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할, 아, 버, 지-!"
정원에서 나소드를 들고 달려온 손자는 오늘도 제 할아버지를 애타게 찾았다. 책을 보고 있던 위로 뻗친 듯한 헤어스타일의 노인이 달려오는 남자아이를 품에 안는다.
"할아버지, 저번에 해주신 얘기 또 해주세요."
해맑은 미소를 무릎에 앉히며 나이 지긋한 신사는 운을 뗐다.
옛날 옛날에, 아주 먼 옛날에, 은색 합금으로 만든 구조물 안에서 세 형제가 살았단다. 첫째는 활발한, 둘째는 괴짜스런, 셋째는 겁이 많은 아이였지. 그러던 어느 날 첫째가 둘째가 벽과 대화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됐어. 다른 사람은 이상하게 여겼겠지만 집중력이 병적으로 세지면 나타나는 둘째만의 습성이었기 때문에 첫째는 지병이 도진 것이라 생각했단다. 연구에 몰두하다 보면 종종 허공과 얘기하곤 했거든. 그런데 어느 날은 지나가던 셋째가 열린 방 문 틈으로 둘째의 웃음소리를 들었어. 방해받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둘째 형이 연구 중에 방문을 열 리 없었기에 셋째는 인사를 하려 했단다. 그러나 이어진 건 둘째의 웃음소리 뿐이었어. 벽 쪽으로 몸을 돌린 채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것 같았는데 셋째의 눈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거든. 겁이 난 셋째는 발소리를 죽인 채 첫째에게 갔단다.
"큰 형, 큰 형 있어? 작은 형이 이상해."
"그 녀석 이상한 게 한 두번이냐."
"근데 이번에는 좀 많이 이상해. 누군가랑 대화하는 거 같은데 아무도 없어."
"그 녀석 원래 연구하다가 혼자 떠들곤 해. 밤마다 떠들어대서 시끄러 죽겠어. 방도 많은데 옮기든가 해야지 원.."
"그래고 평소랑은 다른 거 같은데 좀 가 봐. 빨리 나와봐. 이상하다고!"
셋째의 성화에 못 이겨 첫째는 그와 함께 둘째의 방으로 갔단다. 열린 문 틈으로 둘째의 웃음소리가 이어졌고 겁에 질린 셋째와 달리 첫째는 짜증스럽단 표정으로 문을 벌컥 열었어. 둘째가 연구를 시작한 이레로 잠을 거의 자지 못했기 때문에 첫째는 짜증이 쌓일 대로 쌓인 상태였지. 시끄럽다 쏘아붙이려고 방문을 벌컥 연 순간 둘째는 배를 잡고 바닥에서 뒹굴고 있었단다.
"풉...푸핫...푸흐흐...크하하학!!"
자지러지게 웃던 둘째가 타인의 존재를 알아차리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어. 한참만에야 제 형제들을 발견했는데, 한 말들은 평소와 다름없는 것들이었지.
"...문 열려 있었냐?"
"어. 그리고 너, 밤에는 좀 조용히 해. 시끄러워서 잘 수가 없잖아!"
"용건은 그것 뿐?"
끄덕이는 첫째와 달리 셋째가 우물쭈물거리다 겨우 물었었지.
"...형, 괜찮은 거지?"
"응. 멀쩡해."
헤실거리는 표정이 다소 이상했지만 나가자는 첫째의 성화에 셋째는 끌려나왔을 거다. 아마도.
"봤지? 멀쩡하잖아."
"......그래도 이상..."
"너도 좀 익숙해져라. 도대체 몇 년이냐? 네가 저 녀석 이상하다고 할 때마다 가보지만 멀쩡하잖아. 본인이 괜찮다잖아? 신경 끄고 네 연구나 해."
첫째는 셋째에게 딱밤을 때린 뒤 방으로 돌아갔어. 복도에서 셋째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방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끊겼었지. 그 뒤로 셋째가 둘째 형에게 가보자는 말은 하지 않았었던 것 같구나.
사건이 터진 것은 여름날이었을 거다. 불볕더위가 유난히 기승을 부리던 해였지. 여기서부터는 나도 전해들은 이야기니 조금 안 맞을 수도 있을 거다. 궁금하면 네 작은 할아버지에게 물어보렴.
시간은 오후 1시경. 한참 해가 높을 때라 첫째는 방에 늘어져있었어. 갈증을 못 참은 셋째는 부엌으로 물을 마시러 갔는데 부엌 뒷문으로 둘째가 나가는 것을 봤단다. 뒷문은 뒷마당으로, 뒷마당은 산으로 통하는 곳인데 수풀이 우거져서 음침하기 짝이 없었어. 여름에는 녹음이 무성해서 햇빛이 거의 들지 않았고 습했지. 겨울에는 앙상한 가지들이 귀신이 숨어있는 것처럼 서늘했단다. 평소 쾌적한 것을 선호하는 둘째가 왜 그런 곳으로 가는지 궁금했던 셋째는 소리를 죽이고 뒤를 밟기 시작했어. 도착한 곳은 나무로 만든 허름한 헛간. 그 집을 살 때부터 뒤에 있던 건물인데 그게 어떻게 쓰였는지에 대한 가설은 아주 많았지. 좋은 용도로 쓰이지 않았다는 소문이 많아서 비교적 싸게 살 수 있었는데 그 부동산 업자가...... 크흠. 이야기가 옆으로 샜구나. 미안하다. 그래, 어디까지 얘기했지?
둘째를 따라간 셋째는 그 허름한 헛간에 도착했어. 헛간 내부 벽면에는 여러가지 도형들과 공식들이 적힌 종이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단다. 간간히 그림들도 보였는데 유독 정육면체가 많았어. 모두 둘째의 손글씨로 쓰인 것들이었고 그것들은 연구자료처럼 보였지만 무슨 연구인지는 알 수 없었단다. 셋째는 충격을 받아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는데 헛간 밖에서 둘째의 목소리가 들렸어. 고양이들이 잘 먹는다는 참치를 땅에 내려놓고 허공을 쓰다듬기도 하고, 작게 웃으며 '나비야-.'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이 실제 고양이를 대하는 것과 비슷했다고 하더구나. 셋째는 겁이 나서 집으로 달려와 첫째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첫째는 근처 정신과 병원에 전화를 한 뒤 둘째에게 달려갔단다. 여전히 고양이를 쓰담는 듯한 행동을 하는 둘째 앞에는 부식되어가는 가득 찬 참치캔이 놓여 있었어.
병원 복도에서 무심한 표정으로 기다리니 의사가 첫째와 셋째를 불렀어. 그리고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차트에 열심히 적더구나. 그리고 5시간 쯤 뒤 종이 한 장을 내밀었어. 그것을 유심히 보던 첫째와 셋째는 둘째를 정신과 병원에 입원시켰단다. 그들은 거기서 모든 사건이 끝난 거라 생각했고 다시 평화로운 나날들이 돌아왔단다.
"그래서 둘째는 어떻게 됐어요?"
"그 녀석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끝내 호전되지 못 했다고 들었다."
"그럼 병원에서 죽은 거에요?"
"......그렇다라고 봐야겠지."
"......안타까워요. 첫째와 셋째가 조금만 신경써줬어도 괜찮았을 것 같은데..."
"세상에는 인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들도 많단다. 이런, 벌써 세 시구나. 간식 먹을 시간이다."
*
"아버님, 작은 아버님 오셨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몇 년 전 과부가 된 며느리가 나가자 방의 주인보다 조금 젊어보이는 노인이 들어왔다. 그는 키가 큰 편이었는데 살집 하나 없는 몸 때문에 더 커 보였다.
"형, 왜 안 왔어?"
"뭘?"
"어제. 둘째 형 기일이었잖아."
"......"
"적어도 기일정도는 챙겨야 하는 거 아냐? 양심이 있어야지."
"난 그 녀석 보고 미치라고 한 적 없어."
"작은 형이 자신을 정신과 병원에 입원시키라고 한 적도 없어."
잠시간 살벌한 기운이 방 안에 감돌았다. 형을 노려보던 노인은 성큼성큼 다가와 형이 보고 있던 종이를 빼앗았다.
"맨날 일만 하면서 하루 정도는 빼도 상관없는..."
사락. 소리없이 카펫 위에 떨어진 종이를 말없이 주우며 형은 동생을 타일렀다.
"이미 오래 지난 일이고 더 이상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야. 그 당시에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었어. 병원에 입원까지 시켜줬잖아? 회복하지 못한 건 그 녀석이 나약했기 때문이야."
"...나 며칠 전에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형은 그 병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었다면서?"
"겨우 그것 때문에 온 거야?"
"겨우 그것? 둘째 형이 치료라는 미명 하에 받은 건 오늘날의 고문과 다름이 없어. 근데, 겨우 그것이라고?"
"처음에는 약물치료를 했어. 근데 그게 안 들었잖아? 병원 측에서는 그 녀석을 치료하기 위해 애썼어. 그래서 최후의 수단을 사용한 거고. 병원이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의료행위를 행하겠다는데 보호자로서 그걸 막는 건 환자를 방치하는 것과 다름이 없어."
"아니, 그건 막을 수 있었어. 알아보니까 둘째 형에게 약물치료로서 복용됐다는 약, 환각제다더라. 형은 알고 있었지?"
"...아니."
"거짓말."
"진짜 몰랐다 그건."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그 병원은 오래 전에 폐업했어."
"그럼 그 때 작은 형 주치의와 담당 간호사, 아니 담당 의료진 전부를 찾아내서 대가를 치르게 해! 그게 형 일이잖아?"
형은 동생의 분노한 얼굴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알아본 뒤에 연락하겠다고 말했다. 형을 수상쩍게 노려보며 나가는 동생의 뒤를 막연히 담배만 피우며 바라보던 노인은 긴 시간동안 생각에 잠겼다.
"...여보세요?"
"오랜만이군."
"아, 안녕하십니까, 루나틱 사이커님. 바꿔드리겠습니다."
루나틱 사이커라 불린 노인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잠시 일처리 중이였습니다. 무슨 일이신가요?"
"내가 이전에 한 일에 대한 정보가 남아있는 것 같군. 일부는 새어나간 것 같고. 내가 부탁한 정보 세탁은 제대로 진행된 건가?"
"네. 아는 사람 모두를 처리했고 입막음을 했는데 뭔가 착오가 있었나봅니다. 제가 직접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다시 나서는 일은 없길 바라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일이 끝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한 모금. 두 모금. 담배를 세 모금 째 들이마시며 루나틱 사이커는 자신이 주워든 종이를 보았다. 몇 십년을 서랍장 속에 간직해 둔 그것. 오늘 태워버리려고 했는데 계획이 어그러진 것 같다. 태우는 대신 그는 웅얼웅얼, 종이의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진단서
환자명: 아크 트레이서
나이: 18
증상: 헛것을 보며 현실과 공상을 구분하지 못한다. 자주 혼잣말을 하며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다.
병명: 정신분열증으로 판단되어 입원 후 정기적인 치료를 받아야 한다.
특이사항: 약물주사가 통하지 않을 경우 다른 방법을 사용할 것.
치료현황: 3주 간의 약물치료. 효과 없음. 2차 방법으로 치료 시도.
2차 치료 중 환자가 병원을 탈출하려함.
2차 치료 4주간 진행. 환자의 불안정한 상태가 심해짐.
환자의 5번째 탈출 시도 후 보호자가 퇴원 수속을 진행."
노인은 서랍장에서 다른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그 종이에 적힌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의뢰서
의뢰인: 사이킥 트레이서
피의뢰인: 아크 트레이서
나이: 18
치료현황:
약물의 효과가 잘 들음. 환각제의 효과가 나타나 증상이 더욱 심해짐. 환각, 환청, 그에 따른 기타 증상들이 수반됨. 3주간 실행.
심폐소생술에 사용되는 기계를 관자놀이에 대고 전기충격 시도. 증상이 더욱 악화됨. 4주간 실행.
피의뢰인의 병원을 탈출하려는 행동이 심화되어 의뢰인에 의해 퇴원.
비고:
제정신으로 돌아오긴 힘들 것으로 추정.'
루나틱 사이커는 서랍장에서 꺼낸 종이를 한참 동안 보았다. 종이가 타들어가며 매캐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재만 남은 것을 확인한 뒤 노인은 손자의 방으로 갔다. 평온하게 잠든 아이의 얼굴에 주름진 손길이 스쳤다.
"내가 네게 거짓말을 했구나."
깊게 잠든 손자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안심한 할아버지는 손자에게 소곤소곤 비밀얘기를 했다.
"둘째는 퇴원을 했단다. 하지만 그의 정신은 돌이길 수 없이 망가져 있었고 형제들은 그가 더 이상 회복될 수 없다 판단했지. 그래서 그들은 둘째를 선한 목적으로 썼단다. 사람을 더 강하게 만들기 위한 실험의 재료로서 말이다."
노인은 손자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더없이 부드러움 음성이 속삭였다.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보다 강한 사람이 생기는 것을 매우 싫어한단다. 나중에 네가 나보다 강해지기 전에 내가 죽어야 할 텐데... 아니면 네 아빠처럼 너도 똑같은 꼴을 당하게 될 테니 말이다."
노인의 얼굴의 인자한 미소가 속삭였다.
"잘 자거라 애드."
***
"반장님, 오늘도 야근이십니까?"
"...들어가야지."
"저녁부터 무슨 파일을 그렇게 심각하게 보세요?"
"아무것도 아니야."
"......"
"별 거 아니니 신경쓰지 말고 퇴근해."
"예. 내일 뵙겠습니다."
직책에 비해 제법 젊어보이는 형사는 미제 사건파일을 읽고 있었다. 매섭지만 제법 서러운 눈빛의 노형사는 스크린을 뚫어져라 노려보다가 파일을 닫았다. 그는 사연 많은 형사였는데 원래 과학자였던 그가 경찰이 된 건 몇 십년 전에 의문스런 죽음을 맞이한 그의 형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가 보고 있던 파일의 내용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미제사건 보고서
타입: 형사
사건 당시 담당자: 로드 나이트(은퇴)
현 담당자 : 디아볼릭 에스퍼
피의자:
피해자: 아크 트레이서
사건요약: 인근 야산에서 훼손이 심한 시체 한 구 발견. 한쪽 눈이 없었으며 구타의 흔적이 있다. 주삿바늘로 인한 멍자국과 불법 수술의 결과물로 의심되는
흉터들이 수십개.
비고: 공소시효 만료로 인해 수사 종료. 학대 빛 불법적인 의료 행위로 인한 쇼크사로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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