그 정도로 기뻤다. 그리고 그 기쁨에 도취되어 여인이 짓고 있는 환한 미소를 보지 못 했다.


좋은 옷, 좋은 음식, 이어지는 평온한 햇살들. 이렇게까지 행복했던 적이 있었는지 소설 속 주인공은 더 이상 기억하지 못 했다. 어쩌면 그는 기억할 필요성을 못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기존에 입고 왔던 옷을 깨끗이 빨아 옷장 한 켠에 걸어두었다. 자신의 수족처럼 아끼던 기계는 자신에게 붙은 여러 하인들로 대체되어 방 안의 궤짝 안에 잠들게 되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고 바라던대로 이뤄졌다. 그럼에도 가슴 한 켠이 아픈 이유를 그는 알 수 없었다. 자신이 바라던 것은 모두 여기에 있는데 어째서.

"애드 도련님, 부인께서 찾으십니다."

오늘은 어디로 가자고 하실까? 벌써부터 신이 났다. 어머니는 매일 자신과 소풍을 가주셨고 잔디밭에서, 들에서, 숲 경계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독서를 하거나, 낮잠을 자거나, 게임을 하거나. 가끔은 어릴 때처럼 나소드 미니어처들을 갖고 놀기도 했고, 평평한 나무밑동이 있으면 그 위에 나무블록들로 탑을 쌓아 하나씩 빼는 놀이도 했다. 어떨 때는 예전에 만든 게임을 하기도 했다. 나무로 만든 보드 위에는 테두리로 경계 지은 여러 지역들을 만들어 이름을 붙였다. 그 땅을 사면 그 위에 공장이나 가게 등을 만들어 나소드 관련 물품들을 판매할 수 있고 자신의 말이 다른 플레이어의 땅에 서면 그곳에 건설된 건물들을 고려하여 측정된 값만큼 돈을 지불해야 했다. 물론 말은 나소드 미니어처들이었고, 자신은 오늘날의 나소드 정찰병과 비슷한 것을 가장 좋아했다.
하루 하루가 꿈같은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너무 즐거웠고, 소년은 자신이 원래 이곳에 살던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더 이상 자신이 다른 차원에서 넘어왔단 생각은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이 원래 입고 왔던 옷은 새로 채워진 고급스런 옷들에 묻혀 잊혀졌고, 자신이 만들어낸 수족은 전원이 꺼진 채 궤짝 안에서 먼지만 쌓여갔다. 왼쪽 눈에 새겨져 있던 보라색의 흉터는 천천히 그 색이 옅어졌다. 어머니는 그것을 보며 흉터가 지지 않아 다행이라며 안도의 미소를 지으셨다. 여전히 가슴 한 켠이 쓰라렸지만 소년은 그것이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던 지병이며 얼굴에 난 흉터가 사라지면 다 나을 것이라고 믿었다. 타 차원의 소년이 이 저택의 애드가 되는 순간이었다.





03 Into the cage

하루, 이틀, 사흘, 나흘...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마음은 타들어갔다. 어째서 오지 않는 걸까; 의문은 들었지만 이미 답은 알고 있었다. 과연, 돌아올 수 있을까?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거란 생각이 엄습하자 두려움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간절했다. 그리웠다. 그렇기에 더더욱 말렸어야 했다고, 역안의 사내는 속으로 쓰게 울었다.
집에 홀로 남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두껍게 먼지가 쌓인 자신의 방을 청소하는 것이었다. 물건이 많은 것은 아니었기에 자신은 자료들만 정리하고 대부분의 잡일은 다이너모로 해결했다. 그 때를 생각하면 1년이 지난 오늘의 방은 자신이 한창 연구를 하던 시절보다 더 복잡해져 있었다. 자료가 붙어있지 않은 벽이 없었으며 심지어 천장에 스크린을 연결하여 누워서도 연구를 계속했다. 그리하여 알게 된 지식들은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을 뒷받침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늘어났다. 옆 방에서 만들어지는 진한 색의 액체를 보며 얼굴이 밝아진다. 이것이라면 되돌릴 수 있지 않을까. 사내는 진득한 액체들이 담긴 유리관으로 둘러싸인 채 자신이 들어오길 기다리며 입을 벌리고 있는 캡슐을 보았다. 이 이상 늦으면 그 때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리라. 남자는 다이너모에 명령을 입력하고 캡슐 안에 누웠다. 자신의 무게를 감지한 기계가 뚜껑을 닫고 진한 색의 액체를 가득 채운다. 차오르는 수면을 느끼며 에스퍼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무표정한 얼굴과는 다르게 불끈 쥔 두 손에는 미약하게나마 희망이 담겨 있었다.





04 Beyond the waste land

어느 순간부터 가슴의 답답함이 가시질 않았다. 어머니도 하인들도 백방으로 약을 찾아봤지만 어떤 형태든 어떻게 만들어졌든 소용이 없었다. 자신의 한쪽 얼굴에 새겨진 흉터는 이미 그 색과 모양을 잃은 지 오래되었다. 그럼에도 자신을 괴롭히는 고통은 사라지기는 커녕 점점 거세졌다. 타오르는 듯한 느낌에 오늘밤도 심장을 부여잡았다. 아팠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심장이 약했던 자신은 항상 그곳의 고통을 호소했다고 했다. 약을 먹어도 효과가 없음에 이리저리 구해오던 약들도 더 이상 먹지 않았다.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것. 그것 외에는 딱히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아가, 내 아가...'

옆에서 같이 밤을 새주시던 어머니는 어느 날 부턴가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다. 여전히 재워주러 오셨지만 자신이 자는 척을 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셨다.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셔도 그저 조용히 웃으실 뿐 점점 무감각해지시는 것 같았다. 통증이 일상적으로 반복되서일까, 처음에는 관심을 가지고 걱정해주던 사람들이 하나, 둘 무덤덤해져 갔다. 애드는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저들도 지친 것이라고, 더 이상 해줄 것이 없어서 그러는 것이라고 자신을 위로했다. 언젠간 사라지겠지라며 마음을 추슬렀지만 섭섭함과 통증은 점점 더 커져갈 뿐이었다.

하룻밤은 가슴의 통증과는 다른 고통에 눈을 번쩍 떴다. 폐를 쥐어짜는 감각에 눈을 뜨니 자신과 비슷한 색의 자안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둘러진 손은 어째서인지 자신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부위에 감긴 채 그것을 옥죄고 있었다. 질식할 것 같은 느낌에 강하게 밀치니 올라타있던 상대가 풀썩 옆으로 쓰러진다.

"어......"

어째서. 어째서 사랑하는 엄마가 내 목을 조르고 있었을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매시간 느껴지던 가슴의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했다. 엄마는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고 있었는지 모른다는 표정으로 고른 숨소리를 내고 계셨다. 겁게 질려 품에 파고 들지도 못 하고 베개를 끌어안은 채 움츠러드니 자애롭게 자신을 감싸는 두 팔이 느껴졌다. 이것이 벌써 몇 번째인지, 세는 것을 포기한 지 오래였다. 안개처럼 다가오는 두려움에 애드는 내일 밤은 절대 자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새근새근. 깊게 잠든 것을 가장하여 이불을 목까지 덮고 베개로 얼굴의 반 이상을 가리고 있으니 조심스레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께서는 지속적으로 하인들을 해고하셨고 덕분에 저택에는 오래 전부터 이곳을 관리하던 집사와 집안일을 하는 메이드 두 명을 제외하곤 아무도 남지 않게 되었다. 하인들은 저택 옆에 붙어있는 별관에서 생활했기에 한밤중의 저택에는 주인 모자만이 존재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소리를 죽인 발소리가 카펫을 가로질러 그림자를 새겼다. 오늘은 올라타는 움직임이 없었다. 대신 침대 옆에 서서 한참동안 자신을 내려다보는 인기척만이 어둠을 증폭시켰다. 오늘은 가슴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특히 잠이 드는 것을 지켜보던 어머니가 나간 뒤로는 지병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는 듯이 아프지 않았다. 통각이 마비되었단 의심도 들었지만 깨물었을 때 손가락이 아픈 것을 보면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긴장감이 최대치를 찍는다. 드리워진 그림자의 모습이 변형되자 소년은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강한 힘을 발산했다. 바닥에 넘어진 존재는 품 안에서 꺼낸 것을 놓친 채 기절해버렸다. 달빛을 받아 반짝인 것은 만물을 꿰뚫을 수 있는 방주. 누군가에겐 구원의 손길이 될 수 있는 칼이었다.

*

숲의 밤은 차가웠다. 어둠은 공포를 불러일으키는데, 고요는 공포를 증폭시키는데 탁월한 효과가 있다. 차가운 바람이 척추를 훑고 지나간다. 있는 줄도 몰랐던 옷에는 주머니가 많았고 일부에는 비상식량도 들어있었는데 허기를 때울 정도는 되었다. 받은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정처없이 떠돌다 작은 연못에 닿았다. 목을 축이고 본 얼굴에는 예전의 흉터가 어렴풋이 나타나 있었으나 가슴의 통증은 없었다. 분명 기억에 없는 옷인데도 이질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애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쨍그랑'

옷에서 떨어진 물건이 돌과 부딪혀 맑은 소리를 냈다. 달빛을 받아 흑자색으로 반짝이는 그것이 익숙하여 자세히 들여다보니 스치는 것이 하나, 둘, 셋, 넷...

"타임... 트레이서."

그 외에도 부수적으로 떠오르는 것들이 늘어났다. 이 목걸이가 무엇인지, 어디에 있다가 여기로 왔는지, 무엇을 찾아 왔는지... 그러나 여전히 가장 중요한 것들은 안개 속에 있었다. 하나를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엮인 것 같은데 도무지 무엇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수면에 얼굴을 비춰본다. 조금 전보다 선명해진 흉터가 자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마치 숨겨져있던 것이 베일을 벗고 떠오르는 것처럼 그렇게 강해지고 있었다. 애드는 목걸이를 목에 걸었다. 그 순간 주머니에 들어있던 안대의 의미를 깨달음과 동시에 자신과 똑같은 눈을 가진 한 사람이 생각났다.

**

실마리가 풀리자마자 향한 곳은 저택이었다. 이미 동이 텄어야 할 시간인데 해는 뜰 생각이 없는 듯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자신의 역안처럼 까맣기만 했다. 기다리던 끝에 저택에 잠입하기로 결정한 타임은 잔뜩 긴장한 채 담장을 따라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작은 주인이 없어졌으니 야단법석이 났을 법도 한데 집안은 도망쳐나올 때보다 더 고요했다. 계단을 올라 종종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러 자신, 아니 애드의 방으로 잠입했다. 목적은 하나. 여느 때처럼 구석에 놓인 궤짝을 열어보았다. 먼지가 소복히 쌓인 그곳에는 있어야 할 것들이 없었다.

"다녀왔니?"

오싹. 급히 곁눈질로 벽에 새겨진 그림자를 살폈다. 꼿꼿하게 편 등과 앞으로 가지런히 모인 손의 위치는 평소와 같았으나 벽에 아로새겨진 손은 의문스런 무언가로 인해 그 형태가 왜곡되어 있었다. 퇴로를 물색하던 시선이 벽난로에 닿자 궁지에 몰린 두 발은 자연스레 그곳을 향했다.

"네."

평소처럼 웃으며 대답하는 목소리에는 그 어떤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으나 공기를 타고 흐르는 전류는 점점 증가하여 스파크가 터지기 직전이었다.
던져진 칼이 귀를 스친 것과 드러난 비밀통로 속으로 뛰어든 것은 동시였다. 젖 먹던 힘까지 모아 달렸다. 뒤에서는 그리워하던 웃음소리로는 믿어지지 않는 마녀의 즐거움이 메아리치며 숨통을 조였다. 우연히 발견한 다락으로 통하는 비밀통로를 질주해 마주한 것은 잠겨진 문. 달려오던 속도를 이용해 있는 힘껏 몸을 날리자 강한 통증과 함께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부식된 경첩이 뜯어졌다. 반동으로 튀어나간 몸은 또 다른 문에 부딪혔고 그 힘에 부서진 나무 옷장은 자신이 먹어치운 것들을 토해냈다. 그곳에 자신의 수족이 있었던 것이 우연일까, 타임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다이너모가 재회한 제 주인과 공명하며 남은 친구들의 위치를 알렸다. 방주를 든 여자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자신의 아들에게 다가갔다. 이미 제정신이 아닌 듯한 모습에 타임은 기가 질렸다. 앞뒤없이 칼을 휘두르기 바쁜 여자를 벽에 내리꽂다싶이 밀치고 지하실로 달려갔다. 오는 길에 마주친 하인들은 손에 잡히는 모든 물건을 타임에게 던졌다. 그들에게 주머니 속에 있던 드론을 던진 것은 재현을 위한 극적인 장치였으리라. 복도는 순식간에 불바다가 됐다. 지하실로 통하는 문을 부수자 긴 나선형 계단이 절망의 심연(abyss)을 재현한 듯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이 되어 아가리를 벌렸다.

'절망은 희망의 이면이다. 너의 희망이 강할수록 절망 또한 깊으며 희망이 겉에서 널 이끈다면 절망은 속에서부터 널 갉아먹는다.'

다음 말은 생각나지 않았다. 타임은 이 계단이 자신을 내면 속 절망으로 이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더욱 갈망했다. 이어지는 뒷말을 저 말을 한 사람으로부터 직접 듣고 싶었다. 갈망이 갈증으로 변하자 문이 나타났다. 방 안에 있는 작은 궤짝. 명령하지 않았음에도 자신의 수족이 뚜껑을 열었다. 먼지가 수북히 쌓인 채 진동하고 있는 다이너모가 보였다.

"내 아가, 어디 가니?"

어느새 쫓아온 어머니가 불길 속에서 미소짓고 있었다. 모든 것을 해결해주겠다는 듯 빛을 받아 일렁이는 칼날이 유혹적이었다. 타임은 환하게 웃었다.

"산책 가요."
"엄마랑 같이 갈까?"

자안이 곱게 휘었다. 곱게 휜 눈에서 흐른 맑은 액체가 불길을 머금어 타올랐다. 다음은 없었다. 대신, 이어진 폭발음이 대답을 대신할 뿐이었다.


눈을 뜬 곳은 칠흑같은 적막 속이었다. 모든 것이 꿈이었단 생각이 들었으나 드론을 던지기 직전 흘러내린 눈물자욱이 가설을 산산조각 냈다. 몽롱한 와중에도 자신이 돌아가야 할 곳을 생각하니 팔이 자연스레 움직인다. 다이너모는 제 주인의 의지를 읽은 듯 좌표를 설정했다.


***


누군가로 인해 깨끗할 거라 예상했던 방은 자신이 떠난 이후로 전혀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듯 먼지가 수북했다. 집 안 또한 조금 전까지 있었던 암흑 속 만큼이나 조용했다. 자신의 발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리는 이 상황이 마치 이 집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 같아 무서워졌다. 급히 거실로 나가 이곳저곳을 살폈다. 어느 곳이든 먼지가 쌓이지 않은 곳이 없었다. 딱 한 곳. 목표를 포기한 객체가 자의로 폐쇄한 공간 안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기계 소리가 들렸다. 익숙하다면 익숙할 소리에 안도하며 훔쳐보니 보이는 것은 6개의 기계뿐이었다. 굳게 닫힌 옆방에 시선이 멈춘다. 이 방은 원래 비어 있었다. 당연히 사람의 손을 타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여 넘겼는데 이제 보니 손잡이에 있어야 할 먼지가 안 보인다. 삐걱여야 할 문이 소리없이 열리며 숨겨온 광경을 상영한다. 옆방에서 난 큰 소리에 분주하던 6개의 주인 없는 다이너모들이 복도로 나온다. 주인이 어떤 소음을 내든 꽤 오랫동안 잠들어있던 6개의 다이너모들은 막 귀환한 주인의 방에서 나가지 않았다. 누군가가 있어야 할 방에는 구겨진 쪽지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05 No gain, no pain?

밤에 잠을 잔 마지막 날짜를 잊어버렸다. 달력을 보며 마지막 표시일을 찾으려 했지만 체크를 하지 않은 것인지 그 날이 너무 오래 전이라 달력 속에 파묻힌 것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어차피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기에 스크린 앞에 죽치고 앉아 있던 공학자는 부엌으로 향했다. 뭘 제대로 먹은 건 언제였더라. 그것마저 머리 속에서 다른 사소한 것들과 함께 잊혀진 듯 기억나지 않았다. 어거지로 음식이란 것을 밀어넣은 후 스크린 앞으로 돌아가라는 마음의 소리를 무시한 채 거실 소파에 누웠다. 감긴 눈에 초대한 적 없는 손님이 찾아온다. 다시 한 번 그날의 악몽을 반복하는지 미간에 주름이 잡힌다.

  자신이 갇혔던 곳은 시공간의 크레바스였다. 알게 모르게 쌓인 부조리와 이상현상들로 생겨난 시공간의 균열들이 모여 태어난 생명체. 그것은 시공간을 이동하는 여행자를 자신 안에 가두고 그의 의식을 갉아먹어 생존한다고 적혀 있었다. 이런 것을 어떻게 알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에스퍼가 남겨놓은 자료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균열로부터 태어난 크레바스는 존제 자체가 불완전했기에 정상적인 것들은 할 수 없었으나 시공을 왜곡시키거나 무한히 반복하는 것 등에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더불어 자신의 의지와 지능이 있었기에 시공을 왜곡하여 여행자를 낚아채 먹이로 삼는 것은 그들의 주된 생존법이었다. 왜곡된 시공간에 갇히면 체감하는 시간에 변화가 생기는데 이것은 크레바스마다 다르다고 한다. 가령 타임 트레이서가 크레바스에서 보낸 시간은 2년 남짓. 돌아왔을 때는 4년이 흘러있었고 캡슐 안의 존재는 죽은듯이 창백하였다. 처음엔 죽은 줄 알았으나 숨은 붙어 있으되 의식불명 상태라는 것을 알았고 그것이 자신 때문이라는 걸 깨닫는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에스퍼의 다이너모는 그간 수집한 데이터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타임에게 보여주었다. 크레바스에 갇히고 처음 1년은 자신의 의식이 깍였다. 심장의 통증은 그 때문에 발생했다는 것이 타임의 결론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사라진 통증은 자신의 자각이 아닌 에스퍼의 의식이 대신 깍여나갔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에스퍼가 자신이 부재한 처음 2년을 투자해 만들어낸 약물 덕분이었고 돌아왔을 때 잠이 든 주인의 다이너모들이 분주했던 이유는 그 약물을 제조하고 깨끗하게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을 깨닫고 얼마나 울었는지 며칠 동안 시야를 확보하기 어려웠었다. 오래된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감에 점점 구겨지던 미간이 펴지고 말았다.

"...꿈인가..."

반복되는 꿈은 타임의 죄책감을 부추기는 촉매였다. 타임의 수면시간이 줄어든 이유에는 마음이 급한 것도 있었지만 반복되는 악몽이 끔찍해서도 있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킨 타임은 어느새 소년에서 청년으로 변해 있었다. 크레바스에 빠진 직후부터는 왜곡된 시간의 영향을 받아 돌아왔을 때의 나이는 2년이 흐른 19세. 2년이 더 지난 지금 그의 나이는 21세, 죽은듯이 잠에 빠져 있는 에스퍼와 동갑이 되었다. 어째서인지 캡슐 안의 그는 나이를 먹지 않는 것 같았다. 현실을 살지만 의식은 크레바스 안에 있어서일까, 시간의 영향을 받지 않는 듯 그의 육신에는 변화가 없었다.
타임은 연구실로 돌아와 스크린의 수치를 분석했다. 돌아온 뒤 2년동안 에스퍼의 의식을 되돌리는 것에만 몰두했고 어렵게 그가 쌓아놓은 지식과 새롭게 발견한 사실들을 통해 의식강화제를 제조할 수 있었다. 효과는 장담할 수 없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만큼 절박했기에 타임은 캡슐 안으로 자신의 연구성과를 주입하고 있었다. 관찰 7일째. 이 캡슐은 안에 있는 사람이 의식을 되찾으면 열리게 되어 있었다. 타임은 자신의 노력이 조금이라도 보상받기를 바랐고 그 보상은 향후 2년간의 노력을 더 지불받은 뒤에 지급되었다.

*

그릇을 쟁반 위에 놓는 움직임이 능숙하다. 몇 차례에 걸쳐 수정한 강화제로 캡슐이 열렸으나 기억은 오리무중이 되었다. 크레바스는 먹잇감의 기억도 갉아먹는지 몇 달 전 겨우 깨어난 에스퍼에겐 본능에 가까운 경계심을 제외한 그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왜 이렇게 됐는지, 자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나는 누구인지... 그 무엇도 기억하지 못 했으며 따라서 자신이 내민 손 또한 알아보지 못 했다.
의식을 찾은 처음 한 달은 전쟁을 방불케 하는 저항이 있었다. 음식조차 거부하여 강제로 영양제를 꽂길 수차례, 부질없는 저항임을 깨달은 건지 배고픔을 못 이긴 건지 잠긴 문 앞에 음식을 두면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뒤 몰래 가져다 먹기 시작한 것이 어언 2개월에 접어들었다. 연구를 끝내고 나오면 깨끗하게 비워진 식기들만이 문 앞에 있었고 그게 에스퍼와 맺은 새로운 암묵적인 룰이었다.
오늘도 여느 때와 같이 녀석의 식사를 담고 있는데 인기척이 느껴져 돌아보았다. 이 집에는 자신과 에스퍼 둘 밖에 없었기 때문에 누구의 것인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방 안에 있어야 할 존재가 흑자안을 깜빡이며 부엌 입구에 서 있었다. 쭈뼛거리는 모습이 꼭 긴장한 어린아이같아 웃음이 났으나 에스퍼가 놀랄까봐 타임은 빙그레 미소만 짓곤 쟁반 위에 있던 그릇을 식탁 위 자신의 그릇 맞은편에 놓았다. 의자에 앉았음에도 들어오지 않고 머뭇거리는 모습이 에스퍼다워 짧게 손짓하니 조심조심 다가온다. 타임의 먹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던 에스퍼는 이내 똑같은 자세로 밥을 먹기 시작했다. 예전처럼 두 사람의 식기 부딪히는 소리만이 종을 울렸고 타임은 오랜만에 듣는 이 음악이 반가웠다. 그릇을 비우자마자 황급히 방으로 도망가는 모습에 타임은 복도를 뛰어가 그의 손을 잡았다. 시선이 얽히자 진심어린 한 마디가 전해진다.

"나와줘서 고마워."

볼이 발그레 상기된다. 알아들은 것일까, 타임은 점점 붉어지는 에스퍼에게 미소지었다. 에스퍼의 당황한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풀이 죽어있거나 무표정한 얼굴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이런 표정도 있었구나. 타임은 새삼 드는 깨달음에 미소가 절로 나왔다. 급하게 닫히는 방문에 대고 청년이 외쳤다.

"내일도 같이 먹어줄 거지?"


**


별빛만이 세상을 비추는 캄캄한 밤, 열리는 문에 담긴 조심성이 들어오는 사람이 이방인이 아님을 알렸다. 자신의 침대 위에서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상체가 건강해보여 안심이 됐다. 처음으로 같이 밥을 먹은 이후 에스퍼의 경계심은 존재했었나 의심될 정도로 급격히 허물어졌다. 처음에는 밥만 먹고 획 들어가던 녀석이 자신이 준비하는 것을 지켜보고, 요리하는 것을 지켜보고, 설거지하는 것을 지켜보더니 이내 곧잘 도와주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거실에서 지내는 시간이 증가했으며 예전처럼 책상 뒤에 위치한 침대에 누워 자신을 지켜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것이 예전과 같아서 타임은 가끔 몰래 눈시울을 훔쳤다.
쓰다듬는 손길이 좋은지 고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지금의 에스퍼는 예전의 차분함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다시금 연구를 통해 시공간에는 여러 기억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덕분에 에스퍼의 기억 또한 찾아낼 수 있을거란 희망이 생겼다. 현재 에스퍼에게 의식강화제와 완성된 기억귀환제를 투여하고 있다. 미래의 어느 날에는 돌아오지 않을까. 막연하고 근거 없는 바람이었지만 자신의 소망이 이뤄질 거란 확신이 들어 미소가 피어올랐다. 무심코 쳐다본 창문은 달빛으로 환했다.

"만약 내가 네 말을 들었다면,"

청렴한 달빛이 타임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과거로 가지 않았다면 여전히 남아 있을 아쉬움과 포기해버렸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네가 예전과 같은 모습일까."

이제는 그보다 나이가 많아져버린 자신을 보며 타임은 씁쓸하게 웃었다. 달빛이 비친 에스퍼의 머리카락이 평화로웠다.





06 Just the way we are

이후의 시간은 잔잔한 시냇물처럼 평화로운 나날들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약의 효과는 좋았고 에스퍼는 예전의 건강한 모습을 되찾았다. 여전히 기억의 일부는 비어 있었지만 에스퍼가 누군지, 타임이 누군지, 차례대로 기억을 찾아가고 있었다. 특히 원래의 나이를 기억하고 나서부터는 곧잘 나오던 '타임 형'이라는 칭호가 쏘옥 사라졌다. 타임은 이제 자신이 나이가 더 많으니 형이라고 불러야 되는 거 아니냐고 항의했지만 한 번 동생은 영원한 동생이라며 무언항쟁을 펼치는 에스퍼를 이기진 못 했다. 이마저도 진담보단 농담에 가까운 것이었기에 세월이 흘러 이 논쟁이 진부해질 즈음엔 부러 서로 과장되게 행동하여 웃어넘기는 주제가 되어버렸다.

안경을 쓴 채 스크린을 뒤적이노라니 피로가 몰려왔다. 반짝이던 사각형들을 꺼버리고 다이너모를 물린 뒤 눈을 감고 있으려니 안경을 벗겨주는 다정함이 느껴졌다. 그 온기를 뺨에 대니 다른 손이 머리를 쓰담는 애정에 행복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저 이대로, 지금처럼."

작게 중얼거리고 눈을 뜬다. 자신과 닮은 사람 중 유일하게 같은 목표를 가졌던 자신의 우상이자 생명의 은인이 흑자안을 빛내며 미소짓고 있었다. 그 미소가 그리워하던 어머니의 것과 닮았다는 생각에 타임은 작게 웃어버렸다. 곱게 휜 흑자안이 궁금하다는 듯 반짝인다.

"무슨 생각했어?"

작게 '아무것도.'라 중얼거리니 의심하는 시선이 따라붙는다. 추궁하는 눈초리에 고개를 돌려 하늘을 본다. 오후의 햇살이, 에스퍼를 처음 만난 날처럼 포근하다. 째려보는 것에 지친 에스퍼가 짐짓 토라진 척 하며 거실로 들어갔다. 기분이 크게 상하진 않았겠지만 빨리 들어가서 달래주지 않으면 진짜 기분이 상할 것이다. 그럼에도 타임은 묵묵히 순간의 햇살을 만끽했다. 기분 좋은 생각에 잠겨 타임 트레이서는 에스퍼를 불렀다. 베란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내내 자신이 언제 들어올지 감시하던 흑자안이 황급히 감기는 것을 보며 타임은 쪼르르 다가가 팔짱을 꼈다.

"나 이름 바꿀까봐."
"...이유는?"
"트레이서가 더 이상 맞지 않는 것 같아서."

침묵에 타임으로 하겠다는 재잘거림이 이어지자 느릿한 끄덕임이 그 뒤를 채웠다. 더 캐물을 법도 한데 오후의 햇살이 졸음을 부른 것인지 위아래로 움직이던 얼굴은 이내 잠에 취해 평온한 정원처럼 정지했다. 타임은 잠든 이의 어깨에 기댄 채 함께 잠의 마력에 빠져들었다. 지금이라면 더 이상 떠돌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00. The known

오후의 정원에서는 티타임이 열리고 있었다. 차분하고 자애로운 백발의 여인은 소풍만큼이나 티타임을 좋아해서 집에 있는 날에는 소소한 다과와 홍차를 준비해 정원에서 즐기곤 하였다. 아기자기한 다기들에는 꽃무늬가 그려져 있었고 하얀색 찻잔에 부어진 붉은 홍차의 향이 후각을 자극했다. 고소한 아몬드쿠키와 달콤한 초코 머랭, 갓 구운 따끈한 스콘과 건포도 머핀이 먹음짐스러웠다. 그 중에서도 오늘의 주 메뉴는 홍차케익이었는데 달콤하면서도 쌉싸레한 맛이 일품이었다. 케익을 한 입 베어물며 그녀의 어린 아들이 물었다.

"내게 원하는 게 뭐지?"
"아가, 엄마한테 말투가 그게 뭐니?"
"네가 내 엄마가 아니란 건 알고 있어."

분명 겉모습은 모자가 맞는데 분위기는 철천지 원수를 대하는 것보다 싸늘했다. 차를 음미하던 여인의 눈이 가늘어지더니 이내 찻잔을 내려놓는다. 그러자 여인은 여자 아이로, 남자 아이는 소년으로 변했다.

"나를 알아챈 건 네가 처음이야."
"원하는 게 뭐야."
"단도직입적이네? 조금은 돌아가도 될 텐데."

매섭게 올라가는 눈꼬리에 소녀는 까르르 웃었다. 놀림받는 것보단 저를 장난감 취급하는 시선이 기분 나빴는지 소년의 얼굴이 무참히 구겨졌다.

"빨리 말해."
"나 지금 차 마시고 있는 거 안 보여?"

한껏 여유를 부리는 얼굴에 다이너모를 꽂아버리고 싶은 것을 소년은 간신히 참았다. 지금 아쉬운 것은 자신이지 눈 앞의 저 아이가 아니었다. 정보를 얻고 싶다면 인내심이 필요하다며 소년은 뼈에 참을 인을 새기기 시작했다. 한참이 지난 후에도 표정 변화가 전혀 없는 소년을 보며 여자 아이는 입을 뗐다.

"난 시공간의 균열로부터 태어났어. 부모도, 형제도 없지."
"널 뭐라고 부르지?"
"이름도 없어."
"시공간의 균열이면 왜곡같은 것도 할 수 있나?"
"내 존재의 이유가 바로 그거야. 시공간의 균열로부터 탄생한 시공간의 왜곡. 특이한 점이 있다면 자아가 있고 생각할 줄 안다는 것?"
"지능이 있단 거군."
"맞아. 이해력이 빠르네? 역시 내 안목은 알아줘야 해."
"그래서 용건은?"
"에이. 또 제자리걸음이네. 그것보단 좀 더 재밌는 걸 원한단 말야."
"재밌는 거라. 이 몸은 그게 뭔지 모르겠군. 그리고 단도직입적인 게 가장 확실하잖아? 아니면 숨기는 게 있는 건가?"

말로 회유하는 건 불가능하단 것을 깨달은 건지, 아니면 당돌한 존재에게 호기심이 생긴 건지 여자아이는 물끄러미 바라보다 박장대소했다. 아이는 한참을 웃어젖혔고 소년은 다시 한 번 참을 인을 새겨야 했다.

"음, 좋아. 난 이름이 갖고 싶어."

소년은 이 요구가 예상 밖이었는지 한참동안 차만 홀짝였다. 기대에 가득 찬 눈을 반짝이며 기다리니 이내 찻잔을 내린 손이 편한 자세를 취하며 물어왔다.

"이름을 지어주면 내가 얻는 것은 뭐지?"
"네가 원하는 것 하나를 들어줄게."
"두 개로 하지."
"그건 안 돼. 등가 교환에 어긋난다고? 하나를 더 들어준다면 모를까..."

이 제안을 생각해보겠다는 듯 찻잔이 다시 채워졌다. 쪼르르. 적당히 식어 마시기 좋은 홍차가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잔을 물들였다. 얼마 후 끄덕여진 고개는 암묵적인 합의를 표했다.

"크레바스."
"크레바스?"
"빙하가 갈라져서 생긴 좁고 깊은 틈이란 뜻이다. 보아하니 너로 인하여 이 부근의 시공간은 왜곡이 심한 것 같더군. 좁지만 깊게 여러 차원이 연결된 채 이곳의 시간은 느리게 가잖아. 마치,'
"덫 같지?"

시선이 부딪힌다. 얼핏 보기엔 어린 여동생과 오빠의 신경전으로 보였지만 금방이라도 불꽃이 튈 것 같은 눈빛은 더없는 살기를 품고 있었다. 천진난만한 목소리가 물었다.

"네가 원하는 것은 뭐야?"
"이곳을 나가게 해 줘. 그리고 설명해. 네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 어떻게 작동하는 건지. 너에 대해서 전부. 내가 이해할 수 있게."
"흠..., 독특한 요구네?"

크레바스란 이름을 얻은 아이는 고민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소년은 아이가 이미 자신의 제안이 마음에 들었음을 간파했다. 조바심이 났지만 남성의 사냥본능이 지금은 먹잇감이 스스로 미끼를 물 때까지 기다릴 때라고 귀띔했다.

"좋아. 다 설명해 줄게. 대신 너도 내 소원 하나 들어줘."
"뭐지?"
"어려운 건 아니고. 이거 마셔."
"...독약인가?'
"아니. 비밀을 지켜준다는 약."
"무슨 소리지?"
"지금부터 듣는 모든 이야기는 비밀에 붙여달란 소리야. 그리고 이를 어길 시 무시무시한 벌칙이 기다리고 있을 거고."
"그게 뭔데?"
"음, 그건 비밀. 궁금하면 발설하면 되잖아?"

아이는 어깨를 으쓱했다. 순수하게 활짝 웃는 표정이 의뭉스러웠으나 소년은 군말없이 병을 따 한 번에 비웠다. 어차피 자신의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물어본 것일 뿐 타인에게 알려줄 마음은 한 톨도 없었다. 한 방울도 남지 않은 유리병을 받으며 아이는 자신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생겼는지, 왜 생기는지, 어떻게 작동하는지, 뭘 먹고 사는지... 모든 이야기가 끝난 뒤 아이는 쿠키를 집어먹었다. 지금까지 들은 내용을 정리하는 표정이던 소년이 마시던 찻잔을 비우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는 그 모습을 보더니 왼편에 출구를 만들어주었다.

"명심해. 방금 들은 이야기 중 어떤 것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면 안 돼. 알았지?'
"유의하도록 하지."
"근데, 네 이름은 뭐야?"
"...디아볼릭 에스퍼."
"잘 가, 디아볼릭 에스퍼."
"...."

소년의 모습이 사라지자 입구는 스르륵 자취를 감췄다. 정원을 그려내던 공간이 진동하더니 이내 황무지로 변모했다. 티타임 테이블만이 그 자리에 남아 이곳이 조금 전까지 정원이었음을 알려주었지만 아이가 의자에서 일어남과 동시에 그것 또한 자취를 감추었다. 종종걸음으로 황무지 중앙으로 향한 아이는 수북하게 쌓인 마름모 모양의 보석들을 찬찬히 살폈다. 자색의 보석들은 누군가의 몸에 박혀 있던 것인지 피가 굳어있는 것들이 있었다.

"내가 명심하랬잖아. 들은 이야기 중 어떤 것이라도 발설하면 안 된다고."

아이는 보석 하나를 집어 피를 털어낸 뒤 입에 넣고 사탕처럼 빨아먹기 시작했다.

'절망은 희망의 이면이야. 둘은 같은 저울에 올려진 관념들이라서 희망이 강할수록 절망 또한 깊어. 그래서 희망을 보여주면 여지없이 걸려드는 게 필멸의 존재지. 희망이 겉에서 이끄는 지휘자라면 절망은 속에서부터 갉아먹는 좀벌레와도 같거든. 나는 그런 여행자들에게 그들이 간절히 바라는 희망을 보여줘. 시공간을 뛰어넘는다는 건 자멸하고 있다는 것과 똑같아. 그만큼 품은 소망이 절실하단 거겠지. 그러니까 내가 보여주는 환상에 여지없이 걸려들어. 그리고 자신이 성공했단 기쁨에 도취되어 빠져나가지 못해. 마치 거미줄에 걸린 나비 같달까?'

어느 정도 작아졌는지 입안에 넣고 우물거리는 소녀의 표정이 행복하다. 사탕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배부르단 듯이 소녀는 만족스런 표정으로 배를 쓰다듬었다.

'물론 이곳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빠져나갈 수 있어. 내가 만들어내는 것은 환상.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부술 수 있지만 도취된다면 빠져나갈 수 없는 늪과도 같아. 발버둥칠수록 더 깊게 빠질 뿐 절대 벗어날 수 없어. 자신이 가지고 있던 환상의 밑바닥까지 긁어내어 잘라낸다면, 글쎄. 그 전에, 그게 가능하려나?'

몰려오는 노곤함에 아이가 하품을 한다. 시공간의 왜곡된 틈은 하릴없단 표정을 지으며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자의 여유를 뽐냈다.

"절대 발설 안 할 것처럼 굴더니 결국 다른 녀석들과 똑같았어. 아, 옆에 있던 녀석도 시공간 여행자란 건 변수였지만. 누가 알았겠어? 그 녀석이 의식강화제니 기억귀환제니, 이상한 약들을 만들어서 디아볼릭 에스퍼를 계속 되살려낼 지를."

키들거리며 보석을 고르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이번에는 목걸이로 쓰이던 것인지 긴 줄이 달려 있었다.

"그래도 그건 좀 의외였어. 옆에 있던 녀석이 죽고 디아볼릭 에스퍼가 그를 처음 만난 시점으로 되돌아갈 줄은... 덕분에 굶주릴 걱정없이 평생 먹을 양식을 쌓을 수 있었으니 나에겐 잘 된 일이지만."

까르르 웃는 웃음소리에는 순수한 기쁨이 가득 담겨 있었다. 땅에 무언가를 써내려간 아이는 나뭇가지를 내려놓고 일어섰다. 그 글자를 읊으며 아이는 잠을 청했다.

"잘 먹겠습니다."





?? The Archive - someone's rec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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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vasse(크레바스) : 시공간의 균열이 모여 생성된 부조리의 집합체에 의식이 생기고 자아가 덧입혀진 뒤 이름이 붙으면서 생겨난 인격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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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꽃이 휘날린다. 연두빛 언덕 위에 누워 자연과 하나된 듯한 존재의 뾰족한 귀가 보인다. 언덕과 같은 빛깔의 머리카락이 햇살을 받아 금빛으로, 은빛으로, 하늘빛으로 반짝이길 잠시, 느리게 뜨인 눈이 이것도 곧 끝날 환상이라 고했다. 보다 더 강해지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노력해왔었다. 인간들과 마족들이 함부로 파괴하는 숲을 지키기 위해 처음으로 활을 잡았던 그 날을 기억한다. 타고난 시력과 순발력으로 궁수 한 명의 몫을 해내는 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었다. 정든 보금자리. 자신의 고향이자 정신적 지주인 숲 구석구석을 담으며 친하게 지내던 나무들과 동물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곤 지금 이 언덕 위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가장 좋은 경치는 마음에 있는 것이라 했던가. 벌써부터 그리움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한동안 이 하늘을 볼 수 없을 것이다. 

 

 

피 맺힌 절절함이 고막을 타격한다. 한이 서린 울음소리가 골목을 매우고 한없이 깊어진 절망이 어린아이의 의식을 불태웠다. 마족들이 휩쓸고 간 자리는 남은 것이 거의 없었다. 그들의 술수에 놀아나 애꿎은 곳에 병력을 배치하여 구할 수 있는 생명을 살해한 꼴이 되자 군사의 리더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상황보고를 한 병사에게 생존자를 찾으라 이른 뒤 리더는 조금 전부터 자신을 공포에 질린 시선으로 바라보던 아이에게 다가갔다. 살짝 들려있던 궤짝이 소리없이 닫히는 것에 조용히 타이르는 소리가 이어진다. 잠시 후 열린 궤짝에서 그슬린 흔적이 가득한 적발의 사내아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의 것과 비슷한 색상에 문득 고향에 두고 온 어린 남동생이 생각난 기사는 아이를 안아올려 병사들이 주둔한 곳으로 갔다. 더 이상의 생존자가 없는 마을에 계속 머무를 필요는 없다. 지금은, 떠날 때이다.

 

 

타인의 눈을 피하여 발걸음 닿는 대로 걷다보니 이상한 동굴에 도착했다. 깊은 숲 속, 산짐승마저도 자취를 감춘 이곳은 수련을 하기 딱 좋은 곳이었다. 오래전에 죽었어야 할 육신은 문명이란 것과 결합되면서 그 생이 연장되었고 그것은 자신에겐 더없는 고통으로 다가왔었다. 그러나 그것에 계속 얽매여 있을 순 없었다. 잃어버린 것이 있단 것은 되찾아야 할 것이 있단 것과 같았다. 비록 온전한 모습으로 되찾을 순 없어도 적어도 남아있는 불미스런 기록만큼은 제거할 수 있을 것이었다. 아직 사람의 것인 손이 주먹을 쥔다. 복수할 것이다. 반드시.

 

 

쇠와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울린다. 세월에 젊음을 반납한 대가로 노련함을 얻은 중년의 기사와 아직 젊은 육체를 소유하고 노련함을 갈망하는 젊은 기사간의 대련이 절정에 치닫는다. 어릴 적 헤어진 사람은 자신의 형제이자 왕국 최고의 기사였다고 했다. 중년의 기사는 젊은 기사의 패기를 기특해하며 특별히 자신의 제자가 되는 것을 허락했고 나날이 일취월장하는 실력에 언제 둥지를 떠나보낼 지 고민하고 있었다. 새는 주어진 하늘이 클수록 성장하는 법. 조만간 이별이 만남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부딪히는 검날의 주인은 생각했다.

 

 

집을 떠나 정신적 고향이 된 탑에서 망토를 두른 소녀가 걸어나왔다. 앞으로 자신의 앞에 펼쳐질 수많은 이야기들과 그들로 인해 찾을 자신의 가능성에 소녀는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먼 길에 오르기 전 필요한 것들을 구매한 뒤 숲으로 향했다. 이 길을 따라가면 수도에 닿을 것이다.

 

 

긴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뜬 곳은 스스로를 봉인했던 캡슐 안이었다. 이전보다 강해진 나소드들을 보며 알 수 없는 희열을 느낀 것 같았다. 감정회로란 것이 존재한다고 한들 나소드인 자신이 인간의 감정을 느낄 수 있을 리 없을 터인데 어째서라고 묻는다면 이 회로를 집어넣은 자신을 만든 자의 변덕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 같았다. 채비라고 할 것도 없이 자신의 사랑하는 기어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펼쳐진 것은 망망대해. 이 바다를 건너 대륙으로 가면 자신의 존재의의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깊은 한숨은 그간의 수련이 고됨을 알려주는 동시에 더 이상 남아있는 것이 없음을 뜻했다. 드디어, 기존에 익혔던 기술과 새로이 연마한 기술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게 되었다. 태어날 때부터 자신을 수호한 캐논과 순백의 갑주는 자신이 엘에게 선택받았음을 알려주는 상징이자,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가문의 유산이었다. 처음으로 선 전장에서 무고한 사람들이 한없이 많이 죽는 것을 봐온 자신은 더 이상 그런 사람이 없게 만들 거라 새긴 비석을 스스로에게 세웠다. 이제 안락한 수련장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 신념을 위해서.

 

 

오라버니를 잃은 슬픔은 더 없이 깊었다. 가문과 명예를 모두 버리고 마족의 앞잡이가 된 오라버니에게 물을 것이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창은 약해빠졌다. 옆에는 자신에게 거래를 제안한 강력한 존재가 여전히 손을 뻗을 채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 존재라면 자신에게 필요한 강력한 힘을 줄 수 있을지도 몰랐으나 그녀의 미소는 통 속을 알 수 없었다. 자신이 바라는 것은 가족의 안전과 오라버니를 원래대로 되돌려 놓는 것. 목적을 위해서라면 이런 망설임마저 사치일 수도 있으나 스스로의 안전이 걸린 문제에 망설임이 따랐다. 일말의 침묵 끝에 황금빛 눈이 결의를 내비쳤다. 가문의 여식은 목적을 위해 자신의 안전을 대가로 지불했다.

 

 

모든 것이 불탔다. 이미 그 시점에서 모든 것과 이별했다고, 오로지 분노와 증오, 힘에 대한 열망만이 남았다고 자부하고 있던 공학자는 오랜 세월 자신이 강해질 때까지 머무르던 푸른 차원에서 나와 또 다른 푸름을 맞닥뜨렸다. 몇 년만에 보는 나무와 생명체들에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자료를 검색하다 우연히 열람하게 된 것은 엘리오스에 사는 인공지능의 고대 나소드. 기능도, 위치도, 만든 이도 불명이지만 나소드를 연구하는 자신에게 그것의 코드는 충분히 가치를 지니고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어떻게 찾아낸 그녀의 시그널로 위치를 추적해본다. 스크린에 표시된 움직이는 점. 그는 목표물이 향하는 곳으로 좌표를 설정했다.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었다. 자신에게 대가 없는 친절을 베푼 사내에게 보상을 해주는 마음으로 힘을 빼앗긴 마족은 거래를 제안했다. 시간이 없단 말에 사내는 별다른 의심없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자신을 노리던 배신자를 처단함으로서 일단의 위기는 모면했다. 앞으로 어떤 종류의 암살자들이 몰려올 지는 알 수 없었으나 지금은 그를 살린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자신은 이미 권력과 지위와 이별한 몸이었다. 더 이상의 이별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

 

 

마족들의 비명이 낭자한 곳에서 고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개인별로 최강의 기력을 가진 전사들은 각자의 무기로 적을 소탕하고 있었다. 검, 마법, 나소드, 창, 대포, 마족의 힘... 그들에 의해 떨어진 머리는 셀 수 없을 정도였으나 쉴 새 없이 몰려드는 마족 병사들에 전사들은 서서히 지쳐갔다. 거칠어지는 숨을 가다듬으며 허공을 가르길 두어 번, 온몸의 근육은 휴식을 요구하였으며 비릿함에 지끈거리던 후각은 감흥이 없어진 지 오래였다. 총성이 울린 것은 그때였다. 하늘에서 이 세계의 것이 아닌 듯한 빛이 내려왔고 이제껏 본 적 없는 화력무기들이 순식간에 근방에 있던 모든 마족을 사살했다. 청안의 여자는 빨간 대지 위에서 상큼하게 웃으며 엘 수색대 대원들에게 다가왔다. 저벅저벅 걸어오는 소리는 새로운 동료의 출현을 알리고 있었다.

 

"나약함과 이별할 시간입니다."

 

 

 

 

 

 

 

 

 

 

 

 

 

 

 

 

 

 

 

 

 

'와르르'

 

나무토막들이 자리를 이탈함과 동시에 표정이 무너져내린다. 들려오는 싫은 소리와 씩씩거리는 소리에 다급히 달려온 눈동자에 담긴 것은 공들여 쌓은 탑이 무너져 억장이 내려앉은 아이의 축 처진 어깨였다. 분명 슬프고 안 좋은 상황인데 회상이란 수면에 떠오른 모습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간다. 웃음을 겨우 참은 시선은 기척을 내며 아이의 옆에 앉는다.

 

"아가."

"내가 열심히 쌓은 건데 무너져버렸어."

 

화가 난 건지 속이 상한 건지 그 경계에 있는 목소리로 제 어미를 올려다보는 아이는 실망스러운 눈치였다.

 

"엄마 보여줄려고 열심히 쌓은 건데..."

 

그 모습이 마치 어릴적 자신을 보는 것 같아 자식을 쓰다듬는 손길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이어진 포옹에 아이는 어리광을 부렸다. 다음에는 꼭, 멋있는 탑을 보여주렴. 아이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

 

 

 

오늘도 매를 맞는다. 궂은 일을 해본 적도 없지만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했던 자신은 이런 일과는 거리가 멀었다. 바닥을 쓸고 가구를 닦는다. 손이 트고 여러 차례 채워진 인생이란 족쇄는 목에 선명한 상흔을 남겼다. 번번히 자신을 탐하려는 어른들과 한 푼이라도 더 받으려는 상인들의 등살에 피골이 상접한 몸은 움직이는 것 자체가 무리.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도 어려웠지만 하지 않으면 돌아오는 것은 구타였고 남는 것은 싱싱한 흔적이었다.

 

'와르르'

 

날아온 손지검에 중심을 잃고 휘청이다 물건들을 정리해서 넣어둔 상자를 엎어버렸다. 상자와 물건들에 뒤섞여 바닥을 나뒹굴었다. 예의 사내새끼가 기생오라비처럼 생겨선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줄 모른다는 소리를 하며 새주인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노예 주제에. 제대로 정리해 놔!"

 

충격에 오그린 것도 잠시, 들려온 발소리에 벌떡 일어나 물건들을 상자에 담았다. 집이 불타기 전 크고 안락했던 방에는 푹신한 침대와 가벼운 합금으로 만든 다양한 모형들, 여러 지식이 담긴 책, 천으로 만든 고양이 솜인형, 아버지께서 갖다주신 나소드 미니어처들이 있었다. 자동차와 나소드를 가지고 놀던 어느 하루는 잠시 한눈을 판 사이 사라진 나소드 정찰병 모형을 찾느라 온 집을 뒤진 적도 있었다. 실수로 제 발에 차인 그것은 하인들의 발길에 이리저리 채이다가 어머니의 침실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아버지께서 처음 주신 것으로 각별한 애정이 있던 것을 잃어버린 아이의 얼굴에는 '찾았습니다.'란 한 마디에 다시 웃음꽃이 피었었다. 어머니는 작은 상자를 하나 가져오셨고, 그 사건 이후 장난감을 가지고 논 다음에는 그 상자에 담아 보관했다. 정리를 하던 손이 차츰 느려졌다. 뺨을 강타한 아픔보단 다른 곳이 더 아픈 것 같았다. 소년의 망막에 바닥에 어질러진 나무토막들이 맺혔다.

 

 

 

**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니까!"

"어, 어, 어!?"

 

'와르르'

 

고귀한 마족씩이나 된다는 녀석들이 하는 짓을 몇 시간째 시큰둥하게 관찰하던 표정이 일순 굳었다. 카드, 인형, 뽀루쿠키, 이외의 여러가지 물건들을 가지고 놀던 마족들은 일정한 크기의 나무토막들로 탑을 쌓다가 무너뜨린 참이었다.

 

"쯧. 사공이 많으니 배가 산으로 가지."

 

핀잔에 가늘게 뜬 실눈이 돌아오자 머쓱해진 당사자는 눈치를 살피며 방으로 들어갔다. 머리를 쓸어올리는 손길에 후회가 묻어있었다. 심통을 부렸다. 이성과 계산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조금 전의 행동은 감정의 폭발 또는 과거에 대한 감상에서 기인한 것 같았다. 그러나 어째서 배가 아픈 것인지 명확하게 규명할 수 없었다. 왜. 나는. 그런. 어린아이 같은 행동을 한 것일까?

 

 

 

'톡'

'톡'

규칙적으로 나무가 나무를 두드리는 소리가 정적을 깬다. 이상하리만치 규칙적이고 균일한 소리는 나무토막을 쥔 손으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가장 좋은 음악은 규칙적이면서도 거슬리지 않아야 한다란 규칙 아래, 아무도 없는 빈 방에서 어린아이였던 어른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스름이 내려앉고 어둠이 지평선을 덮은 한밤중. 방문이 열리고 슬리퍼 끌리는 소리가 거실로 이어진다. 곧이어 얕은 한숨 소리와 함께 마루가 삐걱거렸다. 거실 바닥에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는 나무토막을 줍는 어른의 눈은 심연만큼 깊게 침잠해있었다.

 

"정리란 단어는 아는 건지..."

 

정리를 하길 한참, 모아진 나무토막에 별안간 재밌는 생각이 들었다. 피식, 바람 빠진 듯한 미소를 지으며 커진 손으로 직사각형 모양의 탑을 쌓기 시작했다. 한 개, 두 개, 세 개......... 와르르.

 

"아..."

 

말이란 것은, 대화란 것은, 화자와 청자가 없으면 성립될 수 없는 공식과도 같은 것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뒤이어 혀 끝에 올려진 문장은 더 이상 들어줄 대상이 없었고 해줄 대상 또한 없었다. 그럼에도 쉽사리 내려놓지 못 하고 입술을 달싹이던 어른은 자신만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나지막히 읊조렸다.

 

"보여주려고 쌓은 건데."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해본다. 그러나 어른이 된 어린아이의 동심은 이미 오래 전에 무너져버렸다. 와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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