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실험하고 나온 마스터마인드는 어지간히 만사가 귀찮았다. 피로와 스트레스가 욕지거리를 내뱉자 방문이 끼이익-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다른 이가 침입한 것은 아니었다. 불쾌감은 스스로가 만들어 낸 것. 실험실 밖 욕실로 향하는 복도는 신경질적인 구둣발 소리로 가득 찼다.
 
"...썰어버릴까."
 
쥐새끼든, 개미새끼든 지금 눈에 띈다면 얼마든지 자비를 베풀어줄 의사가 있다며 마스터마인드는 새벽임에도 물을 세게 틀었다. 수압에 덜컹거리는 수도꼭지가 맹렬히 흔들리길 수십 번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욕조는 신경질적인 연구자를 담아낼 준비를 마쳤다. 짧게 신음을 내뱉으며 더러운 기분을 넘기는 목울대가 핏대를 세운다.
 
"....뭐야."
 
열린 문 틈으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보인다. 불쾌함을 명백히 드러내는 어조에 어둠 속 존재는 주사기를 앞둔 실험실 쥐마냥 가볍게 떨었다. 돌아온 대답은 화장실이란 한심한 대답. 생리적 현상이니 어쩔 수 없다 셈치지만 왜 하필 이곳으로 온 건지 감이 오지 않는다.
 
"방 옆에 있는 것은 장식이냐?"
"고장 났어."
 
젠장... 이유 모를 욕지기를 내뱉으니 문을 닫는 소음이 귀를 긁는다. , 아량을 베풀어줄까. 마스터마인드는 눈을 감았다.
 
"들어와서 일 봐."
 
머뭇거림도 잠시 생리현상을 해결하기 위한 움직임으로 욕실 공기를 채운 증기가 일렁인다. 더럽다. 기분이, 식어가는 물처럼 점점 더러워진다.
 
"......애드."
 
큰 죄라도 지은 듯 손을 씻던 물줄기가 부르르 떤다. 저를 보는 시선에 의아함과 두려움이 담겨있다. 마스터마인드는 눈을 뜨지 않아도 느껴지는 그것에 조소했다. 바쁘냐는 물음에 연구하러 갈 거란 모범답안이 돌아온다. 피곤하면 너도 들어오란 말에 증폭된 의아함과 의혹에 찬 시선이 따라온다. 그러나 그런 걸 신경 쓸 마스터마인드가 아니다. 듣지 않으면 제 손해지만 거래는 여유로운 자가 이기는 법이다. 마스터마인드는 그걸 잘 알았고 앞에 있는 생쥐는 그걸 몰랐다. 망설임의 그림자가 확인할 것이 있다는 듯 욕조 근처로 오자 맹수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
 
다이너모가 욕실 문을 닫고 걸어 잠근다.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할 새도 없이 끌어당겨진 손에 뜨거운 물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뭐 하는 짓이야!"
 
물을 머금은 천가지들이 몸을 휘감는다. 움직이기 어렵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안긴 채 애드는 마스터마인드란 존재를 노려봤다. 저를 담은 생기 없는 눈이 느리게 호선을 그리며 휘어진다. 그것이 마치 저를 노리는 칼날 같아 애드는 등골이 싸해짐을 느꼈다.
 
"...맛있어 보이는군."
 
간 보듯 저를 맛보는 말캉한 살을 몸서리치며 밀어낸다. 그러나 젖은 옷과 자신보다 억센 두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다이너모 부를 거야."
"내 다이너모가 폼으로 있는 줄 아는군."
 
만찬 전 애피타이저를 보듯 먹음직스러워하는 눈빛에 치가 떨렸다. 공포에 저려진 몸이 석고처럼 단단해져 갔다. 맹수는 그것이 만족스럽다는 듯 입가에 잔인한 호선을 그린다.
 
"무슨 맛일까?'
 
실험실 안에서 식인이라도 하나란 생각은 거칠게 벗겨진 옷가지와 이어진 달뜬 신음에 쉬이 흩어져버렸다. 수면 위아래를 왔다 갔다 하며 포옥 젖어버린 머리카락이 시야를 괴롭히고 자신의 목을 휘감은 손이 흉터를 짓누름에 어린 나신이 파르르 떤다. 갈망하던 호흡이 허락됐을 때는 아무 것도 망막에 담을 수 없을 만큼 절박했으며 자신을 더듬는 악의에 찬 손은 그 주인의 욕망을 채우기 바빴다. 욕실에 있던 가운에 두르는 허리띠가 자신의 손목에 감기고 예쁜 연노랑색 수건이 자신의 시야를 완전히 덮었을 때 귓가를 두드린 것은 희망 하나 없는 새빨간 불길과도 같았다.
 
"천천히, 음미해주마. 이 몸은 자비로우니까."
 
웃음소리가 습기를 머금어 질척하다. 자신의 것을 은밀히 자극하며 숨겨둔 입구를 헤집는 손길에 비명이 새어 나오자 맹수는 그것이 마음에 안 드는지 자신의 것으로 진원지를 막아버린다. 말캉한 것들끼리 얽히고설키다 새하얀 송곳니가 토끼의 귀를 씹듯 이를 삽입한다. 씹히는 고통에 말캉한 살덩어리가 격동한다. 세게 약하게 강 약 중간 약. 3/4박자를 맞추듯 박히는 치열에, 붙잡힌 생쥐는 버둥거리지조차 못한 채 간헐적으로 바들거렸다.
 
"조금은, 말을 들을 의지가 생기지?"
 
폐에 공기를 들이붓듯 오르락내리락 하는 상체를 손톱으로 긁어 붉은 핏방울이 맺히게 했다. 몸의 열기 때문인지, 새겨진 상흔의 쓰라림 때문인지 먹잇감은 움찔거리며 여전히 바쁘게 움직이는 맹수의 손길을 거부하려 들었다. 그것이 맹수의 마음에 들 리 없을 터인데 그 반응이 만족스럽다는 듯 마스터마인드는 조심스레 목덜미에 턱을 괴었다. 바들거리며 움찔거리는 것이 그의 쾌감을 자극했다.
 
"조금 더... 맛보고 싶어..."
 
예쁜 색이라며 볼을 한 번 머금었던 입술이 목덜미를 향한다. 간을 보듯 움직이던 애타는 움직임에 짓씹는 고통이 덧씌워진다. 물어뜯긴 자리에는 어김없이 붉음이 방울방울 맺혀 흘러내렸다. 비명마저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움직임은 점점 거칠어졌다. 붉게 물든 어깨를 보며 마스터마인드는 분홍빛으로 잘 익은 고깃덩이를 욕실바닥에 눕혔다.
 
"Good day to die."
 
 
 
 
 
다음날 동이 텄을 땐 어찌된 일인지 모두 욕실 앞에 모여 있었다. 새하얗던 바닥에는 누구의 것인지 짐작조차 안 되는 살점과 핏덩이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에스퍼, 너 여기서 시공간 열었냐?"
"......헛소리."
 
계속 거실에서 소파를 차지하고 자고 있던 사람이 이런 일을 벌렸을 리 만무하다. 루나틱 사이커와 사이킥 트레이서는 임무, 아크 트레이서와 타임 트레이서는 연구를 한다고 방 안에 틀어박혀 있었었다. 남은 것은 한 사람.
 
"무슨 일, .......미친."
 
기가 찬 욕실 광경을 보며 혀를 찬 것은 긴 머리칼을 단정하게 묶은 사내였다.
 
"방금 나온 거냐?"
"보시다시피. 욕실 상태가 왜 이래?"
"몰라. 아침에 문 열었다가 기절하는 줄 알았다."
"겨우 이런 걸로 기절이라니. 한심하군."
"말 조심해."
"그런데 애드가 안 보이는데?"
"애송이라면 재료 구한다고 이틀 전에 나갔어. 어제는 돌아온다고 했는데 아직 못 구했나 보군."
 
짧은 조소가 그치자 그저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한 공학자들을 침묵이 흩어버린다. 암실마냥 검붉은 욕실은 이곳을 사용하고자 하는 녀석들이 치웠다. 마스터마인드는 별 일이라 생각하며 모닝커피를 따랐다. 곁에 와 머그컵에 커피를 따르는 자신의 과거와 똑같은 모습에 마스터마인드는 입맛을 다셨다. 오늘따라 길게 머무는 시선에 아크 트레이서가 망막에 자신을 담는다.
 
"...할 말이라도?"
"좀 씻어라."
"너야말로."
 
쏘아붙여진 불쾌함에 마스터마인드는 애틋한 시선으로 황금색 머리띠를 바라보았다.
 
"너도 씻을 거냐?'
"그래야지."
"저녁엔 내가 쓸 거니까 비워 둬."
 
통보에 가까운 발언에도 나긋함이 이어지자 아크 트레이서는 해가 서쪽에서 뜨겠다며 방으로 돌아갔다.
 
"웬일이냐? 네가 저런 발언에 가만히 있고."
"귀찮아서."
 
지극히 그다운 대답에 혀를 차며 각자의 아침거리를 들고 공학자들은 제 갈 길을 갔다. 마지막으로 느긋한 흑자안이 사라지자 부엌에 남은 단 한 쌍의 자안이 가늘어졌다.
 
'조금 더 달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비렸어.'
 
어젯밤 들이킨 와인이 별로였다는 듯 마스터마인드는 커피를 한 모금 머금었다. 목울대로 넘어가는 소리가 상쾌했다.
 
'오늘은 무슨 맛일까?'
 
행복한 고민에 절로 입꼬리가 올라간다. 그러나 그 음흉한 미소의 목격자는 커피 넘어가는 소리뿐이었다.

 

 

부스럭거리며 잔챙이들이 발등에 차인다. 뜨겁고 끈적한 점액질이 신발에 묻은 것이 거슬린다. 언제 더러운 마족놈들의 피가 튀었는지 새하얀 코트가 얼룩져 있다. 실책이라며 혀를 작게 찬 마스터마인드는 점점 바닥으로 치닫는 기분을 제어하는데 어려움을 느꼈다. 샘솟는 짜증을 억누르며 마스터마인드는 집으로 돌아왔다.

"마마, 왔어?"

저만 기다렸다는 듯 쪼르르 달려나오는 생명체에 어김없이 귀찮음을 느끼며 조용히 밀어냈다. 평소 같으면 귀찮아하면서도 자신을 받아주는 마스터마인드였기에 오늘 그의 행동이 이상하다 느낄 법도 하건만 생명체는 그것보다 서운함을 더 크게 느꼈다.

"계속 기다렸는데...무려 일주일이나 기다렸는데..."

네 녀석이 기다리든 말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마스터마인드는 쏘아붙이려다가 몰려오는 피로에 불쾌하다는 듯이 이맛살만 찌푸리곤 욕실로 들어갔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며 안락함을 느꼈다. 산성의 점액질이 알게 모르게 튄 것인지 얼굴 한 쪽 부분이 쓰렸다. 오랜만에 만긱하는 개운함이 하나 둘 쌓이자 눈꺼풀이 내려왔다. 마스터마인드는 그대로 시야를 꺼버렸다.

눈을 떴을 땐 물이 미지근하게 식은 후였다. 대충 몸을 닦고 방으로 가는 동안 본 거실엔 불빛이라곤 없었다. 자신의 방, 모든 연구 자료와 생활용품이 있는 그곳에 발을 들이며 침대에 쓰러지겠다는 그의 계획은 방 안을 서성이는 존재에 의해 무참히 부서졌다.

"마마..."

...귀찮다. 대체 어디까지 자신의 한계를 시험할 생각인 걸까? 대충 잠옷을 걸치며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침대 위로 쓰러졌다. 피로에 지친 몸이 휴식을 요구하고 있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다이너모들도 휴식모드로 돌려버린 그에게 필요한 것은 잠이었다. 이 녀석에 대한 훈계는 내일 해도 될 것이라며 타협한 마스터마인드의 의식은 점점 흐러졌다. 등 뒤로 부비적거리는 움직임이 느껴졌지만 일일이 반응할 만큼의 힘이 없었다. 귀찮다. 그냥 넘어갈 생각으로 아니, 내일 얘기할 생각으로 감각이 무뎌지길 기다렸다.



숨 막히는 소리가 들린 것은 시야가 돌아오지 않았을 때였다. 시작 지점은 의식에 없었다. 그저 의식이 돌아왔을 때 어렴풋이 누군가가 자신의 손을 잡고 컥컥거리고 있었다는 것 뿐.  왜 이렇게 된 거지? 누가 날 위협했나? 옷 안으로 손이 들어왔나? 목을 만진 건가? 내가 잡고 있는 건 누구지? 

"...내가 말했을 텐데."

무릎으로 찍어내리자 아래에 깔린 존재가 고통에 부르르 떠는 것이 느껴졌다. 목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자 저항하던 손이 거세졌다. 잡는 것에서 때리는 것으로,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세포들이 점점 커져가는 동공을 포착했다. 자신의 것이라 믿기 힘든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뇌까렸다.

"한 번만 더 귀찮게 하면 실험체로 쓴다고 했던가?"

손에 살짝 힘을 빼자 눌려있던 기도가 열리며 급하게 산소를 갈구했다. 오르락 내리락 가쁘게 움직이던 그것은 어느 정도 삶을 되찾았는지 조금씩 진정되어 갔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목걸이와 목줄을 서랍에서 꺼내며 마스터마인드는 자신의 밑에 깔려 있던 존재에게 채웠다.

"생각보다 더 멍청하군."

겁에 질린 시선에 입꼬리가 올라감을 느끼며 목줄로 손목을 포박했다. 오늘은 얼마나 재밌을까. 어떤 표정을 지어줄까. 아니, 뭘 하면 네가 살려달라고 빌까?

"시작해볼까, 타임 트레이서."

올라간 입꼬리에 스민 달빛에 날이 서있었다.

이런 생각은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약한 감상. 그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애초에 감정이 없는 내가 이런 걸 느껴야 할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아토믹 블래스터."

조용히 앞을 가로막는 적들을 쓸어버린다. 한 때는 감정회로가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닫아버렸다. 아키텍처와 엑조틱 외의 새로운 코드가 발견되면서 보다 더 강해지기 위해 내린 특단의 조취. 그것은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나를 더 강하게 단련시켰다.

무리의 우두머리쯤으로 인식되는 거대한 몬스터가 앞을 가로막는다. 앞으로 하나. 너만 없애면 이곳은 내가 가지게 된다. 결의를 담은 붉은 기운이 몸을 감싼다.

"한시적 리미트 해제. 퀸스 쓰론!"

오늘에야 말로 알테라코어를 탈환한다. 알 수 없는 돌로 된 몬스터들이 알테라 섬을 점령하면서 퐁고족들은 모두 멸종했고, 이곳은 현재 나소드와 한 때 살았던 종족들의 잔재만이 황무지처럼 남아있을 뿐 그 어떤 생명체도 없다. 이곳에 온 지도 어언 한 달.  더 이상의 시간 지체는 위험했다.

"으윽.."

우두머리는 우두머리였다. 강한 녀석을 상대로 감정회로가 있던 과거였다면 상황이 조금이라도 달랐을 테지만 지금은 그런 것이 없다. 앞을 가로막는 것이 있다면 없애면 된다. 그게 무엇이든.

"루나틱 스커드"

돌이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주변의 있던 자잘한 것들까지 섬멸했다. 대적하지 못할 최후의 스킬, 하이퍼 액티브라 이름 붙인 마스터피스(masterpiece). 광기를 품고 하늘을 가르는 탄도 미사일은 여왕의 앞에서 그녀의 고향을 되찾아주었다.











그로부터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을까.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래 잔 여왕이 자신의 작은 왕국을 본다. 모든 것이 부서졌지만 코어만큼은 보존되어 있어 몰락한 나소드킹을 되살리는데 성공했다. 공장은 다시 가동되었고 기존보다 진화된 나소드들이 생산되어 그들의 작은 왕국을 건설했다. 모든 시스템이 안정화되고 나소드킹이 자신의 의무를 다할 수 있을 때 여왕은 긴 수면에 들어갔다. 언젠가 자신과 같은 고대 나소드가 나오길 바라면서.

긴 시간이었다.

꿈에서 여왕은 '동료'라 불리던 사람들과의 여행을 시작했다. 여러가지 사건이 있었다. 요리를 하다 태우고, 빨래를 하다 물살에 옷을 놓치고, 장난을 치며 가다가 나무에 머리를 박은 붉은 머리 소년을 한심하게 보기도 하고, 저처럼 나소드를 연구하던 흰 머리 소년과 티격태격 싸우기도 하고, 나소드가 많던 아틀라스에 가고, 그리고, 또, .........



"언제 돌아오실 것입니까, 여왕이시여."

부스스. 일어났지만 꿈에 본 이들 중 지금 그녀의 곁에 있는 '동료'는 없었다. 감정회로를 닫아버렸기에 느껴지는 것은 없었으나 구석 한 켠에서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가 의식을 계속 괴롭혔다. 항상 궁금했었다. 알테라를 탈환하고서부터 자신을 괴롭혀 온 것이 무엇인지, 그 때 수면을 선택한 것이 단순히 쉬기 위함이었는지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가벼운 복장으로 나소드들의 배웅을 받으며 엘리오스 대륙으로 향했다. 바랬다. 누구든 좋으니 아직 남아있는 사람이 있기를. 머리 속에 긴 머리의 궁수가 떠오른다.

'너무 늦지 않았기를.'

여왕은 간절히 소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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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아직 기억하고 있다. 살랑이는 연녹색 위에 앉아 빛이 만개한 하늘을 바라보며 어머니의 손을 잡고 새근새근 잠이 들던 시절의 기억을. 꽃내음 가득한 봄바람이 어머니와 내 머리칼을 쓰담을 때 어렴풋이 말했었다.


"엄마."

"왜 그러니 아가?"

"전 엄마가 너무 좋아요."


내 가문이 멸족당하고 어머니께서 나를 구하려다 대신 당하셨을 때 나는 도망치고 있었다. 잠에서 깨어나니 집은 불바다였고, 어머니는 더 이상 내 옆에 없었다. 그 뒤로 물건인 것처럼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이용당하고, 버려지고, 표현할 수 없는 꼴을 많이 당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건 슬프지만 내가 당한 꼴을 당하지 않은 것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타임 트레이서가 됐다.


확률은 50%가 조금 넘는 수준. 성공할 거란 확신도 없었고, 그 전에 시공의 독소로 사망할 확률이 더 높았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았고 수 천번, 수 만번의 실패 끝에 내가 태어난 시공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시간대는 어머니가 살아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절망스러웠다. 그렇게 노력해서 겨우 왔는데 어머니는 이미 싸늘한 상태였다. 어째서? 그건 나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다시 시작된 실험은 육신을 더욱 망가뜨렸다. 시공의 독소는 천천히 내부에서 외부를 잠식해가며 살을 파먹고 장기 속으로 침투하다 못해 겉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눈물이 검은색이 된 것은 물론이거니와 비쩍 마른 몸은 더 이상 살이 찌지 않았다. 독소정화제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지만 이마저도 맞지 않으면 시공을 열 수 없었기에 어거지로 목에 주삿바늘을 꽂으며 실험을 연명하고 있었다. 오늘도 그런 수많은 날들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엄마?"



눈 앞에 내 것처럼 새하얀 머리칼을 휘날리는 여인이 없었더라면.



"아가?"



눈 앞에 날 알아보는 어머니가 없었더라면 검은색 눈물이 떨어질 일도 없었겠지.


어머니는 다른 사람들이 흉측하다 부르는 이런 모습마저 사랑해주셨다. 나는 간호를 받았고, 그냥 어쩌다가 갑자기 아프게 된 장성한 도련님 정도가 되었다. 어머니와 살 수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난 행복했다. 집에 화재가 나기 전까진.


누가 불을 질렀는지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 난 모른다. 그저 벗어나고 싶어했던 과거가 다시 반복되는 것에 겁에 질려버렸다.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숲 속으로 도망가셨다. 그런 어머니의 손을 붙잡은 내 손에 힘이 들어간 순간 총성이 울렸다.






"....아가? 아가!"






눈에 보여서 다행이다. 시꺼멓게 변했을지라도 날아오는 은빛 탄환을 붙잡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몸이 기우뚱하며 쓰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팠다. 아팠고, 그저 아팠으나 풀에 피가 번지듯 미소가 번졌다.




"엄마."

"아가...아가 죽으면 안 돼..아가.."

"전 엄마가 너무 좋아요."




그동안 사랑해줘서 고마워요.

나 알아봐줘서 고마워요.

이런 모습의 나도 사랑해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내가 당신 대신 죽을 수 있어서 기뻐요.

엄마.


사랑해요.













불타는 저택에 주인을 잃은 다이너모가 전원이 꺼지기 전 마지막 기록을 파일로 작성한다.


'2016.5.15. 실험 성공.'


저장하기 전에 꺼져버렸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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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8 ~ 데이터의 결말

성가셔...

아트와 통화가 끝나고 한참이 지난 지금도 근육돼지는 내 허리를 껴안고 놔 줄 생각을 안 한다. 덕분에 따뜻하긴 하다만 움직임의 제약이 많아 불편하다.

"루사..."

몆 시간째 이 모양이다. 내가 부르면 금새 자는 척을 하며 더 들러붙는다. 쳇!

"연구에 방해되니 제발 좀 놓지?"
"넌 알고 있었냐? 걔네 둘 사귀는 거."
"인제 눈치챘군."
"이미 알고 있었다만 다들 숨기는 눈치라서. 사트에겐 내가 아는 거 비밀로 해 줘."

건성으로 '그래.'라 대답한 뒤 다시 데이터에 몰두했다. 쏟아지는 숫자들과 수치들. 너희들은 내 물음에 답을 줄 수 있을까?




"분석한 결과 이 세계에는 없는 구조 같다."

저녁을 건성으로 먹으며 아트에게 지금까지 분석한 정보를 전달했다. 사트는 피곤하다며 나오지 않았고 아트는 지쳐보이지만 식물 얘기에 금새 눈을 반짝거린다.

"...결론은 이 세계 생물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는 거다."
"그럼 어떡하죠?"
"다시 나타나지만 않는다면 상관없을 일이다만 어째 그럴 거 같지 않군. 근데 타트는 어디 있지?"

원래 늦게 나오는 녀석인지라 신경 쓰지 않았는데 오늘은 영 안 올 분위기다. 제 형과 다르게 밥은 꼭 챙기는 녀석인데...

"오다보니 문 잠겨 있었어요."

문득 저번 통화가 생각났다. 아주 잠깐이지만 파랗게 변했던 얼굴과 당황한 음성이 좋지 않은 예감을 쿡쿡 찔렀다.

"타트 녀석은 내가 챙길테니 넌 사트에게 가 봐."
"네. 안녕히 주무세요."

어느 정도 회복된 모양이다. 궁금증도 일단락 됐고 아픈 것도 참을만 해진 걸까.

"먼저 일어날게."

루사를 놔두고 음식을 적당히 챙겨 타트의 방으로 향했다. 잠긴 문 너머로 기척이 없다. 문을 부숴야 하나?

'규칙 1조 1항 문 잠그고 들어간 사람을 귀찮게 하지 말 것.'

그래. 단순히 실험이 안 끝난 걸 수도 있겠지. 노크를 한 뒤 문 아래 구멍으로 음식을 밀어넣었다. 이거라도 열려 있으니 다행이다.




그 시각 타트는 디에의 실험실에 있었다. 차원을 이동할 수 있는 오직 둘만이 올 수 있는 그곳엔 기형의 인간이 마족화된 다이너모로 감싸진 채 수면에 빠져 있었다.

"완성했다."

광기인지 집착인지, 복합적인 감정에 사로잡힌 두 눈은 기묘했다.

"어떠냐, 내 작품이?"

타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물끄러미 바라볼 뿐.

"아무 말도 안 하는군. 망가진 것에 대한 연민인가? 크하핫!"

타트의 오른쪽 얼굴이 뒤틀린다. 붉게, 검게, 푸르게, 보랏빛의 각인이 진동하자 눈쌀이 절로 찌푸려진다. 고통스러워하는 타트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디에는 타트의 오른쪽 눈을 뽑아버렸다.

"그 불쾌한 시선도 오늘이 마지막이군. 이제 한 쪽 밖에 없으니 안대 따윈 필요 없겠지?"

디에의 손에서 하늘하늘 흔들리던 안대가 찢어졌다. 지켜봐. 난 반드시 이룰 거니까. 네가 버린 우리의 꿈을 내가! 반드시!! 성공시킬 거니까!!!
 웃으며, 디에는 기형의 인간과 함께 차원의 틈으로 사라졌다. 아무 저항도 않던 타트는 울며 자조했고 그의 검게 물든 눈은 붉은 액체를 뿜어냈다. 그 모습이 가히 위협적이여서 마족이 강림한 것이라 오인할 상황이었다.




Day9~ 새벽
 
'탁 타닥 드르륵'

주인 없는 실험실을 누군가 뒤지고 있다. 앉아있다고 바뀌는 것은 없기에 소년은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그러기를 몇 시간째. 드디어 원하는 것을 찾은 듯 거친 숨을 몰아쉬며 흐릿한 시선으로 자신의 손목을 보았다.

"좌표설정."

위험한 여행의 시작이었다.




Day 10~ 방심하지 마

오늘도 연구실은 평화로웠다. 시끄러운 것보단 낫지만, 따분하다.

"루사한테나 가볼까..."

...

...

...


그래. 이 몸이 친히 방문해볼까?

그러나 계획은 실현되지 못 했다. 방을 나서려 일어선 순간 그 녀석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마마, 위험해!"
"대낮부터 무슨..."

헛소리냐고 쏘아붙이려 했다. 이어진 강력한 소음만 아니었다면.

'우당탕탕탕!'

건물이 흔들리고 가루가 떨어진다. 간간히 돌조각이 떨어지는 게 보였고 나를 감싼 루사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안 다쳤어?"

피투성이가 된 채 묻는다. 내 몫까지 받아낸 모양이다. 다행히 건물이 붕괴되진 않아서 조심스레 구급상자 쪽으로 갔다.

"...읏..."
"엄살 부리지 마."

신음하는 녀석을 봐주곤 구급상자를 들고 복도로 나왔다. 부디 무사해야 할 텐데..!

"아트!"

이쪽은 상황이 더 안 좋아보였다. 직격탄을 맞은 듯 이곳저곳이 붕괴되어 있었고 벽에 구멍도 나 있었다.

"사트는 어디 있어?"

아트를 짓누른 돌을 들어올리며 루사가 물었다. 다행히 몸은 괜찮아 보였다. 부러졌을 순 있겠지만 절단할 일은 없을 것 같다.

"...밖으로......"
"여긴 내가 맞지. 필요하면 엄호하겠다."

혼절한 아트에게 응급처치를 하니 루사가 제 동생을 데리고 돌아온다. 이미 혼절한 상태. 충격을 그대로 받은 건지 상태가 말이 아니다.

"찾다가 다친 거냐."
"살릴 수 있나?"

감아준 붕대 위로 흐르는 피에 낮게 빛나는 눈빛이 짐승의 것과 닮았다. 어떤 놈이든 가만두지 않겠단 눈빛에 등골이 서늘하다.

"가만두지 않을 거다."

이 가는 소리가 들린다.

"절대 가만두지..."
"굿 데이 투 다이."

응급처치를 끝낸 난 싱긋 웃으며 최후판결을 내렸다.

"다이너모, 전투 모드로!"



**



"크하하학!"

마을 집 서너개를 한 번에 날린 존재가 뒤를 돌아본다.

"부숴버려!"

한 마디, 한 마디에 터전이 날아가고 삶이 사라진다.

"신나. 너무 신나!"

누군가의 즐거움은 타인의 악몽을 자아냈고, 그 악몽으로 빚어진 미소는.






"팬저 버스터!"



비명소리로 물든다.

"지금 뭐 하는 거지?"
"네 녀석들..."
"정신 차려! 왜 그러는 거야?"
"......크하하핫! 몰라서 묻는 거냐? 네놈들이 원하던 강력한 힘. 내가 손에 넣은 이 힘을 보라고? 어때? 멋지지 않나?"
"그래서 마을을 쑥대밭을 만들고 있는 거냐!"
"흥. 너희들이 원하던 게 이런 거 아니었나?"
"제정신이냐!?"

웃는 미소가 루시퍼처럼 황홀하다.

"이제 날 막을 수 있는 건 없어! 전부 내 손에 넣어 더 강해지겠다. 협조할 생각이 없다면 비켜서라."
"그렇게 둘 것 같아?"
"아포칼립스!"

강력한 전파장이 진동한다. 빛, 전기, 먼지. 자욱한 연기 속에서 나타난 건 승리가 아닌 잃어버렸던 소중함.

"너...넌!"

정확하겐.

잃어버렸다 '되찾았다'고 생각한 소중함이었다.
 

Day4 ~ 소문을 타고

"사트 뭐해?"
"훈련."

역시나 그 형에 그 동생이다. 형이 더 능글맞긴 하지만 훈련 중엔 둘 다 단호박이다.

"오늘 아침에 재밌는 걸 봐서...혹시 네 형이랑 마마형이랑 사겨?"

들던 역기를 놓칠 뻔 했다.

"ㅁ...뭐? 형이?"
"요즘 계속 붙어다니잖아. 마마형이 연구자료 같은 거 들고 루사형 방으로도 들어가던 걸? 나올 땐 콧노래까지 부르던데?"
"헤? 마마형이?"

역기를 들다가 마마형을 죽이면 죽였지 사귄다고?

"아트는 알아?"
"마마형을 그대로 빼다 박은 아트님이 아시면 그 자리에서 코코아를 뿜을 걸?"
 

"크핫!"
"내 말이 맞지?"

뜨거운 코코아를 어쩌지 못하고 캑캑거리는 아트를 두고 두 트레이서는 이 사건을 그대로 조망하기로 했다.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건진 모르겠으나 전말보단 결말이 더 궁금했다. 아트만이 시체라도 본마냥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Day5 ~ 여름에

볕 좋은 여름날이다. 아지트 옥상의 습한 바람과 작열하는 햇빛에 오후가 하품한다. 늘어지게 자고 싶다.

"형, 여기서 뭐해? 한참 찾았잖아."
"무슨 일이지?"

못 들을거라도 들은 표정이 됐다.

"형, 요즘 너무 마마형 같아."
"그래?"
"밥 먹고 바로 방에 가는 것도 그렇고, 방에만 처박혀있는 것도 그렇고, 옥상에 혼자 있는 것도 그렇고, 둘이 몸만 바뀐 거 같아."
"......그래서 용건은?"
"지금처럼 용건만 따지는 것도 그렇고."
"할 말 없음 내려가지?"
"혹시 바다 갈래? 애들이랑 형들이랑 다같이 가기로 했는데 형만 못 찾아서..."
"마마도 가나?"
"...응..."
"언제 출발하지?"
"2시간 후."
"바쁘군."

걸음걸이, 옷차림, 성격까지 전부 마마를 닮아가는 루사를 보며 사트는 속으로 한숨을 내셨다. 아트 성격이 왜 그런지 이해가 된다.

 

"아트 안에 있어?"

대답도 하기 전에 문부터 열고 들어오는 들뜬 모습에 아트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연구해야 한다고, 같이 가자고 할 땐 내내 거절하더니 사트가 물으니까 바로 수락한다. 속 좁아보이긴 싫어 내색은 안 했지만 섭섭한 마음만은 어쩔 수 없었다.

"아직이네?"

가방까지 들고 와선 완성도 120%의 피서지 코스프레를 선보인다.

"...내가 가잘 때는 콧방귀도 안 뀌더니..."

작게 중얼거렸는데 그걸 들었나보다.

"아트, 삐졌어?"

사랑에 빠진 형의 모습은 이런건가? 아직도 받아들이지 못한 열애설에 점점 루사를 닮아가는 마마가 버거웠다. 그러나 생전 없던 애교를 부린다거나 장난을 치는 게 싫지만은 않았다.

"다음 번엔 나랑만 가자."
"...그래."

대답이 늦다. 입을 비죽 내민 채 툴툴거리니 형이 더 꼬옥 안아준다.

"내가 어떻게든 가줄테니까 화내지 마. 응?"
"형! 남자끼리 이러지 마!"
"남자 이전에 내 사랑하는 동생이다만?"

이건 루사형이 사트가 삐졌을 때 하는 건데... 사트는 엄청 싫어하는 것 같지만 난......싫지만은 않다.

"거짓말 한 거면 다신 안 볼 거야."

그래, 그래. 라며 어떻게든 가겠다고 하니 마음이 좀 풀어진다. 거짓말이라고 해도, 기분은 좋다.

"근데...짐마저 싸게 좀 놔주면 안 될까?"




"바다다-!"

그 형에 그 동생이다. 저 새파란 끝도 안 보이는 망망대해가 뭐가 좋다고 저러는지 모르겠다. 물론, 이건 나와 루사만, 정확하겐 나만 아는 사실일 거다. 다른 이들 눈엔 정반대로 생긴 청소년과 어른 한 명이 바다를 보고 신났다 정도로 보이겠지.

"형이 저렇게 바다를 좋아했구나."

옆에서 멍해진 아트가 짧은 감상을 읊었다.

"바다가 싫어서 거절한 게 아니구나..."
"그건 아닐거다."
"응?"
"바다가 싫어서일 거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바다가 아니라 물을 싫어하거든. 물가, 바닷가, 냇가, 종류 상관없이 싫어할 거다."
"루사형은 마마형 어린시절을 알아요?"
"......안다기 보단 짐작가는 게 있을 뿐이야."

너무 단정적으로 말했나. 그렇게 의심하는 눈으로 보면 내가 미안하잖아. 뭐라고 해명이라도 해야 할 거 같아 말을 고르는데 저멀리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린다.

"아트-, 바다 보고 싶다며-, 왜 거기 서 있어-?"
"가-!"
"기회는 왔을 때 잡아야지-!"

튜브를 끼고 잘도 논다. 내 얼굴로 저런 표정도 지을 수 있던가. 참으로 해맑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 봐. 저 말은 맞는 말이니까."

우두커니 앉아 하늘과 이어진 망망대해를 본다. 그 날도 이런 날이었다. 더없이 해 맑고 밝은 날이었다.

"난 신경쓰지 말고. 가서 형이랑 놀아."

뭐가 찜찜한건지 한참을 내 얼굴만 들여다보던 아트는 말없이 튜브를 들고 바다로 돌진했다. 사트, 아트, 타트, 마마가 된 루사 그리고 반강제로 입수당한 디에까지. 다섯 사람이 노는 걸 보며 잠시 과거로 생각의 좌표를 설정했다.




"우와--, 바-다-다-!"
"우리 아들 좋아?"
"응응! 좋아. 바다 넓어! 완전 커!"

처음 본 바다는 눈이 부셨다. 탁하면서 짙푸른 푸름이 연한 하늘과 이어져 바다와 하늘이 같은 곳은 아닐까란 생각을 했었다. 빛은 다소 바랬지만 그 말을 듣고 웃으셨던 어머니가 여전히 선명하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다로 들어간 나는 파도를 타고 제법 멀리까지 나갔다. 집체만한 파도가 몰려온 건 그 때였다.

"꺄아악!"

누구의 목소린지 분간할 수 없는 비명이 모래를 요동치게 하고 난 그대로 파도 밑으로 가라앉았다. 몸에 끼고 있던 튜브는 어디로 갔는지 잡히지 않았다. 이대로 물 속에서 죽는구나 싶을 때 누군가가 내 팔을 잡아당겼고 난 의식을 잃었다.

"ㅁ...마마야, 정신이 드니?"

눈을 뜬 이후의 일은 기억하기 싫을 만큼 끔찍했다. 날 때부터 체온이 낮았던 어머니는 내가 올라오지 않자 만삭의 몸으로 바다에 뛰어들었고 간신히 날 데려오는데 성공했지만 그대로 임시보건소에서 쓰러지셨다. 직원들이 응급처치를 했으나 이미 새파랗다 못해 보랏빛으로 물든 입술은 다시 생기를 띠지 못했다. 아버지는 병윈에서 눈을 뜨자마자 엄마부터 찾던 아들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주시곤 어디론가 가셨다. 기력을 회복하고 처음 본 어머니의 웃는 얼굴은 사진 속에 담겨 그 날의 하늘처럼 선명하게 빛났다. 그리고 나와 닮은, 그러나 어머니를 생각나게 하는 외모의 아주 작은 갓난쟁이를 만났다.

"이 아이는 아크 트레이서, 네 동생이다."

그게 내 어머니와의 마지막 만남이자 동생과의 첫 만남이었다.




"앗 차거!"

홀딱 젖자 좌표가 원점으로 돌아온다. 짠내가 코를 찌르고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간간히 비웃음 같은 놀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다 한순간 조용해진다. 다른 형태의 짠내가 코를 찌른다.

"......루사, 울어?"

내가...울고 있는 건가...? 고개를 숙인채  헛웃음을 삼키는데 일부가 그만 새나가고 말았다.

"루사 옆엔 내가 있을게."

모래 쓸리는 소리가 처참할 정도로 날카롭게 심장에 박힌다. 어머니도 이랬을까? 내가 파도에 삼켜져 나오지 않을 때, 어머니도 파도 치는 소리가 심장에 박혔을까?

"마마."
"...시...끄러."

주는 호의마저 뿌리칠 정도로 아팠다. 말없이 어깨를 내어주는 온기에 악문 잇사이로 신음이 새어나가 귓 속 모래를 긁는다. 그래. 난 아팠었고, 아팠고, 아프다.

내 흐느낌이 계속 되는 동안 사람의 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우리 외엔 사람 하나 없던 해변은 이질적인 존재는 나 하나뿐인 양 파도치는 소리, 바람 부는 소리, 간헐적인 갈매기 울음소리만이 가득했다.

"괜찮나?
"...흐끅..."
"가끔은, 울어버리는 게 낫지."
"...잘난..흐끅...하지 마."
"핀잔 주는 걸 보니 돌아왔군."

어깨가 푹 젖었다. 그럼에도 불평 한 마디 없이 옆에 있어줬다.

"...왜 말 안 했어? 우는 거 싫어하잖아."
"이럴 땐 고맙다고 하는 거다."
"...미안해."
"미안하면 애들이랑 나랑 바다서 놀자."
"그건......."
"아, 이것도 못 해주냐?"

짐짓 못 말린단 얼굴로 으름장을 놓는다. 그게 루사 같아서 난 웃어버렸다. 그제야 고요하던 해변가에 안도의 숨소리가 들리고 루사의 얼굴에도 웃음이 피었다.

그 날, 난 16년만에 바다에서 재밌는 시간을 보냈다.





 난 우는 것을 싫어한다. 남이 우는 것도 싫지만 내가 우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마마가 그렇게 서럽게 울었을 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여전히 귓가에 쟁쟁한 내 울음소리에 난 자연스레 기억하고 말았다. 오래전에 삭제한, 정확하겐, 삭제하려고 부단히 노력한 기억이...

"엄마...엄마, 가지 마..."


아버지는, 그 사람은 전혀 좋은 사람이 못 됐다. 어릴 적 나는 힘 없는 나약한 어린아이일 뿐 아버지에게 학대 당하는 어머니를 구할 힘따위 없었다. 그러나 의지만은 있었기에 하루는,

"엄마 때리지 마요!"

그 후론 나도 같이 맞았다. 덕분에 엄마를 보호하는 데 거리낌이 없어졌지만 번번히 내 몫의 폭력 또한 어머니가 감당해야 했다. 어머니의 등은 피멍과 상처로 검붉게 아로새겨졌다. 마치 원래 피부색이 그러하듯이.

"...앞으론 끼어들지 말고 숨어 있어."

아버지가 던진 화병의 파편에 맞아 찢기고 부어오른 상처를 보며 어머니가 하신 말씀은 그러했다. 숨어있으라고. 눈에 띄지 말라고.

"어린 놈의 자식이 벌써부터 외박이야!"

오늘도 술을 먹고 들어온 아버지가 난동을 부리고 어머니의 송곳같은 비명이 귀를 찌르다, 돌연 잠잠해졌다. 아버지가 갔을 새벽 난 걸어잠근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어머니는 마룻바닥에 엎드려 계셨다.

"엄마, 일어나 봐. 약 발라야 돼."

어머니의 팔이 마룻바닥만큼 차갑다. 바닥에 흥건한 피가 푸르게 변색될 동안 난 어머니가 시킨 대로 숨어 있었다. 눈에 띄지 않게. 흐르는 눈물이 마룻바닥에서 차게 식는 걸 보며 다짐했다. 그 새벽이 내가 운 처음이자 마지막 날이 될 거라고.

"여보세요?"

동이 트자 경찰에 전화했다. 여기 사체가 있으니 장례 좀 치뤄달라고. 그것이 내가 막을 수도 있었던 비극의 주인공에게 발라준 마지막 약이었다.




탁.

손가락끼리 부딪히는 마찰음에 고개를 든다. 나, 아니 마마가 서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해?"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거짓말 하지 말랬지?"

마마는 그 날 바닷가에서 내 어깨에 다 쏟아버린 후 괜찮아졌나보다. 덕분에 난 슬럼프에 빠졌지만.

"가끔은 울어버리는 게 낫지."

저 녀석, 기억하고 있었나?

옆에 턱 앉아 자기 어깨를 탁탁 두드리는 폼이 선심쓰는 것 같다. 내 얼굴로 그런 표정 짓지 말라고.

"미안하지만 난 마스터마인드라고. 얼굴만 너란 걸 기억해주면 좋겠군."
"...내 얼굴로 울어놓고 잘도 말한다."
"내 얼굴로 튜브 끼고 잘도 놀더군. 여하튼,"
"여하튼?"

얼굴이 새빨개져선 우물거리는 표정으로 머뭇거린다. 고맙단 말이 그렇게 힘드냐... 아주 작게 '고마워.' 한 마디를 더듬거리더니 이내 귀까지 푹 익어버린 마마가 벌떡 일어났다.

"어깨 필요없으면 가..간다!!"

어딜 도망가!

"야, 이건 좀!?"
"난 어깨보다 등이 좋다-."
"어이 잠..잠깐만! 지금은 내 등이다만?"
"원래는 내 등이었다. 내 등이 이렇게 포근하구나. 그래서 네가 맨날 내 등에 기대 데이터를 본 거군?"
"......"
"몸 바뀌기 전에 나도 만끽해야겠다-."

난 농담으로 던진 말인데 어깨 너머로 당황한 얼굴이 보인다. 그게 마마 같아서, 안심이 됐다.

"...뭐라고 했어?"

다행이라고. 괜찮은 거 같아서.




Day6 ~ 전야제

이상하다. 보통 서너시간이면 더 이상 몬스터가 보이지 않는데 올해는 어디선가 끈임없이 나온다.

"다이너모 히트 디텍팅(heat detecting)"

1km 전방에 엄청난 열기가 감지됐다. 만에 하나 마계의 포털이 열린 것이라면 저곳이 근원지리라.

"1km 전방에 고에너지가 감지됐어."
"진원지는 그곳인가?"
"가보면 알겠지."

왼쪽에서 튀어나온 머쉬룸앤트를 썰어버리면서 루사가 씹어뱉었다. 자꾸 튀어나오는 몬스터들이 어지간히 거슬리나 보다. 앞에선 잡몬들이 잔뜩 몰려온다.

"나한테 맞겨. 다이너모 구성모드!"
 
사이드에서 써도 되지만 몬스터들의 중심에서라면 그 효과는 몇십배로 증폭된다.

"사이오닉 제너레이터!"

몬스터들의 유혈을 흩뿌리며 붉게 물든 길을 나아간다. 100m 안으로 들어온 근원지. 저곳만 격파하면 우승은 우리 것이다.




준비는 끝났다.
루사의 몸이 된지도 약 1년이 되간다. 우리의 역할 바꾸기는 얼마 지속되지 않았다. 바뀐 상태가 오래 지속되자 우린 어쩌면 이대로 평생 살아야 할 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고 서로의 몸을 서로의 스타일대로 어느정도까진 개조하기로 합의했다.

"루..아직도 운동 중이야?"
"원래 마지막에 적당히 해주는 게 좋아. 더구나 넌 근육이 전혀 없다고."
"설마 나도 너처럼 우락부락해지는 거냐?"
"그럴려고 해도 불가능 해. 근육이 만들어지지 않는 체질이야. 속근육만 키우고 있으니 걱정마."
"그게 좋은...거라고 해두지."
"나가자."

땀에 젖은 내 얼굴이 낯설다. 다이너모는 겉모습을 바꾸어 서로의 것을 쓰고 있다. 루사의 것은 투박하지만 확실히 강한 맛이 있었고, 내 다이너모는 유려해서 자유자재로 변환이 가능하다. 내가 루사 걸 쓰는 건 어렵진 않지만 재미가 없었고, 루사는 내 것이 지나치게 복잡하다고 했다. 그래서 두달 반 정도 이어진 서로의 연구를 대신해주는 것은 종료됐다. 대신 식사시간에 철야를 선언하고 방문을 걸어잠근 뒤 몰래 서로의 방에 잠입하여 연구를 계속했다.

"올해는 2인조인가?"
"응."
"그나마 다행이군."
"그렇지."

내일은 우리들이 좋아하는 날이다. 우리들은 1년에 두 번 모든 연구실을 비운다. 한 번은 여름으로 휴식을 위해서고, 다른 한 번은 가을과 겨울의 중간으로 서로의 연구성과를 겨루기 위한 시합이 이뤄진다.

'삐비비빅 삐비비빅'

다들 준비된 모양이다.

"푹 젖었군. 오늘같은 날은 사랑 좀 안 하면 안 되냐?"

디에의 비아냥같은 놀림에 폭소한 사트와 못 말린다는 얼굴의 타트와 불편한 기색의 아트가 보인다. 아트야, 그리 보지 마라...

"아트, 형을 그렇게 노려보면 쓰냐-!"
"크학!"

미안하다. 형이 지켜주고 싶다만 지금은 끼기가 애매하구나.

"이제 그만 시작하지."

우린 총 3팀으로 나뉘어 출발했다. 나와 루사, 사트와 타트, 디에와 아트였다. 디에가 왜 아트랑 붙은 건진 알 수 없으나 수확이 있으니 저럴거란 생각이 든다만...찜찜하다.

'까악 까악 까악'

나소드 까마귀가 시합의 시작을 알렸다.

"자, 어디 한 번 가볼까?"

사냥 개시다!




뭐 이런 미친 괴물이 있나!

살다살다 저런 건 처음 보겠다. 사냥이 시작된 직후 먼저 가라던 디에 형은 어딜 갔는지 안 보인다. 결론적으론,

나 혼자 미친 사람처럼 싸우고 있단 거다!

"드론 액티베이터. 러싱드론."

단거리 공격은 거의 불가능한 저것의 형태를 뭐라 해야 하나. 삼 층으로 이뤄진 탑 같은 형탠데 층별로 플랜트 오버로드처럼 촉수가 있고 촉수 밑엔 길고 짧은 가시들이 진동하고 있다. 층의 회전방향은 서로 반대이며 빙글빙글 돌면서 촉수가 미친듯이 주변 물건을 집어삼킨다.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무참히 부서지고 융해되고 흡수되었다.

마족 중에 저런 것도 있던가?

새로운 샘플이 나타난 건 좋다만 혼자서 상대하긴 벅차다. 팬저버스터까진 앞으로 15초 그동안 드론으로 어떻게든...

"젠장!"

1층 가시에 걸리고 말았다. 정확하겐 여러개로 나뉘어있던 가시들이 길고 두꺼운 하나의 가시로 변해 내 발목을 관통했다. 촉수들을 피하느라 눈치채지 못 했다. 통증도 통증이지만 움직임이 봉쇄돼 날아오는 촉수를 피하지 못 하는 게 더 큰 문제다.

"이렇게...끝낼 수는..."
"팬저버스터!"

디에형인가. 촉수가 몸을 휘감아 목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뜨겁다. 피부가 녹아내리는, 산을 뒤집어 쓴 듯한 느낌.

"아트! 정신차려!"
"마마 위험해-!"
".........루사-!"




정신을 차리니 회색빛 공간에 누워있었다. 불한증막처럼 덥다. 아니 그냥 불 속에 앉아 있다가 맞으려나.

여기가 어딘지 알아보려고 했으나 음울한 회색만이 시야를 매꿨다.

"들어왔군. 마마는 아직인가?"
"...디..에..."
"그래. 생각보다 오래 버텨서 놀랐다. 뜨겁나?"

난 대답하지 않았다. 당연한 걸 왜 묻는 거냐.

"좀만 참아. 곧 끝날테니."
"언...제?"
"5분 안에."

다른 애들은 어떻게 된 거지? 사트는? 타트는? 개들도 당했나? 마지막에 달려온 사람들은 누구지?

"궁금한 게 많겠군. 열기가 아닌 열기 너머의 것을 느껴라. 뭐가 있지?"

온 감각을 집중했다. 뜨거운 온기 너머로 생명력이 느껴졌다. 새들과 금속의 매끄러움, 숨 쉬는 나무들. 이상하다. 분명 몬스터가 다 부셨을 텐데? 잠깐. 이런 거 어디서 본 적 있다.

"크큭, 크크큭!"

플랜트 타워 에너지 뱅크.

"루사, 네가 제일 빨리 당했다."

원령들이 뭉쳐 만들어진 살아 움직이는 생명력의 원천. 요절한 자들이 깃들어 주변의 모든 생명을 빼앗는 악의의 결정체.

"우리 츤데레 공주님은 언제까지 버티실지 볼까?"

시야가 맑아진다. 흐릿하던 것이 형체를 찾는다. 여전히 몸은 굳어 있었지만 간신히 고개는 돌릴 수 있었다.
 무기력한 사트와 타트가 보였다. 사트는 늘어진 채 위를 보고 있었고 손을 쥐락펴락 하는 타트의 일그러진 옆얼굴이 보였다.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피투성이인 루사형이 보인다.

"오-."
 
디에형의 탄성과 함께 공간이 흔들렸다. 흔들리는 찰나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몸을 내리누르는 압력은 이 괴물이 만들어낸 것인가?

"크윽...네 녀석!!"
"사랑싸움은 단둘이 하라니까."
"디에. 이게 무슨 짓이지?"
"그래도 날 알아차리는 건 마마 뿐이군. 그 능력은 인정해주지. 그러나 루사 위에 있으면 매력지수가 반감된다고."
"너!"
"힘빼지 마라."

하고 많은 데 중에 왜 루사 형 위로 떨어진 거야!
형! 진짜 사귀는 거야?

"후후후 실험 개시다!"

주변이 하얘졌다.




Day7~  Happy Halloween

눈을 떠보니 방 안이었다. 몸을 일으킬랬으나 온몸이 짓눌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햇살이 내리비치는 오후인가. 아트랑 타트는 어떻게 됐을까? 사냥을 하다가 디에 형이 재밌는 몬스터가 있다고 꼬드겼고 따라갔다가 당했다. 그 몬스터는 충분히 강했다. 이전까지 본 적 없는 독특한 형태의 에너지 코어. 내 육체에 저 기술을 접목한다면 난 형보다 강해질 수 있을까? 더 생각하고 싶지만 내리누르는 눈꺼풀이 무겁다. 조금만...더 자고 생각하자...

형이, 루사형이 형을 안았다. 진짜 사귀는 걸까? 어둠 속을 헤매면서도 여전히 두 사람의 관계가 궁금했다. 어째서. 어째서? 부유물처럼 암흑을 떠다닌다. 이 어두운 곳을 나가면 꼭 물어보겠어.



"역시 일어나 있었군."
"하나 물어보지."
"대답은 바라지 마."
"넌 알고 있었나? 우리가 바뀐 것."
"크훕!"
"비웃지 마라. 입 찢어질라."
"공주님이 그런 저렴한 단어를 쓰면 안 되지."
"공주님이라고 하지 마!! 목적이 뭐냐?"
"흠, 글쎄? 색다른 할로윈?"
"장난치지 마!"
"왜 네 마음대로 장난이라 규정하지? 난 충분히 진지한데?"

방 안이 사악한 웃음소리로 물들고 유일한 목격자의 얼굴이 소리에 따라 검게 물들어갔다. 살기는 보랏빛을 띄며 짙어져갔다.

"걱정 마라. 애들은 다 깨어날 거야. 요즘 다들 철야길래 수면시간을 확보해주려던 것 뿐이라고. 그리고,"

방문을 열며 디에가 상큼하게 말했다.

"이럴 땐 고맙다고 하는 거야 공주님."


"젠장."

방문이 닫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루사가 깨어났다. 다크서클이 턱 밑까지 내려올 기세였으나 내가 더 심했나보다.

"이럴 때라도 쉬면 안 되냐?"
"시끄러."
"합법적으로 자게 해준 거라잖아?"
"듣고 있었어? 근데 왜 가만히 있었어?"
"말해 무엇하나. 한 두 번도 아니고."

디에는 악명 높았다. 이곳에서는 침대 하나만 딸랑 있는 작은 방만을 쓰며 그의 실험실을 본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몇 일씩 행방불명 됐다가 가끔씩 이곳에 오곤 했다. 여름과 몇일 전 있었던 전야제. 그 때가 아닌 다른 시기에 그가 아침을 먹으러 온다거나 건물 어딘가에 앉아 있다던가 한다면 그것은 기막힌 악운이었다. 왜냐하면 걸리는 사람은 그의 실험대상처럼 되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다들 예전보다 강해졌고 그가 지키는 길목을 알기에 피해다니지만 그는 막내인 애드를 7일 만에 안대를 찬 소년으로 만들어왔다. 새 이름을 원한 그를 우리는 타임 트레이서, 타트라고 불렀다.

"한동안 조용하더니 우리 모두를 실험대상으로 쓸 줄이야. 이래서 맹수가 조용하면 더 경계해야 하는 건데..."

손이 내 손을 잡았다. 온기가 느껴졌다.

"그 때 왜 나 대신 맞은 거지?"
"네가 먼저 가면 디에가 널 약한 공주님이라 했을 테니까."
"그건 살았으니 하는 말이고. 죽을 수도 있었어. 왜 그랬어?"

더 다그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가 꽉 껴안는 바람에 사고가 마비됐다. 버둥거렸으나 이 상태에서도 루사는 나보다 셌다. 근육돼지.

"고마워."
"밑도 끝도 없군."
"살아줘서."
"......나도."

안겨 있어서 못 보는 너의 얼굴엔 미소가 피었을까?

"근데 뭐 이상한 거 못 느끼나?"
"음?"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웃는 거 같으면서 우는 듯한 표정이 됐다.

"디에가 고마워하라더군."

루사는 작게 뇌까렸다.

미친놈.




"허리가 쑤셔...아트, 파스 좀 붙여쥐."
"밥 먹고 하면 안 되냐."
"아앙~ 지금 해 줘~ 아프단 말야~"

아침부터 우는 소리를 하는 사트에게 꿀밤을 먹이고 싶었지만 저를 어미 잃은 새끼 짐승처럼 올려보는 얼굴에 아트는 한숨만 내셨다.

'달칵'

샐러드를 한 두 입 먹더니 포크를 그대로 싱크대에 투척한다. 먹던 샐러드를 랩으로 싸곤 냉장고에 넣은 뒤 부엌을 나간다. 루사처럼 서글서글 하던 마마형이 갑자기 원상태로 돌아온 것에 사트와 아트는 어리둥절했다. 유일하게 루사와 타트는 덤덤했다. 뭔가 바뀐 분위기에 제자리를 찾은 것 같으면서도 느껴지는 이질감에 동생들은 얼굴만 마주볼 뿐이었다.

"비켜봐."

마마가 나가고 퍼뜩 정신을 차린 아트는 칭얼거리는 사트를 무시하고 부엌을 나갔다.

"형!"

헐떡거리며 붙잡는 동생을 의아하게 보며 마마는 다음 말을 기다렸다. 머리가 살짝 헝크러져 있다.

"무슨 일이지?"
"형 괜찮아?"
"뭐가?"
"그냥...전야제 이후로 괜찮나 해서. 거의 안 쉰 거 같던데."

마마는 생각했다. 자신의 동생이 진짜 묻고 싶은 건 저게 아닐 거다.

"내가 요즘 너무 서글서글하게 지냈단 생각이 들어서. 그러니까 그깟 괴물 하나 처리 못 하고 당한 거겠지. 그렇지?"
"형?"
"걱정 마라. 앞으론 그런 일 없을 테니."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돌아서려는데 아트의 다급한 물음이 발목을 잡는다.

"루사형이랑 무슨 사이야?"

흠...이번엔 시간이 좀 걸렸다. 호감이 있다 그러기엔 확실치 않았고 싫어한다고 하는 건 맞지 않았다. 단순한 라이벌의 공기는 모호한 흐름으로 변질된 지 오래였다. 근데 아트 표정이 애매하다.

"아트. 내 사랑하는 동생아."
"응?"
"질투하니?"
"응?!?"
"나와 루사가 무슨 사인지 왜 궁금하니?"
"그야 애들이 형이랑 루사형이랑 그렇고 그렇다고!"

아트는 마마의 검지 손가락에 입술이 눌려 더 말하지 못 했다. 마마는 붉게 물든 아트가 귀여웠다. 귀는 아직 정상이라 마음에 안 들지만.

"이런. 내 동생이 질투를 할 줄은 몰랐군."
"아, 아니야 그런거!"

그래, 조금만 더.

"질투에 명약이 있긴 한데......내가... 이뻐해줄까?"

조금만 더.

마마는 귀까지 새빨개진 아트의 흘러내린 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었다. 머리를 정돈해주는 손길에 애정이 깃들어 있다.

"넌 머리 정리 잘 해야 해. 사트가 덮칠라."

마마는 무어라 항의하는 동생에게 상큼한 음성으로 쐐기를 박았다.

"루사 질투하지 마. 형 넘버원은 항상 너니까."

그렇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귀까지 새빨개진 아트를 보며 마마는 입술을 깨물었다. 저 눈치 빠른 녀석이 알아채면 안 되니까. 서둘러 방으로 돌아온 마마는 방문을 잠그고 자지러졌다.




"아트 어디 아파?"

부엌으로 돌아오니 루사형도 없었다. 타트는 피곤한 얼굴로 사트의 등에 파스를 붙여주고 있었다.

"미안. 못 기다리겠어서."
"상관 없어. 고마워 타트."
"..."

머리를 살짝 끄덕인 타트는 파스와 식사의 잔해를 처리하곤 방으로 돌아갔다.

"오늘 형들 좀 이상해."

아트는 아까 있었던 일을 회상하느라 사트가 하는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형들이 괴물한테 먹히더니 원상복귀 됐나 봐."

이에 사트의 얼굴에 사악한 미소가 스치는 걸 보지 못 했다.

'쪽!'

불시에 당한 볼키스에 아트는 멍하게 자극원을 바라봤다. 위험하단 걸 눈치챘으나 이미 늦었다.

"아트야~"

그 뒤는 상상력에 맞기겠다.




디에는 차원의 틈에 개설한 제 실험실에서 모든 열쇠를 틀어쥔 자답게 여유로운 모습으로 책상에 남겨진 편지를 읽고 있었다.

'내 부탁 들어줘서 고마워. 플랜트 뱅크 실험 성공했길 바래. 아니면 누구 덕분에 아까운 자원이 낭비된 거니까. 남은 실험도 성공해서 목적을 달성하면 날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언제가 될 진 모르겠지만.'

끝까지 제멋대로군.

디에는 썩어버린 마음으로 미소 지으며 마마로부터 걸려오는 화상전화를 깨끗이 무시했다. 지하실로 향하는 문을 닫자 더 이상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마 저 녀석도 끈질기군. 다른 녀석은 별 말 없는데 유달리 늘어진단 말이야.

다음에 만나면 어떤 장난으로 입막음을 할 지 궁리하며 전신을 스캔했다. 두터운 철문이 열리고 퀴퀴한, 그러나 상쾌한 실험실 특유의 냄새가 났다.

"안녕? 오늘은 컨디션이 좋네?"

친근하게 부르는 검은 자위가 빛났다. 진득한 녹색 액체가 간간히 기포로 흐트러진다. 워터캡슐 안의 실험체는 연구자의 목소리를 못 듣는 건지 미동조차 없었다. 장착된 산소호흡기만이 간간히 기포를 배출하며 그가 살아있음을 알렸다.

"대부분의 강력한 에너지 동력원은 결국 다른 생물의 생명력을 에너지로 전환시키는 류지. 매개체는 생명력. 즉 다른 생물이 없으면 그건 오합지졸만 못 해. 하지만 플랜트 뱅크는...크하핫!"

모든 걸 흡수하는 검은자위는 새까만 어둠으로 물들어 꿈틀대는 세포 덩어리를 보았다.

"밤새 분석한 결과 이 녀석은 여태 내가 찾아낸 살아있는 동력원들과는 다르단 걸 깨달았어. 다른 것들은 흡수한 생명력만큼의 파워만 쓸 수 있지만 이건 아니야. 흡수한 것보다 강한, 전혀 흡수하지 않아도 강력한 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어! 마침내 그 비밀을 알아냈다고! 우린 더 강해질 수 있어!"

더 이상 약물따위 필요 없을 거야. 무한한 에너지만 있다면 차원을 이동할 때마다 몸이 부식되지도 않을 거고 어쩌면 이미 부식된 부분도 되돌릴 수 있을 거야!

이어진 뒷말은 사악한 웃음소리에 파묻혔다. 그 웃음이 처량하게 들린 건 기분 탓일까?

"크킄, 크크큭, 크하하핫!"

미친듯한 웃음소리를 배경으로 실험이 시작됐다. 잔해. 저 캡슐 안에 든 것은 온전치 못 하다. 그렇기에 살려두려면 지속적으로 매개체를 공급해야 하고 마침내 찾아낸 최적의 생명체를 디에는 주입했다. 풍족하게 얻어낸 샘플로 임상실험은 끝난 상태. 이제 이식하여 결과를 지켜보는 것만 남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하고 디에는 기지개를 켰다. 간헐적으로 움찔거리는 실험체를 그는 흥미롭단 듯이 노려봤다. 새까만 눈자위가 실험중이라 그런지 이성적이다.

"어디 얼마나 강해지는지 보자꾸나. 날 실망시키지 않으리라 믿는다."

비틀린 비웃음은 어딜 향해 가는 것일까?

"애드."




"망할 녀석..."

끝까지 자신의 화상전화를 씹는 디에에게 욕을 퍼부으며 마마는 타트와 통화를 시도했다.

"마마형, 무슨 일이세요?"
"네 형 어딨냐?"

화면은 보지도 않으며 마마가 쏘아붙였다. 타트의 대꾸가 없자 마마는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이 왜 대답이..."

폭발한 마마의 신경질은 이어진 타트의 외마디 신음소리에 소멸했다. 한순간 새파랗게 변한 오른쪽 얼굴이 순식간에 돌아온다.

"너, 무슨 실험을 하는 거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복용하는 약물의 부작용입니다."

힘들어 하면서도 일일히 대답하는 타트가 안 쓰럽다.

"디에가 너한테 실험 중이냐?"
"아닙니다! 그런 건 절대 아닙니다! 그저 제 실험에 의해 생기는 부작용을 방지하기 위한 약물 때문입니다!"
"아님 말지 뭘 그리 당황해?"

이어진 정적에 마마는 타트가 입을 열지 않을 것을 확신했다. 한숨을 쉬며 디에의 행방을 물으니 시공간에 있을 거란 쓸모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디에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전야제 사건은 어떤지 물으니 자신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며 머리를 긁적인다.

역시, 손을 썼군.

마마는 전화를 종료하자마자 바득바득 이를 갈았다. 전야제 때 정체불명의 생명체에게 흡수된 후 제자리로 돌아왔다. 간만에 긴머리를 묶으며 자신의 실험실에 틀어박혀 그 생물에 대해 조사했으나 이렇다 할 데이터가 없었다. 기껏해야 이계의 생물이란 것 정도. 그렇다면 그것은 디에가 이계에서 가져온 것일까?

"하-."

의문투성이다. 풀리지 않는 숙제 같다. 디에, 무슨 꿍꿍이냐. 마마는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다.




그 시각 아트는 자신을 덮쳐 발목의  상처를 핥으려던 사트를 벌주며 책을 읽고 있었다.

"아트 미안해. 다신 안 그럴게. 그니까..."
"팔 높이 들어."
"넵."

끽소리도 못 하고 사트는 팔을 번쩍 들었다. 의자를 든 팔이 미세하게 진동했으나 별 거 아니란 듯 아트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종이 넘기는 소리와 간간히 훌쩍이는 소리만이 정적을 두드렸다. 아트의 눈치를 살피던 사트는 그의 눈이 빛나는 것을 보며 언제 애교를 부려 이 난관을 탈출할지 고민했다.

"아트? 무슨 일이야? 설마 사트가 덮친..."
"그런 거 아니야! 전야제 때 그 식물 말야. 플랜트 타워 에너지 뱅크 같아."
"넌...기억이 나니?"

동생을 놀리던 마마가 진지하게 물었다. 아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찾아봐도 이 세계에는 그런 고차원적인 동력원은 없어. 그래서 내가 조사를 좀 했는데, 이 식물, 엘프랑 비슷해."
"뭐?"
"실은 발목이 꿰뚫렸을 때 가시의 일부를 뜯어냈어. 그것의 파형을 분석한 결과 엘프와 비슷하게 나타났어."

쓰고 남은 샘플이 든 봉투를 흔들며 아트는 데이터를 보내주겠다고 했다.

"분석하고 연락하지."
"이따 저녁 먹고 얘기하자."
"한시라도 빨리...뒤에 저거 사트냐?"

저거라고 불린 사트가 볼을 부풀리자 마마와 아트는 웃어버렸다.

"벌 잘 줘라."
"응."
"무리하진 말고. 발목 덧나면 안 되니까."
"응. 루사 형한테는 물어봤어?"
"...그 근육돼지는 묻지도 마."
"역시 기억 못 하는구나?"

차라리 그거면 말이나 않지.

전화를 끊고 아트는 자료를 보내준 뒤 시스템을 껐다. 그리곤 사트 앞에 서서 헛기침을 하더니 무릎을 굽혀 눈을 맞췄다.

"팔 아파?"
"응."
"내리게 해줄까?"
"정말? 화 풀렸어?"
"아니."

금새 시무룩한 사트를 보며 아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전야제 때 무리했는데 너무 혹사시키나 싶어서. 다른 벌 줄까? 팔 안 아픈 걸로."

2탄인 거냐...

사트는 속으로 가슴을 탕탕 쳤다.

"..그...래."
"좋아 내려."

의자를 내린 순간 위험할 거란 걸 감지했다. 불길한 예감은 틀리질 않는다.

"아, 아, 아트! 잠, 잠깐만!!"
"착하지?"

거침없는 손놀림에 사트는 움찔움찔거렸다.

"..하...하윽"

터지는 신음소리에 아트는 미소지었다.


 






 

 

"후-."

아침부터 지끈거리는 두통에 잠이 깼다. 몇 일째 철야를 유지하던 몸이 더 버티지 못하고 무너진 모양이다. 분명 책상에 잠깐 엎드렸는데 어느샌가 침대에 이불까지 덮고 누워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

뭔가 이상하다. 밤새 작업한 데이터는 없고 웬 고철덩어리들이 잔뜩 있다. 이쯤되니 몽유병이 의심스럽다. 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방주인도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뭔 짓을 한 걸까?

"만나면 뭐라 해야 하나..."

무슨 말을 해야 될 지 고민하며 방문을 열었더니 거울이 나왔다. 이 거울은 방주인에 대한 내 인식이 옳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자각시켜 줬다. 자다 일어나서 그런가 머리가 엉망이다. 손이 자동적으로 올라갔는데 만져져야 할 포니테일이 없다. 머리가 풀렸다고 보기엔 느껴지는 길이감이 지나치게 짧다. 스산한 느낌에 거울을 다시보니 올라갔어야 할 팔이 가지런히 내려져 있다. 설마...꿈 속인가?

"...어이."

한참만에 얼굴이 점점 구겨지던 거울 속의 내가 말했다.

"계속 내 손으로 그렇게 볼을 꼬집고 있으면 네 얼굴이 부을거다."

그제서야 내 볼이 빨갛게 부어오르고 있는데도 전혀 아프지 않단 걸 지각했다. 꿈이니까 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너무도 리얼한 거울상에 내 볼도 꼬집어 보았다. 난 방에 있는 욕실로 뛰쳐들어갔다. 그나마도 뒤에 서 있는 내가 오른쪽이라고 말해줘서 들어갈 수 있었다.

"이게...이게 뭐-야--!!!!!!"
"...그렇게까지 절규할 건 없잖아?"
"내가 하루아침에 근육돼지가 됐는데 너 같으면 안 미치겠어?"
"나도 하룻아침에 기생오라비 닮은 애 되서 미치겠거든?"
"뭐? 기생오라비?!"
"여자처럼 머리 길잖아."
"머리 길면 다 여자냐!!"
"난 기생오라비랬지 기생이라 한 적 없다. 으아아악!"

야무지게 볼을 꼬집었더니 내 얼굴이 더 부었다. 진짜 이걸 때릴 수도 없고.

"힘조절 잘 해! 아프단 말야..."

어지간히 아팠는지 내가 된 루사가 눈물을 글썽이며 뺨을 쓰다듬는다.

"윽..미, 미안."

잠시간의 소동 후 우린 머리를 맞대고 사건 규명에 나섰다.

"누가 장난친 걸까?"
"사트는 머리가 나쁘니 아닐거고 아트나 타트일까?"
"디에일 수도 있겠지."
"그 자식 그런 악취미도 있냐?"
"뭔 취민들 없을까."
"하긴..."

고민 끝에 식당으로 가보기로 했다. 시간이 좀 지난지라 우리를 뺀 모든 이들이 아침을 먹고 있었다.

"웬일로 둘이 같이 들어오네?"
"미운 정이 더 진한 법이지."

피곤함과 짜증이 섞인 얼굴로 옆자리에 앉으니 아트가 한 마디 한다.

"루사형 자리는 저기야."
"응? 내 자리는...아, 미안."

내가! 이 내가! 싸이코의 형이라니!!

"내가 방금 루사가 사과한 걸 들은 것 같은데?"
"밥이나 먹어라."
"형, 얼굴이 부었어. 누가 때렸어?"

다른 날 같았으면 내가 받았어야 할 손길을 속이 바뀐 껍데기가 받는 것을 보며 난 알아서 잘 꾸미란 얼굴로 눈에 불을 켜고 마마를 노려봤다.

"아니. 철야 때문에 지쳤나봐."
"쉬엄쉬엄 해."

짧게 '응'이라며 말하곤 내 눈치를 살핀다. 이에 사트가 콧소리를 내며 야릇한 시선을 보냈다.

"오늘은 분위기가 뒤바꼈네? 루사, 마마형이 잘못한 거 있어?"
"그런 거 없거든!!"

나와 루사...인 마마가 동시에 소리를 지르자 다들 동작을 멈추고 쳐다봤다. 머쓱해진 우리가 뭐라 하기도 전에 태연하게 식사를 속행한 디에가 충고했다.

"애들 체한다. 사랑싸움은 안방에서 해라."

그리곤 쏜살같이 퇴장한다. 썩을... 욕을 삼키며 묵묵히 다시 수저를 놀렸다.




"다른 건 다 그렇다쳐도 연구는 어떡하지? 내가 네 방에 있는 것도 문제고 몰래 숨어든다 쳐도,"
"그보다 난 육체적 훈련이 필순데 각자 방에 몰래 숨든 대놓고 숨든 차질이 생긴다. 내 연구는 내 몸을 필요로 하니까."

...숨는다의 정의는 아는걸까? 대놓고 숨는 건 숨는 게 아니라 들어가는거라고.

"어쩌다가 근육돼지랑 바껴가지고..."
"그건 내가 할 말이거든!"
"나도 마찬가지다!"

다시 싸우자는 분위기가 형성됐으나 그래봤자 서로에게 도움될 일은 없었다. 그나마 몸도 바껴서 현재 내 육체를 가진 루사는 턱없이 밀릴 테고 루사의 몸을 가진 나는 파워조절을 못해 사단을 낼 것이다. 어느쪽으로든 내겐 손해다.

"그러면 몸이 다시 바뀔 때까지 서로가 서로의 연구를 대신 해주는 건 어때?"
"나보고 그 골 아픈 나소드 연구나 하라고?"
"그런 너도 나소드 아머 쓰잖아. 손해날 일은 없을 텐데? 내 데이터 중에 네 아머의 성능을 높여줄 정보가 있을지도."
"그럼 넌?"
"난 체력활동이 뭔지 뼈저리게 알게 되겠지. 이거, 내가 손핸걸?"

짐짓 아쉽다는듯이, 비릿한 웃음을 흘리면

"...그럼 그렇게 하지."

아둔한 짐승이 덫에 걸리지!

"그러면 그렇게 하도록 하지. 서로가 뭘 하고 있었는지 모르니 오늘 내일은 뭘 어떻게 하면 되는지 서로에게 알려주도록 하자."
"O.K."




이로써 다소 아슬아슬한 일상이 시작되었다.























Day 1 ~ 내가 그러지 말랬지

"그게 아니라니까..."

단순하기 짝이 없는 기계 하나 쓰는데 오만년이 걸릴 기세다. 그 단순한 걸 왜 못하는 거냐.

"그니까 여기서 이걸 누르고 다음에 저걸 캡쳐해서..."
"하-."

컴퓨터 안 부순 게 용하다만 정말 기계치군.

"너 나소드 연구는 하는 거냐?"
"그, 그럼 당연하지! 다만 너와는 방식이 다를 뿐이야!"

어련하시겠어.














Day2 ~ 도대체 이건 뭐하자는 거지?

"마마. 아무리 네가 약하다지만 넌 지금 근육돼지인 강한 루사의 몸이라고. 이 정도는 거뜬히 들어야지."

방금 말에서 뼈가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제대로 하라고. 다시 돌아갔는데 물렁물렁 하면 곤란하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거뜬히는 아니거든? 확실히 루사의 몸인 지금, 평소의 나보단 역기를 잘 들고 있으나 어느순간부터 사악하게 웃는 내 얼굴(왜 사람들이 섬뜩하다는지 알겠다)에 이게 얘가 하는 훈련이란 걸 깨달았다.

독한 놈.
이러니까 근육돼지지.

"쉬지 말고 해야 덜 지쳐. 체력활동이 뭔지 뼈저리게 알게 된다며?"

...확실히 뼈가 있군.















Day3 ~ 이제 어떡하지?

서로가 서로의 연구에 익숙해질 무렵 우리는 몸이 바뀌는 에러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나야 이미 첫날부터 시작했지만 저 치는 기계 다루는 것부터 고역이었으니...쯧. 동료지만 참 한심하군.

"안에 있어?"

방에 들어온 마마가 묻는다.

"머리 좀 제대로 묶으라고."
"흥. 자르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
"너 또 꼬집힐래? 와서 앉아."

언제쯤이면 내 머리를 뒤통수를 안 보며 묶을 수 있을까?

"이렇게 한 손으로 그러모으고 다른 손으로..."

오늘도 결국 내가 머리를 묶어준다. 매번 마마의 손을 쥐고 머리를 묶는 다만 나아질 기미가 없다. 나아지려고 노력은 하는 것일까.

"자기 머리는 자기가 묶어야 돼."
"바뀌기 전까진 네가 마마다. 내 이미지에 먹칠하지 않도록 조심해."
"그러는 너야말로 너무 단정한 거 아냐? 천하의 루사가 목까지 올라오는 티를 입다니!"
"평소의 네가 불량한 거란 생각은 안 해 봤나?"
"뭐?"

화내며 입을 삐죽 내미는 게 얼굴만 바꼈지 루사답다. 다음 이어진 말에 우리 둘 다 새파랗게 질렸다.

"...은근 귀엽네."

내가 방금 무슨 말을 한 거지?!

"마마, 너 설마 나르시스트냐?"
"나, 나, 나르시스트라니! 이 정도는 자기애라고 봐야 하는 거다!"
"그래도 다 큰 어른한테 귀엽다는 좀..."
"그게..그게 뭐 어때서! 근데 여긴 왜 온 거야?"
"아 연구하다 이런 결과가 나왔는데..."


이럴 땐 바보가 편하다니깐.







'나 참. 다 큰 자신을 보며 귀엽다라니. 마마, 저놈도 정상은 아니야.'

루사는 지금은 제 방인 마마의 방으로 돌아가며 생각했다. 왠진 모르겠으나 루사는 기분이 매우 좋아보였다.

'그런 면도 있었나...큭큭."

오늘 루사는 하루종일 콧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ㅋㅋㅋㅋㅋㅋㅋ"
"재밌나?"
"ㅋㅋㅋ크하하핫!ㅋㅋㅋㅋ"
"나도 참 지독한 취미가 많다만 너같은 녀석은 처음이다."
"내 취미가 어때서?"

미친듯이 웃어재끼면서, 그 숨막힐 듯한 호흡속에서도 제 할 말은 다 하는 계약자를 보며 어둠 속의 인영은 비릿하게 웃었다.

"성공하면 좋은 일이 있을 거야."
"크하하, 크하핫!"

방을 나서며 비릿한 미소의 인영은 생각했다.

'정상이 아닌 놈이 하나 늘었군.'








2015 할로윈 기념 1탄

 

 

 

살려달라고 외치고 있다.

내 안의 모든 세포가 미친듯이 폭주하고, 차라리 감각이 없어졌으면, 모든 신경이 끊어져 아무것도 느낄 수 없기를 바랬다. 물론 부질없는 짓이겠지만...


"애드---!"


누가 내 이름을 불러준 건가? 그럴리가.


"애드--!"


시야가 없다. 차라리 흐렸으면 좋을 텐데.


"애드-"


답을...해 줘야 하는데......
















"..ㄷ....애드?"

"..웅?"

"우리 아가 깼어?"

"엄마?"


두 눈에 가득 차는 얼굴에 왈칵 울음이 터졌다.


"우리 아가가 무서운 꿈을 꿨을까?"


웃으면서, 걱정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는 시선. 이런 시선이 내게 향할 수도 있구나.


"흐...끅...엄마-!"


어리광 부리고 싶은 마음에 꾸지도 않은 악몽을 꿨다며 안겨 본다. 그런 나를 부드러이 감싸는 봄날의 햇살이 영원하길 바랬다. 이대로 모든 게 멈췄으면.


"아가."

"...응."

"우리 아가 곁에는 항상 엄마가 있단다. 그걸 잊지 마렴."


내 가슴을 검지로 쿡 누르며 짓는 미소가 서글프다.


"봄날의 햇살은 그런 미소 짓지 않아."

"ㅎㅎㅎ그런 비유를 해주다니 고마워, 아들."

"가지마."

"봄날의 햇살은 떠나야 한단다. 그래야 여름의 녹음도, 가을의 낙엽도, 겨울의 눈도 볼 수 있잖니?"

"그런 거 필요 없어! 가지마! 이번엔 가지마!!"

"애드야, 엄마는 항상 우리 애드 곁에 있을 거야. 넌 내가 가장 사랑하는,"


멀리서 부터 오는 어둠이 무서워 그리움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가지 말아달라고. 가지 말라고. 제발...


"이럴 거면 왜 나타나! 왜 매번 나타나서 두 눈을 뽑아버리고 싶을 만큼 괴롭게 만들어!!"


희미해지는 햇살에 손을 뻗으며, 벗어날 수 없는 어둠에게 발길질을 하며 빛과 어둠 사이에 세워진 장벽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산산조각 나길, 아니 조그만 틈이라도 좋으니 깨지기를 소망하면서.


"왔으면 끝까지 있어주란 말이야!!!!"


하지만 허락되지 않은 희망의 칼자루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양날의 검이 되어 내 심장을 베어버렸다.


"엄마의 하나뿐인 사랑하는 아들이니까."

















"...ㅇ?"

"윽..."

"...애드?"


결국 또 깨버리고 말았다. 흔들리는 천장과 귓가를 때리는 경고음 소리가 머리를 부술 것 같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짚으며 다시 한 번 눈을 깜빡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괜찮으십니까?"

"어떻게 된 거지?"

"쓰러지셨습니다. 경고음 소리가 나길래 들어와보니 시스템은 폭주상태고, 애드씨는 발작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왜 이러고 있는 거지?"

"자꾸 어머니를 부르시길래."


깨끗해진 시야에 들어온 것은 새하얀 나소드.


"고마워. 여왕."

"별말씀을요."

"나가봐."


다시 시스템 앞으로 가서 앉았다. 다이너모의 개혁 그리고 나를 보다 적합하게 만드는 기술을 완성해야 한다. 바로 닫힐거라 생각했던 문은 생각보다 늦게 다쳤다. 하지만 신경 쓸 시간따위 없다. 보다 더 강한 힘을 얻어야 한다. 그럴려면 지금 이 코드를 완성해야만 한다.


"...이브..."

  

그러나 마음 한 켠에선 어째서 이브가 봄의 햇살과 겹쳐지는지를 생각했다. 











"애드님은 아직 돌아오시지 않은 건가요?"

"아, 애드형은 아직이지?"

"어."

"어디 갔는데?"

"뭐가 필요해서 나가신다고, 용건은 뒤에 보자는 짧은 메모만 있었습니다."

"어디로 뭘 찾으러 간 거야."

"어디서 또 이상한 고철을 들고 와서 처리하겠지."

"엘소드, 그런 식으로 말하면 못 써."

"솔직히 틀린 말은 아니잖아."

"그렇게 따지면 저도 고철입니다만..."

"저련 훌륭한 코드를 고철정도로 밖에 못 보다니 역시, 애송이군."


엘소드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정확하겐 장내가 당황하고 있었다.


"애드?"

"흥. 설마 모습 바뀌었다고 못 알아보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이건..."

"기술을 완성했을 뿐이다. 나같은 천재가 너희보다 약하면 안 되지."

"확실히 애드씨군요."

"그래, 저 정도의 잘난 척은 애드형 아니면 불가능해."

"시끄러. 여왕, 무슨 일이지?"

"제 코드를 봐주시겠습니까?"

"또 그 감정회로인가?"

"예."

"......따라와."







그렇게 아크 트레이서 애드는 마스터마인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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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는 이미 오래 전에 기능을 멈췄다. 그저 숨만 쉬고 있을 뿐. 그저 몸을 움직일 뿐. 그 이상의 기능은 상실된 듯 하다. 전두엽의 대부분은 마비된 느낌이며 감정을 다스리는 우뇌도 사망한 모양이다. 유일하게 동작하는 것은 그저 걸어야 산다는 생존본능 뿐.


ㅡ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누군가 물었다. 의미가 있는 물음인가? 되뇌어 보지만 돌아오는 건 무(無)


ㅡ생에 의미를 어디까지 둘 거야?


다시 한 번 물어오는 목소리를 따라 걷는다. 이 소리를 놓치면 안 된다는 듯이.


ㅡ어차피 미친듯이 걸어왔어. 이제 쉬어도 되지 않아?


그래...어쩌면 그럴 수도 있어. 그러나 지금 멈추면 아무것도 남지 않아.


ㅡ무언갈 남기기 위해 지금까지 걸어온 거야?


글쎄.


ㅡ무언갈 남겨야만 의미가 있는 거야?


글쎄.


ㅡ그럼 왜 아직도 걷고 있어?


 길이라 생각한 발 밑의 어둠이 날 잡아내린다. 저 밑바닥까지 끌고 내려갈 기세로. 발을 붙잡은 암흑은 천천히 짐어삼키키 시작했다. 발, 다리, 허리, 그리고 두 팔과 얼굴. 이윽고 눈 밑까지 올라온 끈끈한 악의에, 새어 나오는 미소마저 어둠에 먹힌다.



ㅡ이제 그만 포기하라고?



그렇게 회유해도 소용없단 걸 알 텐데. 왜 아직도 저 소리인지 모르겠다. 무언갈 남겨야, 무언갈 얻어야, 무언갈 손에 쥐어야 겠다고, 그렇게 생각해서 시작한 일이지만 이 지경에 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어차피 다 망가지고 부서지고 없어진 무(無)일 뿐인 것을.


-내가 찾고자 한 것은


들릴지 모르겠지만 마음속으로 외쳐본다.


-어차피 무(無)니까.


무너져버린 과거를 세우기 위해 흐름을 거슬렀으나 돌아온 것은 멀쩡하게 세워진 채 고고히 서있는 또 다른 과거. 그것은 산사태 한 번, 지진 한 번 나지 않은 고요한 산처럼 날 조롱했다. 이후 그 산을 잡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그에 대한 결과가 이런 것이라면,


생각조차 하기 싫다.


-난 무얼 위해 산걸까?


어쩌면 목적 자체가 모순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쫓은 것은,


무(無).


-어쩌면 이미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것을 바란 것은 아닐까?


무(無)는 그 자체로 존재상실. 이것을 바꾼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었을까.


-어떤 결말이든 손해는 나지 않았어.


ㅡ어째서? 네 손에는 아무것도 없는 걸?


어둠에 잠식되어 가면서도 비릿한 웃음을 날려본다. 내 손이 비었기에, 아니, 빈 것처럼 보이기에 오히려 이익이 났다는 것을 저 목소리는 알지 못한다.


무(無)를 추구했으니 손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 정상. 하지만,


-무(無)를 통해 무(武)를 얻었다.


왼쪽 눈을 잠식한 어둠이 남은 시야마저 덮어갈 때 나는 진정한 의미의 미소를 피웠다.


-그렇기에 실험은 성공이다. 어떤 결말이든.


두 눈을 덮은 어둠이 천천히 내부로 밀려오고, 그 깊은 달콤함에 안도할 무렵, 사지가 절단되는 느낌이 전신을 휩쓴다. 이제는, 정말, 쉴 수 있구나...












그렇게 난 악마의 화신(Diabolic Esper)가 되었다.



눈앞의 적은 셋. 무슨 연윤지 한 줄로 오고 있다.

탕탕

앞으로 한 발

탕.

-실험종료 실험종료.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신기하다. 이번에도 성공했냔 표정의 사람들을 지나 내 방으로 향한다. 8시간 후 실험은 다시 시작된다.

스프링 삐걱이는 소리만이 내가 살아있단 것을 알리는 유일한 소리. 난 무얼 바라는 것일까.

아니다. 가정이 틀렸다. 바라는 것이 아니라 바랄 수 있냐가 먼저겠지.

탕탕탕!

영원히 닫혀 있으면 좋을 철문이 열리고 식사가 들어온다.

-오늘도 끝내주더군

눈길도 주지 않고 밥을 우걱우걱 집어넣는다. 이것도 일상이 된 듯 음식을 가져온 '관리자'란 녀석은 기분 나쁜 기색마저 없다. 으레 그러면 그렇지라는 무언의 시위. 하지만 엄연히 저쪽  사정이다.

-네가 최장수란 건 알지? 잘할 거 같아 키우긴 했지만 이 정도로 오래 버틸 줄...

다 먹었어.

그 한마디로 상황은 종결됐다. 말이 잘린 남자는 툴툴거리며 이동식 테이블을 가지고 나갔다. 나지막한 욕설과 함께. 철문이 다시 잠기고 인기척이 사라지자 뒤집어 쓴 이불을 팽개치고 창문으로 갔다. 3개의 철봉이 이곳이 감옥 아닌 감옥임을 알려준다. 그나마 실적이 좋아 이런 같잖은 창문이라도 있는 거지만.

오늘은 있을까?

큰 키 덕에 바깥풍경 보는 건 쉽다. 하지만 아무리 보이지 않는 곳까지 어거지로 봐도 내가 찾는 것은 안 보인다. 정확하겐 그게 뭔지도 모르겠지만 어렴풋한 환상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환상이라면, 다시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이런 걸 미련이라고 하는 걸까. 햇빛을 받아 반짝이던 그것은 바람에 나부끼며 제멋대로 빛을 반사했었다. 머리카락 같았으나 그 빛이 이질적이라 차마 믿을 수 없었던 것. 그것은 처음본지 4일째 되던 날 홀연히 사라졌다. 다시 한 번 볼 수 있을까 내심 기대하며 창 밖을 보는 것도 어언 일주일. 부질없는 짓이 한심하다.








-어이 일어나.

어김없이 영원히 닫혀있길 바란 철문이 열리고 익숙하지만 낯선 목소리가 들린다.

-쇼타임♡

관리자란 놈의 시릴듯 푸른 미소가 어두운 전등빛에 일렁인다. 뿌연 시야를 문지르며 조용히 총을 들었다.


-룰은 동일하다. 시간이 종료될 때까지 살아남도록!

전쟁. 나와 같이 서있는 이 자들은 매일 밤 생존 전쟁을 치른다. 일부는 아침에 다시 볼 수 있지만 일부는 실종된다. 어차피 다음날 저녁이면 어떻게든 보겠지만.

-실험시작. 실험시작.
-어뮤즈먼트 파크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야릇핫 공기가 코를 찌른다. 문이 열리자마자 도살장에 보내지는 돼지처럼 처넣어진 우리들은 뿔뿔히 흩어졌다. 동질감이나 동료의식따윈 없지만 그래도 아침에 볼 수 있기를 바란다.













내가 이곳에 처음 오게 된 날도 석양빛 노을이 더없이 아름다운 날이었다. 부모에 대한 기억은 없다. 그저 손에 쥐어진 보라색 실이 그들에 대해 내가 추억할 수 있는 전부. 사람들은 날 전쟁고아라고 불렀다. 예쁘장한 외모 때문에 여러집을 전전하며 하인으로 쓰이다가 전쟁 막바지에 부도가 난 주인이 날 서커스단에 팔았다. 예쁜 외모덕에 실수를 해도 얼굴은 맞지 않았으나 다음날은 어김없이 속옷만 입혀진 채로 천막 끝에 대롱대롱 매달리거나, 위험하기 짝이 없는 묘기의 대상이 됐다. 좀 심하게 또는 많이 실수를 한 다음날은 여장을 당한채 어른들에게 던져졌다. 그리곤...... 그나마 나보다 어린 여자아이가 들어온 뒤로는 홀딱 벗겨지는 일은 없었으나 보이지 않는 부분은 피멍이 들었다.
기억하고 싶진 않지만 이게 내가 실험이란 명목하에 벌어지는 '사냥'을 끝낸 후 매번 꾸는 꿈이다.


탕탕탕!

오늘도 어김없이 총성으로 끝나는 꿈. 실제로 이런 건 아니지만 그 서커스단 인간들한테 구멍을 내는 것으로 내 꿈은 끝난다. 이건 아마 내가 지금 이곳에서 매일 하는 일 때문이리라.

방이 새까만 걸 보니 오늘은 불려나가지 않은 모양이다. 이렇게 가끔 휴무 아닌 휴무를 준다. 대부분 한계치 이상까지 돌린다는데 난 이미 그것을 넘은 것일까. 다른 놈들보단 대우가 나은 편이다. 적어도 학대는...

-꺄아아아아악-!

언젠가 들은 비명소리에 움찔하니 관리자가 좋은 일 있나보네라며 킬킬거렸었다. 소리의 주범은 굳이 원하지 않아도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 날 밤 사냥 대상에 포함되었으므로.

짐승만도 못한...

속으로 욕지거리를 삼키며 끝도 없이 흘러간 생각을 붙잡자 쪽빛으로 물든 창문이 보인다. 유일하게 이 방과 바깥을 연결해주는 매개체가.

이제는 포기한 지 오래된 그 날의 아지랑이를 떠올리며 빛이 바래가는 기억의 조각을 수평선 너머로 던진다. 초점 없는 눈은 그 무엇도 비추지 않은 채 오로지 달빛만을 끌어들였다. 끝없는 내면의 어둠 속으로. 흔들리는 시야. 생명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바깥풍경으로부터 등을 돌리자 알 수 없는 어둠이 찾아왔다.

갑자기 깜깜해진 방. 아까까지만 해도 켜져 있던 전등은 언제 그랬냐는 듯 꺼져있다. 불길한 마음에 총이 있는 곳으로 발을 옮기는 순간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앞으로 날리던 주먹을, 그 손을 부드럽게 감싸는, 그 날의, 환상.

-여기 계셨군요.

형형한 보라빛 살기를 뿌리는 금속물체는 신종 무기인 건가.

-찾고 있었습니다.

그 날 내가 본 것은

-흔들리는 은빛 아지랑이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그것은 환상이 아닙니다.

당신은 누굽니까?

-먼저 동화를.

주변에 있던 것 중 가장 밝은 것이 내 앞으로 왔다. 발광하는 전원 모양에 손을 올리자 기분 좋은 느낌이 전신에 퍼진다.

아주 오랜만이다. 이런 상쾌한 기분은.

-이번의 당신은 좀 더 차분하군요.

날 아는듯이 말하는 너는.

-이제 그만 가야 합니다. 곧 그들이 올 겁니다.

긴 은발이 내 머리카락만큼 이질적이다. 인간인 듯 하면서도 아닌 듯한 이색.

-이름이?
-제 이름은 이브입니다.
-이브...
-시간이 없습니다.

처음으로 누군가가 내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이것이 호의인지 더 큰 악의인지는 알 수 없으나 자발적으로 그 손을 잡았다. 처음으로, 내밀어진, 그 손을.

-내 이름은

뚫려버린 벽의 굉음 속으로 나아갔다. 황량했으나 가슴이 딱 뚫리는 느낌이 상쾌하다.
여자 주변에 있던 물체들은 이제 내 주변을 맴돌고 있다. 당연히 그래야한단듯이.

-다이너모라고 합니다. 당신이 만든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경황은 없어도 인사는 해야겠지.

-영원히 저곳에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꺼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은혜를 갚을 뿐입니다.

스치는 미소가 여태 본 것과 달라 뭐라 해야할지 모르겠다. 적어도 잡고 있는 이 온기에 악의는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인지할 뿐.

-내 이름은 애드, 애드 마스터마인드입니다.

갑작스런 통성명에 미소가 짙어진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애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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