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의 적은 셋. 무슨 연윤지 한 줄로 오고 있다.

탕탕

앞으로 한 발

탕.

-실험종료 실험종료.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신기하다. 이번에도 성공했냔 표정의 사람들을 지나 내 방으로 향한다. 8시간 후 실험은 다시 시작된다.

스프링 삐걱이는 소리만이 내가 살아있단 것을 알리는 유일한 소리. 난 무얼 바라는 것일까.

아니다. 가정이 틀렸다. 바라는 것이 아니라 바랄 수 있냐가 먼저겠지.

탕탕탕!

영원히 닫혀 있으면 좋을 철문이 열리고 식사가 들어온다.

-오늘도 끝내주더군

눈길도 주지 않고 밥을 우걱우걱 집어넣는다. 이것도 일상이 된 듯 음식을 가져온 '관리자'란 녀석은 기분 나쁜 기색마저 없다. 으레 그러면 그렇지라는 무언의 시위. 하지만 엄연히 저쪽  사정이다.

-네가 최장수란 건 알지? 잘할 거 같아 키우긴 했지만 이 정도로 오래 버틸 줄...

다 먹었어.

그 한마디로 상황은 종결됐다. 말이 잘린 남자는 툴툴거리며 이동식 테이블을 가지고 나갔다. 나지막한 욕설과 함께. 철문이 다시 잠기고 인기척이 사라지자 뒤집어 쓴 이불을 팽개치고 창문으로 갔다. 3개의 철봉이 이곳이 감옥 아닌 감옥임을 알려준다. 그나마 실적이 좋아 이런 같잖은 창문이라도 있는 거지만.

오늘은 있을까?

큰 키 덕에 바깥풍경 보는 건 쉽다. 하지만 아무리 보이지 않는 곳까지 어거지로 봐도 내가 찾는 것은 안 보인다. 정확하겐 그게 뭔지도 모르겠지만 어렴풋한 환상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환상이라면, 다시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이런 걸 미련이라고 하는 걸까. 햇빛을 받아 반짝이던 그것은 바람에 나부끼며 제멋대로 빛을 반사했었다. 머리카락 같았으나 그 빛이 이질적이라 차마 믿을 수 없었던 것. 그것은 처음본지 4일째 되던 날 홀연히 사라졌다. 다시 한 번 볼 수 있을까 내심 기대하며 창 밖을 보는 것도 어언 일주일. 부질없는 짓이 한심하다.








-어이 일어나.

어김없이 영원히 닫혀있길 바란 철문이 열리고 익숙하지만 낯선 목소리가 들린다.

-쇼타임♡

관리자란 놈의 시릴듯 푸른 미소가 어두운 전등빛에 일렁인다. 뿌연 시야를 문지르며 조용히 총을 들었다.


-룰은 동일하다. 시간이 종료될 때까지 살아남도록!

전쟁. 나와 같이 서있는 이 자들은 매일 밤 생존 전쟁을 치른다. 일부는 아침에 다시 볼 수 있지만 일부는 실종된다. 어차피 다음날 저녁이면 어떻게든 보겠지만.

-실험시작. 실험시작.
-어뮤즈먼트 파크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야릇핫 공기가 코를 찌른다. 문이 열리자마자 도살장에 보내지는 돼지처럼 처넣어진 우리들은 뿔뿔히 흩어졌다. 동질감이나 동료의식따윈 없지만 그래도 아침에 볼 수 있기를 바란다.













내가 이곳에 처음 오게 된 날도 석양빛 노을이 더없이 아름다운 날이었다. 부모에 대한 기억은 없다. 그저 손에 쥐어진 보라색 실이 그들에 대해 내가 추억할 수 있는 전부. 사람들은 날 전쟁고아라고 불렀다. 예쁘장한 외모 때문에 여러집을 전전하며 하인으로 쓰이다가 전쟁 막바지에 부도가 난 주인이 날 서커스단에 팔았다. 예쁜 외모덕에 실수를 해도 얼굴은 맞지 않았으나 다음날은 어김없이 속옷만 입혀진 채로 천막 끝에 대롱대롱 매달리거나, 위험하기 짝이 없는 묘기의 대상이 됐다. 좀 심하게 또는 많이 실수를 한 다음날은 여장을 당한채 어른들에게 던져졌다. 그리곤...... 그나마 나보다 어린 여자아이가 들어온 뒤로는 홀딱 벗겨지는 일은 없었으나 보이지 않는 부분은 피멍이 들었다.
기억하고 싶진 않지만 이게 내가 실험이란 명목하에 벌어지는 '사냥'을 끝낸 후 매번 꾸는 꿈이다.


탕탕탕!

오늘도 어김없이 총성으로 끝나는 꿈. 실제로 이런 건 아니지만 그 서커스단 인간들한테 구멍을 내는 것으로 내 꿈은 끝난다. 이건 아마 내가 지금 이곳에서 매일 하는 일 때문이리라.

방이 새까만 걸 보니 오늘은 불려나가지 않은 모양이다. 이렇게 가끔 휴무 아닌 휴무를 준다. 대부분 한계치 이상까지 돌린다는데 난 이미 그것을 넘은 것일까. 다른 놈들보단 대우가 나은 편이다. 적어도 학대는...

-꺄아아아아악-!

언젠가 들은 비명소리에 움찔하니 관리자가 좋은 일 있나보네라며 킬킬거렸었다. 소리의 주범은 굳이 원하지 않아도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 날 밤 사냥 대상에 포함되었으므로.

짐승만도 못한...

속으로 욕지거리를 삼키며 끝도 없이 흘러간 생각을 붙잡자 쪽빛으로 물든 창문이 보인다. 유일하게 이 방과 바깥을 연결해주는 매개체가.

이제는 포기한 지 오래된 그 날의 아지랑이를 떠올리며 빛이 바래가는 기억의 조각을 수평선 너머로 던진다. 초점 없는 눈은 그 무엇도 비추지 않은 채 오로지 달빛만을 끌어들였다. 끝없는 내면의 어둠 속으로. 흔들리는 시야. 생명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바깥풍경으로부터 등을 돌리자 알 수 없는 어둠이 찾아왔다.

갑자기 깜깜해진 방. 아까까지만 해도 켜져 있던 전등은 언제 그랬냐는 듯 꺼져있다. 불길한 마음에 총이 있는 곳으로 발을 옮기는 순간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앞으로 날리던 주먹을, 그 손을 부드럽게 감싸는, 그 날의, 환상.

-여기 계셨군요.

형형한 보라빛 살기를 뿌리는 금속물체는 신종 무기인 건가.

-찾고 있었습니다.

그 날 내가 본 것은

-흔들리는 은빛 아지랑이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그것은 환상이 아닙니다.

당신은 누굽니까?

-먼저 동화를.

주변에 있던 것 중 가장 밝은 것이 내 앞으로 왔다. 발광하는 전원 모양에 손을 올리자 기분 좋은 느낌이 전신에 퍼진다.

아주 오랜만이다. 이런 상쾌한 기분은.

-이번의 당신은 좀 더 차분하군요.

날 아는듯이 말하는 너는.

-이제 그만 가야 합니다. 곧 그들이 올 겁니다.

긴 은발이 내 머리카락만큼 이질적이다. 인간인 듯 하면서도 아닌 듯한 이색.

-이름이?
-제 이름은 이브입니다.
-이브...
-시간이 없습니다.

처음으로 누군가가 내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이것이 호의인지 더 큰 악의인지는 알 수 없으나 자발적으로 그 손을 잡았다. 처음으로, 내밀어진, 그 손을.

-내 이름은

뚫려버린 벽의 굉음 속으로 나아갔다. 황량했으나 가슴이 딱 뚫리는 느낌이 상쾌하다.
여자 주변에 있던 물체들은 이제 내 주변을 맴돌고 있다. 당연히 그래야한단듯이.

-다이너모라고 합니다. 당신이 만든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경황은 없어도 인사는 해야겠지.

-영원히 저곳에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꺼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은혜를 갚을 뿐입니다.

스치는 미소가 여태 본 것과 달라 뭐라 해야할지 모르겠다. 적어도 잡고 있는 이 온기에 악의는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인지할 뿐.

-내 이름은 애드, 애드 마스터마인드입니다.

갑작스런 통성명에 미소가 짙어진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애드씨.

 

가끔 생각해요. 절 여기까지 몰고 간 사람들을 모두 찾아내 잔인하리만치 끔찍한 형벌로 고통스럽게 만들고 싶다고...그래서 당신에게 부탁하려고 몇 번이나 고민했어요. 당신이라면 그럴만한 힘이 있으니까...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난 다 할 거야. 네가 원한다면, 그게 무엇이든.

당신 손에, 그들의 불결한 피를 묻히게 하고 싶지 않아요.

네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보단 나아.

그렇지만.

이미 붉게 물들어 그 빛을 씻어내는 것조차 불가능해. 좀 더 묻는다고 달라질 건 없어. 정 불만이면 너도 같이 하던가.

...제 손은 당연히 그럴거에요. 실행만 한다면.

그럼 그렇게 하지.

......정말 괜찮겠어요?

마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청소를 시작하죠.



이것이 이 세계에서의 복수극의 시작이었다.

 어두운 밤을 뛰어가고 있었다. 방금 전 나와 같이 걷던 친구는 웬 남자에게 살해당했다. 나는 그 남자에게서,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어두운 수풀을 뛰어넘어 도착한 곳은 가로등 하나 없는 어두운 고속도로. 잠시 멈춰 선 나에게 


'빠-앙!'


이것이 이번 생의 마지막이구나라고 생각한 순간 눈을 떠보니 나 대신 도로에 누워있는 것은 내 친구를 죽인...어?


느껴지는 온기에 고개를 드니 붉은 눈동자가 나를 내려보고 있었다.

회색빛 하얀 머리카락이 트럭의 헤드라이트를 받아 노란빛으로 물들었다.


"괜찮나?"


이것이 우리 둘의 첫만남이었다.

 

 




*




"작지만 불편하시진 않길 바래요."

"작군."

"혼자 사니까요."

"혼자?"

"네."

"아무리 세상이 좋아졌다지만 근본은 동일할 텐데?"

"예?"

"위험하다고."


 남자는 눈을 감고선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 뿐이었다. 내가 멋쩍게 웃자 그의 눈이 형형해졌다. 혀라도 찰 기세였다.


"여기보다 좋은 곳은 비싸죠. 아무래도 치안이 안정된 동네는 집값이 비싸거든요."

"......내참. 여긴 그런 문제가 있군."

"그런데 혹시 외국분이신가요? 다른 곳에서 오신 것 같아서요."

"......"


그냥 궁금해서 물은 건데 그렇게 빤히 쳐다보면 무섭잖아...


"넌 이름이 뭐지?"

"아! 전 이벨리아(Evelia)에요. 짧게 이브라고 불러요."

"......"

"당신은 이름이 뭐에요?"

"...애드."

"아까는 고마웠어요, 애드씨."


난 웃으면서 그의 손을 잡았다. 그냥 감사의 뜻으로 딱히 해줄 것이 없어서.


"흠...물 좀."

"에...네! 잠시만요!"


순간 볼이 붉어진 것 같은 건 내 착각이겠지? 내 뭘 보고 얼굴이 붉어지겠어...



이벨리아 퀸(Evelia Queen). 지금은 몰락했지만 한 때는 거대 사업가의 딸이었다. 이국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었어도 따돌림당하지 않았던 이유는 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그늘이 있었기 때문이다. 동업자에게 사기를 당하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빚을 갚기 위해 먼 곳으로 가셨고, 나에게 그 빚을 주기 싫다면 호적에서 파내버린 뒤 부모님과는 연락이 끊겼다. 그래도 계속, 어떻게든 연락을 하고자 했으나 돌아오는 건 반송된 편지들 뿐이었다.


"계세요?"

"누구세요?"

"아, 혹시 여기 아담 퀸씨의 집 아닌가요?"

"퀸? 아, 전에 살던 분들이요?'

"예! 맞아요!"

"그분들이라면 이사간지 몇 달 됐어요."

"...혹시 언제 이사오셨는지 여쭤도 될까죠?"

"글쎄요...제가 여기 한 석달 쯤 살았으니 그 전에 나가셨겠죠?"


"여기 있어요."


 감사하단 말과 함께 닫혀버리는 문을 우두커니 보고 있었다. 석달이면 호적에서 파내졌단 소식을 접한 그날과 같은 달. 어쩌면 애초에 그 달에 맞춰 가신 걸까?





"어디 다쳤어?"


낯선 목소리가 멀리서 나혼자가 아님을 알렸다.


"외상은 없을 텐데?"


볼을 감싸는 온기가 얼어붙은 얼굴을 어루만진다. 그리고,


"...어?"


떨어지는



눈물




평소같으면 그저 흘러내려 옷에 떨어질 것이 웬일로 눈가에서 멈췄다.


"훗. 많이 놀랐나 봐?"

"...죄송해요."

"훗훗."


 짧게 미소가 퍼지는 그 얼굴이 낯설지 않았다. 분명 도로 위에서의 그는 섬뜩하단 느낌마저 들었는데, 이제 보니 그 얼굴이 익숙하다. 하긴. 도로에서도 그저 놀랐을 뿐, 낯설거나 하진 않았다.


"......감정이 풍부해진 것 같군."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아무것도."


분명 감정 앞에 무슨 단어가 있었는데...뭐지?

의아하게 쳐다보니 느긋한 미소만 돌아올 뿐이었다. 말해줄 생각이 아예 없다는 거지?


"방에 들어가면 침대 있어요. 치워드릴테니 거기서 주무세요."

"소파에서 자지."

"그래도 손님이신데..."

"남자잖아."

"생명의 은인이시도 하고..."


내가 토를 다니 귀찮단 얼굴을 한다. 짜증을 낼 거 같아 내가 먼저 소리쳤다.


"감사함이라도 표하고 싶어요!"


잠시간의 정적.

그는 잠시 생각하는 듯 했다.


"감사함을 표하고 싶다?"

"네!"

"그러면 몇 일 묵게 해 줘."

"...?"

"소파에서 잘 테니 몇 일 신세 좀 질게."

"...??"

"그건 싫어? 그러면 바로 나가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의 팔을 붙들었다. 이대로 두면 진짜 나갈 거 같다. 남한테 빚 지고 사는 건 싫다. 낯설진 않지만 모르는 사람을 집에 들이는 건 쉬운 일은 아니다만...그래도 도와줄 수 있다면 그러고 싶다.


"지내세요!"


하나로 묶은 긴머리가 매력적이다. 앞머리의 그늘이 드리운 눈이 '그래야지'라 말하는 것 같아 지는 기분이 들었으나, 이쪽이 진 빚이 더 크다. 목숨을 빚졌으니.


"언제까지 계실 거에요?"


머리를 한 번 쓰다듬더니 그는 소파에 가서 앉았다. 그 자세가 너무 비슷해서 순간 깜짝놀랐다.


"글쎄."

"무기한인가요?'

"어차피 잠만 잘 거야."

"아..."

"이상한 짓은 안 해."

"아...네-엣?!"

"그게 염려되는 거 아니야?"


그게 그렇게 티가 났나요?!!


"경악한 얼굴로 보지마. 그정도 눈치는 있어."

"애드씨! 그만 놀려요!"

"놀리다니? 난 그런 적 없어. 들어가서 자. 출근해야되지 않나?"


빨개진 얼굴로 시계를 보니...꺅! 수면시간이 5시간도 안 남았어!!

찬물을 맞은 듯 이성이 제자리를 찾자 난 급뒷수습에 들어갔다.


"흠...흠...방금 소리 질러서 미안해요."

"별말씀을."


난 방에 들어가서 커다란 담요를 가지고 나왔다. 우리 집엔 담요가 딱 3장있다. 내가 깔고 잘 거, 내가 덮고 잘 거, 여분 하나. 여분이라고 해봤자 겨울용 이불이지만...


"덮고 자세요. 여름이라지만 그래도 추워요."

"......그래."


그걸 마지막으로 불을 끄고 난 방으로 들어와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어버렸다.




**




 거실에서는 은회색 머리의 남자가 천장을 보고있었다. 물끄러미, 그 시선의 끝이 어디에 있는진 알 수 없었으나 꽤나 오래된 일을 회상하는 눈치였다. 천정을 스크린 삼아.


"많이...바꼈네......"


 알테라 접전.

 새로운 코드를 찾겠다며 알테라로 갔던 여왕이 돌아오기 전, 의문의 사건으로 나소드 킹 코어가 폭발하면서 그녀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후에 폐허 속으로 들어갔으나 모든 것이 종결된 암흑만이 있을 뿐이었다. 파편이라도 있을까 찾아해맸으나 그 어떤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잔해만이 발 아래서 그를 끌어당겼을 뿐. 늪처럼.


 그렇게 연구 끝에 이곳 말고도 다른 세계가 존재한단 것을 깨달았다. 차원을 전전한지 몇 년일까...모습도 그대로고, 신체 또한 그대로인데, 나이를 먹은 것 같다. 여전히 예전처럼 움직이고, 얼마든지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는데 이 공허함은...


'이번엔 제대로 찾은 걸까?'


 아직 차원이란 시스템이 어떻게 구동되는 건지 알 수 없으나, 전체 인원수는 동일하단 것이 자신의 계산. 그렇다면...

 이마에 손을 올리니 머릿속이 정리되는 것 같다. 여전히 가능성들이 속살거리고 있으나 볼륨이 작아졌다고 해야 하나.





'조만간 알게 되겠지.'








일단은 단서를 찾는 것이 먼저다. 






 

따사로운 햇살이 작은 창을 통해 들어온다. 침착하게 들어올린 잔에는 날씨와 맞지 않는 차가운 물이 가득 들어있었다. 꿀꺽, 꿀꺽, 목울대를 타고 넘어가는 이질감에 시원함과 한기가 동시에 신경을 간질이자 몸이 살짝 떨렸다. 평소의 그라면 낮잠 잘 시간. 그럼에도 깨어있는 이유는 아직 기다리는 사람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안은 적막으로 가득했다. 검게 물든 눈자위가 구석구석을 살피지만 어디에도 그의 흔적은 없었다. 답지 않게 풀이 살짝 죽는다. 실망감이 그의 눈꺼풀을 짓누른다. 이 이상 버티는 건 무리였다. 방을 향하던 발걸음이 문득 거실로 방향을 돌렸다. 수면의 질만 따지면 침대에서 자는 것이 훨씬 이익임을 잘 알지만 그렇다면 제 때 일어나지 못할 확률 또한 커진다. 갈등은 길지 않았다. 지친 몸을 소파에 누이곤 숙면은 그가 온 다음에 취해도 된다며 스스로의 육신을 타이르던 디아볼릭 에스퍼는 단잠에 빠졌다.

 

 

*

 

 

갑작스런 한기에 눈을 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녋은 거실 창으로 달빛이 새어 들어왔다.  달아나지 않은 졸음이 가득한 채 자신의 눈과 같은 하늘을 봤다. 시시각각 변하는 그것은 그가 기다리는 사람과 참 닯았다고, 사내는 체념하듯이 생각했다. 변덕이 심한 성격. 그러나 한 번 마음을 굳힌 일에는 도통 재고도, 번복도 없다. 여전히 고요한 집 안에 나무로 된 마루가 삐걱이며 자신을 딛은 육신의 입장을 대신 표명했으나 발걸음은 어둠이 아닌 빛을 향해 나아갔다.

 

"왜 나와 있는 거냐?"

 

언제 왔냐, 그것이 먼저일 터인데 흑자안의 남자는 다른 것이 더 신경쓰인다는 듯 달빛 속의 인형(人形 : 사람의 형상)에게 물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달빛 속에서 그림자를 만든 이는 목소리보단 침묵으로, 말보단 시선으로 자신을 부른 이에게 화답했다.

 

"어딨었어.."

 

가만히 안겨오는 머리칼을 쓰담으며 짧게 입맞춰줄 뿐 다른 것은 없었다. 한참을 부비적이니 그제서야 자신의 불편함을 호소하듯 단답이 돌아왔다.

 

"떨어져라. 덥다."

 

밀어내는 동작이 으나 디아볼릭 에스퍼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더 세게 끌어안으며 거절을 표했다. 더 달라붙는 행동에 나직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애가 따로 없군."

"기다렸단 말야."

"덥다."

"잠도 안 자고 기다렸다고."

 

인내심에 한계를 감지한 미간이 마지막 말에 의해 펴진다. 아이처럼 투정을 부리는 듯, 애교를 부리는 듯한 행위에 피로에 내려앉은 다크서클이 미약한 호선을 그린다. 들어가서 잘까란 단순한 배려에 아이는 품에 안긴 채 고개를 끄덕였다.

 

 

**

 

"어디가?"

 

간만에 수트 차림인 사내에게 놀란 목소리가 들린다. 사내는 열린 문 틈으로 보이는 옆방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용건은?"

"같이 저녁 먹으러 왔는데, 마인드는 아직인 건가?"

"3일이 지났어. 2분전 얘기지만." 

 

지금 그의 시간이 초 단위로 흘러가고 있을 것이라 추측한 루나틱 사이커는 '조심해.'란 한 마디를 끝으로 더 이상 붙잡지 않았다. 방문이 닫히는 소리를 신호로 사내는 시공간을 열었다.

 

 

어둡고 질척한 공간이었다. 기분 나쁜 것들로 가득한 곳, 그 안에서 수트차림의 사내는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3개의 꼬리가 제멋대로 흔들린다. 재료를 구하러 간 연인이 돌아오지 않았다. 며칠동안 계속된 철야로 몸이 많이 망가졌을 터인데도 연구광이란 이름답게 스케줄대로 재료를 구하러 갔다. 단순 의뢰였다면 말렸겠지만 한 번 불붙은 연구욕은 주체를 완전히 불태우기 전까지 식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에스퍼는 더 이상 말릴 수 없었다. 다만 마지막 배웅 때까지 부루퉁해 있던 것은 같이 간다는 그를 한사코 말린 제 연인 때문이었다. 끈끈한 점액질로 가득한 곳. 열기가 식을 줄 모르고 분출하며 헛디뎠다간 저 불쾌한 물질이 자신의 수트에 묻을 것이 뻔했다. 검은 사내는 주변을 살피며 자신과 정반대의 모습을 애타게 찾았다.

 

이곳저곳 헤매던 것이 끝내 정중앙까지 이르게 했다. 베히모스의 내부는 언제나 불쾌했다. 혐오감이 적나라하게 표출된 미간에 시야에 들어온 악마가 비열한 웃음소리를 쏘아붙는다.

 

"어머-, 이게 누구야?"

"...손 떼라."

"감히...인간 주제에 겁도 없이!"

 

역안이 살기로 가득해진다. 짙은 살기가 제 연인을 밟고 서 있는 존재에게 닿은 것인지 붉은 머리칼이 순간 파르르 떨린 것 같다. 물론 진위여부는 중요치 않다. 그 이상 손대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다이너모들이 격동하며 주인의 의지에 응한다. 낫을 쥔 마족의 손에 핏줄이 선다.

 

"좋은 말로 할 때, 꺼져."

 

마족은 이 전투의 득과 실을 따져보았다. 제 앞에 서 있는 사내는 시공간을 파괴하는 악마로 글레이브도 혀를 차는 자였다. 그 자 입에서 악마란 소리가 나올 정도니 전력을 다해 싸워도 적잖은 피해를 감안해야 할 것이다. 과연 이 싸움이 그 가치가 있을 것인지, 카리스는 제 발 아래의 인간을 내려봤다. 기절한 지금, 그의 기술을 마족들이 쓸 수 있게 된다면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자를 마족의 편으로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충분히 값어치 있는 일이리라. 그러나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것은 시공간의 악마. 구태여 충돌할 필요가 없는 상대라고 판단한 카리스는 입맛을 다시며 자신이 쓰러트린 남자를 검은 사내 쪽으로 걷어찼다. 기회는 얼마든지 다시 오리라.

 

"허튼 짓을 했다면 살려두지 않을 거다."

 

날이 선 목소리와 다르게 소중한 것을 안아올리는 듯한 조심스런 행동에 카리스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예 소득이 없진 않음을 지각하며 마족은 자신의 자취를 지웠다. 완전히 지워진 것을 확인한 디아볼릭 에스퍼는 제 연인을 보곤 시공간을 열어 곧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얼마나 잔 거지?"

 

눈을 뜨자마자 하는 소리에 속으로 혀를 찼지만 대꾸는 하지 않았다. 결벽증에 강박증이 극심한 제 연인에겐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얼마나 잤냐고."

"알면 당장 일어나서 연구실로 뛰어가게?"

 

자신을 꿰뚫는 시선에 마스터마인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유롭게 책을 읽던 사내가 읽던 부분을 끝마쳤는지 제 연인을 보러 고개를 든다. 피로감과 짜증, 그보다 앞선 안도와 안심 어린 시선에 푸석해진 남자는 손을 뻗었다. 잡아달란 뜻이었다.

 

"내가 따라간다고 했잖아."

"그 마족이 있는 줄 몰랐지."

"알았다면 데려갔을 거야?'

"아니."

 

단호한 대답에 에스퍼의 입꼬리가 가볍게 휜다. 이어진 애송이란 말에 마스터마인드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으나 디아볼릭 에스퍼는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그의 미간을 누르며 킬킬거렸다. 왜 찾아온거냐는 물음에 3일이 지나도 오지 않아서란 답이 돌아온다. 그렇게 됐냐는 되물음에 황당함으로 응수한 시선엔 왠지 모를 상심이 가득 묻어있었다.

 

"또 걱정시켜라."

"오냐-."

"...진짜 또 그러기만 해봐."

"흐응, 네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냐."

"내가 네 보모냐?"

"난 보모 필요 없어."

"하는 짓은 완전 애다만?"

"그건 너도 마찬가지다."

 

평소처럼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보며 병문안을 온 또 다른 존재는 손을 거두고 그 모습을 지켜봤다. 꽃다발만 사고 먹을 것을 사오지 않아 허전한 한 쪽 손을 감지하며 방문자는 조용히 1층의 매점으로 향했다. 노크는 그것을 사온 다음에 해도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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