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는 이미 오래 전에 기능을 멈췄다. 그저 숨만 쉬고 있을 뿐. 그저 몸을 움직일 뿐. 그 이상의 기능은 상실된 듯 하다. 전두엽의 대부분은 마비된 느낌이며 감정을 다스리는 우뇌도 사망한 모양이다. 유일하게 동작하는 것은 그저 걸어야 산다는 생존본능 뿐.
ㅡ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누군가 물었다. 의미가 있는 물음인가? 되뇌어 보지만 돌아오는 건 무(無)
ㅡ생에 의미를 어디까지 둘 거야?
다시 한 번 물어오는 목소리를 따라 걷는다. 이 소리를 놓치면 안 된다는 듯이.
ㅡ어차피 미친듯이 걸어왔어. 이제 쉬어도 되지 않아?
그래...어쩌면 그럴 수도 있어. 그러나 지금 멈추면 아무것도 남지 않아.
ㅡ무언갈 남기기 위해 지금까지 걸어온 거야?
글쎄.
ㅡ무언갈 남겨야만 의미가 있는 거야?
글쎄.
ㅡ그럼 왜 아직도 걷고 있어?
길이라 생각한 발 밑의 어둠이 날 잡아내린다. 저 밑바닥까지 끌고 내려갈 기세로. 발을 붙잡은 암흑은 천천히 짐어삼키키 시작했다. 발, 다리, 허리, 그리고 두 팔과 얼굴. 이윽고 눈 밑까지 올라온 끈끈한 악의에, 새어 나오는 미소마저 어둠에 먹힌다.
ㅡ이제 그만 포기하라고?
그렇게 회유해도 소용없단 걸 알 텐데. 왜 아직도 저 소리인지 모르겠다. 무언갈 남겨야, 무언갈 얻어야, 무언갈 손에 쥐어야 겠다고, 그렇게 생각해서 시작한 일이지만 이 지경에 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어차피 다 망가지고 부서지고 없어진 무(無)일 뿐인 것을.
-내가 찾고자 한 것은
들릴지 모르겠지만 마음속으로 외쳐본다.
-어차피 무(無)니까.
무너져버린 과거를 세우기 위해 흐름을 거슬렀으나 돌아온 것은 멀쩡하게 세워진 채 고고히 서있는 또 다른 과거. 그것은 산사태 한 번, 지진 한 번 나지 않은 고요한 산처럼 날 조롱했다. 이후 그 산을 잡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그에 대한 결과가 이런 것이라면,
생각조차 하기 싫다.
-난 무얼 위해 산걸까?
어쩌면 목적 자체가 모순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쫓은 것은,
무(無).
-어쩌면 이미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것을 바란 것은 아닐까?
무(無)는 그 자체로 존재상실. 이것을 바꾼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었을까.
-어떤 결말이든 손해는 나지 않았어.
ㅡ어째서? 네 손에는 아무것도 없는 걸?
어둠에 잠식되어 가면서도 비릿한 웃음을 날려본다. 내 손이 비었기에, 아니, 빈 것처럼 보이기에 오히려 이익이 났다는 것을 저 목소리는 알지 못한다.
무(無)를 추구했으니 손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 정상. 하지만,
-무(無)를 통해 무(武)를 얻었다.
왼쪽 눈을 잠식한 어둠이 남은 시야마저 덮어갈 때 나는 진정한 의미의 미소를 피웠다.
-그렇기에 실험은 성공이다. 어떤 결말이든.
두 눈을 덮은 어둠이 천천히 내부로 밀려오고, 그 깊은 달콤함에 안도할 무렵, 사지가 절단되는 느낌이 전신을 휩쓴다. 이제는, 정말, 쉴 수 있구나...
그렇게 난 악마의 화신(Diabolic Esper)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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