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사로운 햇살이 작은 창을 통해 들어온다. 침착하게 들어올린 잔에는 날씨와 맞지 않는 차가운 물이 가득 들어있었다. 꿀꺽, 꿀꺽, 목울대를 타고 넘어가는 이질감에 시원함과 한기가 동시에 신경을 간질이자 몸이 살짝 떨렸다. 평소의 그라면 낮잠 잘 시간. 그럼에도 깨어있는 이유는 아직 기다리는 사람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안은 적막으로 가득했다. 검게 물든 눈자위가 구석구석을 살피지만 어디에도 그의 흔적은 없었다. 답지 않게 풀이 살짝 죽는다. 실망감이 그의 눈꺼풀을 짓누른다. 이 이상 버티는 건 무리였다. 방을 향하던 발걸음이 문득 거실로 방향을 돌렸다. 수면의 질만 따지면 침대에서 자는 것이 훨씬 이익임을 잘 알지만 그렇다면 제 때 일어나지 못할 확률 또한 커진다. 갈등은 길지 않았다. 지친 몸을 소파에 누이곤 숙면은 그가 온 다음에 취해도 된다며 스스로의 육신을 타이르던 디아볼릭 에스퍼는 단잠에 빠졌다.

 

 

*

 

 

갑작스런 한기에 눈을 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녋은 거실 창으로 달빛이 새어 들어왔다.  달아나지 않은 졸음이 가득한 채 자신의 눈과 같은 하늘을 봤다. 시시각각 변하는 그것은 그가 기다리는 사람과 참 닯았다고, 사내는 체념하듯이 생각했다. 변덕이 심한 성격. 그러나 한 번 마음을 굳힌 일에는 도통 재고도, 번복도 없다. 여전히 고요한 집 안에 나무로 된 마루가 삐걱이며 자신을 딛은 육신의 입장을 대신 표명했으나 발걸음은 어둠이 아닌 빛을 향해 나아갔다.

 

"왜 나와 있는 거냐?"

 

언제 왔냐, 그것이 먼저일 터인데 흑자안의 남자는 다른 것이 더 신경쓰인다는 듯 달빛 속의 인형(人形 : 사람의 형상)에게 물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달빛 속에서 그림자를 만든 이는 목소리보단 침묵으로, 말보단 시선으로 자신을 부른 이에게 화답했다.

 

"어딨었어.."

 

가만히 안겨오는 머리칼을 쓰담으며 짧게 입맞춰줄 뿐 다른 것은 없었다. 한참을 부비적이니 그제서야 자신의 불편함을 호소하듯 단답이 돌아왔다.

 

"떨어져라. 덥다."

 

밀어내는 동작이 으나 디아볼릭 에스퍼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더 세게 끌어안으며 거절을 표했다. 더 달라붙는 행동에 나직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애가 따로 없군."

"기다렸단 말야."

"덥다."

"잠도 안 자고 기다렸다고."

 

인내심에 한계를 감지한 미간이 마지막 말에 의해 펴진다. 아이처럼 투정을 부리는 듯, 애교를 부리는 듯한 행위에 피로에 내려앉은 다크서클이 미약한 호선을 그린다. 들어가서 잘까란 단순한 배려에 아이는 품에 안긴 채 고개를 끄덕였다.

 

 

**

 

"어디가?"

 

간만에 수트 차림인 사내에게 놀란 목소리가 들린다. 사내는 열린 문 틈으로 보이는 옆방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용건은?"

"같이 저녁 먹으러 왔는데, 마인드는 아직인 건가?"

"3일이 지났어. 2분전 얘기지만." 

 

지금 그의 시간이 초 단위로 흘러가고 있을 것이라 추측한 루나틱 사이커는 '조심해.'란 한 마디를 끝으로 더 이상 붙잡지 않았다. 방문이 닫히는 소리를 신호로 사내는 시공간을 열었다.

 

 

어둡고 질척한 공간이었다. 기분 나쁜 것들로 가득한 곳, 그 안에서 수트차림의 사내는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3개의 꼬리가 제멋대로 흔들린다. 재료를 구하러 간 연인이 돌아오지 않았다. 며칠동안 계속된 철야로 몸이 많이 망가졌을 터인데도 연구광이란 이름답게 스케줄대로 재료를 구하러 갔다. 단순 의뢰였다면 말렸겠지만 한 번 불붙은 연구욕은 주체를 완전히 불태우기 전까지 식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에스퍼는 더 이상 말릴 수 없었다. 다만 마지막 배웅 때까지 부루퉁해 있던 것은 같이 간다는 그를 한사코 말린 제 연인 때문이었다. 끈끈한 점액질로 가득한 곳. 열기가 식을 줄 모르고 분출하며 헛디뎠다간 저 불쾌한 물질이 자신의 수트에 묻을 것이 뻔했다. 검은 사내는 주변을 살피며 자신과 정반대의 모습을 애타게 찾았다.

 

이곳저곳 헤매던 것이 끝내 정중앙까지 이르게 했다. 베히모스의 내부는 언제나 불쾌했다. 혐오감이 적나라하게 표출된 미간에 시야에 들어온 악마가 비열한 웃음소리를 쏘아붙는다.

 

"어머-, 이게 누구야?"

"...손 떼라."

"감히...인간 주제에 겁도 없이!"

 

역안이 살기로 가득해진다. 짙은 살기가 제 연인을 밟고 서 있는 존재에게 닿은 것인지 붉은 머리칼이 순간 파르르 떨린 것 같다. 물론 진위여부는 중요치 않다. 그 이상 손대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다이너모들이 격동하며 주인의 의지에 응한다. 낫을 쥔 마족의 손에 핏줄이 선다.

 

"좋은 말로 할 때, 꺼져."

 

마족은 이 전투의 득과 실을 따져보았다. 제 앞에 서 있는 사내는 시공간을 파괴하는 악마로 글레이브도 혀를 차는 자였다. 그 자 입에서 악마란 소리가 나올 정도니 전력을 다해 싸워도 적잖은 피해를 감안해야 할 것이다. 과연 이 싸움이 그 가치가 있을 것인지, 카리스는 제 발 아래의 인간을 내려봤다. 기절한 지금, 그의 기술을 마족들이 쓸 수 있게 된다면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자를 마족의 편으로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충분히 값어치 있는 일이리라. 그러나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것은 시공간의 악마. 구태여 충돌할 필요가 없는 상대라고 판단한 카리스는 입맛을 다시며 자신이 쓰러트린 남자를 검은 사내 쪽으로 걷어찼다. 기회는 얼마든지 다시 오리라.

 

"허튼 짓을 했다면 살려두지 않을 거다."

 

날이 선 목소리와 다르게 소중한 것을 안아올리는 듯한 조심스런 행동에 카리스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예 소득이 없진 않음을 지각하며 마족은 자신의 자취를 지웠다. 완전히 지워진 것을 확인한 디아볼릭 에스퍼는 제 연인을 보곤 시공간을 열어 곧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얼마나 잔 거지?"

 

눈을 뜨자마자 하는 소리에 속으로 혀를 찼지만 대꾸는 하지 않았다. 결벽증에 강박증이 극심한 제 연인에겐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얼마나 잤냐고."

"알면 당장 일어나서 연구실로 뛰어가게?"

 

자신을 꿰뚫는 시선에 마스터마인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유롭게 책을 읽던 사내가 읽던 부분을 끝마쳤는지 제 연인을 보러 고개를 든다. 피로감과 짜증, 그보다 앞선 안도와 안심 어린 시선에 푸석해진 남자는 손을 뻗었다. 잡아달란 뜻이었다.

 

"내가 따라간다고 했잖아."

"그 마족이 있는 줄 몰랐지."

"알았다면 데려갔을 거야?'

"아니."

 

단호한 대답에 에스퍼의 입꼬리가 가볍게 휜다. 이어진 애송이란 말에 마스터마인드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으나 디아볼릭 에스퍼는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그의 미간을 누르며 킬킬거렸다. 왜 찾아온거냐는 물음에 3일이 지나도 오지 않아서란 답이 돌아온다. 그렇게 됐냐는 되물음에 황당함으로 응수한 시선엔 왠지 모를 상심이 가득 묻어있었다.

 

"또 걱정시켜라."

"오냐-."

"...진짜 또 그러기만 해봐."

"흐응, 네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냐."

"내가 네 보모냐?"

"난 보모 필요 없어."

"하는 짓은 완전 애다만?"

"그건 너도 마찬가지다."

 

평소처럼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보며 병문안을 온 또 다른 존재는 손을 거두고 그 모습을 지켜봤다. 꽃다발만 사고 먹을 것을 사오지 않아 허전한 한 쪽 손을 감지하며 방문자는 조용히 1층의 매점으로 향했다. 노크는 그것을 사온 다음에 해도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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